여성 돌격대 대장을 통해 본 북의 시집생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철주의 항일투쟁 그리고 조선인민군 창군과정을 영화로 보면……

지난 주(6.8~14)‘조선중앙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된 약 9편의 영화가운데 <그들은 제대병사였다>(2002)와 <성새>(1988), <영생>(1988)을 중심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제대병사였다>(2002)  [영화 바로보기]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1년 7월 현지방문한 범안협동농장의 제대병사 부부의 집을 모델로 한 예술영화 <그들은 제대병사였다>(2002). [캡쳐사진 - 유영호]

이 영화는 200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황해북도 서흥군 범안협동조합을 방문하여 만난 박용철, 김성녀 부부를 모델로 만든 영화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곳을 “로동당시대의 무릉도원이고 사회주의선경”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는 이들 제대병사 부부를 중심으로 한 마을 인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마을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자체의 소형 수력발전소까지 건설 된 ‘무릉도원’이라고 극찬된 곳이지만 당시까지도 전력생산이 부족하여 전기밥솥조차 작동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은 김성녀에게 전기로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되면 자신에게 편지를 꼭 보내라 하였고, 두 달 뒤 그것이 가능해지자 그녀는 국방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 농장원김성녀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 준 김정일위원장의 편지. [캡쳐사진 - 유영호]

영화내용은 마을 고사포진지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던 주인공 옥림이 제대 후 자기고향 방직공장에서 일하다 다시 군복부지 근처 협동조합으로 자원하여 이주하여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맏며느리로, 아이엄마로, 농장원으로 일하면서도 마을의 발전을 위해 자진하여 양어장건설의 돌격대를 가정주부들로 꾸리자고 제안한다. 이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기어이 돌격대사업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큰 부정인물이나 갈등요소는 없다. 자본주의 상업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내용이다. 하지만 북은 “부정이 없이는 영화작품에서 흥미를 보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갈등이 없이는 영화작품이 구성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부르죠아 미학관이며 낡은 극작법의 표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북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있어 “우리 식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즉 “주체사실주의”를 내세우며 “이전의 어느 창작방법보다도 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북의 예술영화가 “혁명과 건설의 참된 주인공의 전형을 창조하는 것”이 주요목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인물로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남쪽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를 통해 북쪽 인민들의 농장 및 가정생활을 엿볼 수 있는 점이 이 영화를 보는 맛이다.

남녀 구분없이 편성되는 군대복무, 제대병사에 대한 높은 신임, 며느리로서의 시집생활, 시아버지의 며느리사랑, 돌격대생활을 하는 가정주부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남편의 방조 등 흥미로운 부분이 꽤 많다.

▲ 시아버지만 따로 밥상이 차려져서 식사하는 모습. [캡쳐사진 - 유영호]

예컨대, 영화 속에서 주인공 옥림의 집에서는 식사를 하며 시아버지 밥상은 따로 차려진다. 이것이 단지 남녀의 구분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시아버지를 제외한 남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다른 상에서 식사하기 때문이다.

▲ 주인공 옥림의 남편역을 맡은 공훈배우 리영호.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당시 전대협 대표 임수경을 안내했던 인물이다. [캡쳐사진 - 유영호]

참고로 이 영화의 주인공 옥림의 남편 역으로 출연한 사람은 당시 공훈배우 리영호이다. 바로 이 배우가 지난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을 안내한 사람이다.

당시 리영호는 일반 배우였지만 1986년 창작된 <홍길동>의 주인공 역을 맡아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후 <고귀한 이름>(2003), <종군작곡가 김옥성>(2012) 등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공훈배우, 인민배우로까지 배우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인물이다.

<성새>(1992)  [영화 바로보기]

▲ 해방 후 조선인민군 창군과정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영화 <성새>(1992). [캡쳐사진 - 유영호]

‘성새’란 ‘성과 요새’를 아우르는 말로 이 영화는 해방 후 정규무력으로서 조선인민군을 건설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북에서는 이 영화에 대하여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주체적인 군건설위업이 빛나게 실현된 력사적사실을 생동한 예술적화폭으로 보여주고”있을 뿐만 아니라 “안길, 김책, 최현을 비롯하여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대한 군건설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항일혁명투사들의 끝없는 충성심과 적극적인 투쟁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북에서 영화란 “가장 중요하고 힘있는 대중교양수단”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통해서 북은 인민들에게 해방 후 조선인민군 건설이 어떤 ‘사상’과 ‘영도’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분단된 현실 속에서 영화에 나오는 구체적 사실 모두가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인지는 역사학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북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인민들에게 전하고자 했는지를 보고자 한다.

북은 사회정치적생명체를 “주체적영화예술의 형상원천”으로 여기며, 또 이를 “형상하는데서 중요한 것은 수령, 당, 대중의 3위일체의 원칙”이다. 이러한 창작원칙 속에서 ‘수령’으로서 김일성의 정규군 창설에 대한 사상과 영도, 그리고 혁명의 참모부인 ‘당’으로 항일혁명 1세대 안길의 충직한 사업작풍, 마지막으로 식민지고통에서 해방된 조선인민들의 무력건설에 대한 열기와 참여가 3위일체가 되어 ‘미군과 반동’들의 온갖 방해책동에도 창건할 수 있었다고 인민들에게 알려준다.

