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산악회 최고령인 유기진 선생을 지난 4월 15일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명예회장과 함께 수유리 자택으로 찾아뵈었다. 등산에서 몇 년째 뵈면서도 ‘인민군 출신 장기수’란 사실과 경이적인 체력에 대