영화 속에는 미군정청의 사주에 의해 백선엽이 조만식의 민주당 속에 침투하여 온갖 방해공작을 할 뿐만 아니라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는 허가이가 정규군 창설이 이르다며 반대한다. 또 창군사업에서도 프롤레타리아 관문주의 등 그의 교조적 태도로 인해 ‘통일혁명전선’이라는 대원칙이 끊임없이 방해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 속에서도 창군 과업을 받은 안길은 그 방해책동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리혁과 최성운 등 일본학교에서 공부한 비행사와 선박전문가를 인민군 창군에 동참시킨다. 물론 이러한 일제시대 지식인들의 참여에 반대하는 허가이 세력에 의해 이들은 자신의 애국심을 믿어 주지 않는 것에 갈등하지만 결국 수령과 당의 이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를 극복하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창군사업에 떨쳐 일어나게 된다.

영화는 해방 후 조선인민군 창군과정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교육할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생명체’의 변화발전 과정을 영화 속 출연인물들의 생활을 통해 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다.

▲ 영화 속에 나타나는 김일성 주석의 모습. 특히 바닷가에서 항일혁명 동지들과 내의 차림으로 야유회를 보내는 모습을 형상하여 인민적 모습을 형상하고 있다. [캡쳐사진 - 유영호]

참고로 이 영화는 ‘수령’으로서의 김일성의 모습이 직접 화면 속에 출연하는 소위 ‘수령형상영화’이다. 김일성 주석의 해방이후 젊은 시절의 모습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형상되고 있는 우리 남쪽 관객들에게는 관심사항이 될 것이다.

<영생>(1988)  [영화 바로보기]

▲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철주의 항일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예술영화 <영생>(1988)으로 '수령형상영화'이다. [캡쳐사진 - 유영호]

이 영화는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반일투쟁 과정에서 전사한 김일성 주석의 첫째 동생, 김철주를 형상한 것이다. 1987년 중국 신화통신에 의해 김철주의 유일한 사진이 실리게 되면서 이듬해 그의 반일투쟁을 항일혁명가 “림춘추의 회상에 기초하여”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6월 13일과 14일 이 영화 전후편이 방영되었는데 14일이 바로 그가 전사한 날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육체적 생명은 죽었을 지라도 정치적 생명은 ‘영생’한다는 의미로 영화제목을 정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작 나래이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진은 김철주 동지의 모습을 전해주는 유일한 사진이다. 1987년 5월 21일발 신화통신은 ‘반세기 동안의 추억’이라는 제목 밑에 이 사진이 김철주 동지가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전사 장울화 동지와 함께 1935년 찍은 것이라고 전했다. 김철주 동지가 스무살의 꽃나이로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언감 반세기가 흘러갔다. 허나 그에 대한 추억은 우리인민의 가슴속에 오늘도 새로워진다.”

▲ 예술영화 <영생>(1988)의 첫화면(좌)과 신화통신이 보도한 김철주에 대한 유일한 사진. [캡쳐사진 - 유영호]

참고로 위 사진에서 김철주와 함께 찍은 장울화는 중국 무송제1소학교 시절 김일성 주석의 동창생으로 당시 무송 대지주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훗날 자신의 친구 김일성의 안전을 자신의 목숨으로 담보한 김주석의 중국인 혁명전우이다.[장울화 이야기 관련 외부 기사보기]

한편, 이 영화 역시 항일혁명군 사령관으로서 김일성이 출연하는 수령형상영화이다. 여기서 사령관으로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김철주의 친형으로서 동생의 혼사를 걱정하는 등의 모습도 관심을 끈다.

이 밖에도 여러 편의 영화가 방영되었다. 그 중 <통일방송>홈페이지에 업로드 된 것을 중심으로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생각>(년대 미상)  [영화 바로보기]

연구사 정임이 인민들의 의생활 문제를 완전국산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하나의 생각’으로 17년을 연구한다. 그리고 최종실험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독성물질을 제거함으로써 순수국산합성섬유시약으로 옷감을 완성해 내는 이야기.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동료연구사의 죽음과 또 다른 연구사의 아내로서의 갈등 등이 얽혀지며 진정한 과학자의 삶을 그려낸다.

그리고 전쟁 시기 군사정탐과 습격전투를 영웅적으로 한 인민군들의 모습을 형상한 <번개와 우뢰>(1995), 또 묘향산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 일하는 석공과 여행 온 처녀화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우리는 묘향산에서 다시 만났다>(1983). 뿐만 아니라 봉흥군의 신임 군당책임비서가 열악했던 조건을 뚫고 6년간 열성적으로 일함으로써 근위 1급 군으로 바뀐 이야기를 담은 <한 당일군에 대한 이야기>전후편(1981) 등이 방영되었으며, 또 젊은 여기사가 강냉이농사를 모범적으로 성공시킨 이야기<우리농장 녀기사>(1975) 등이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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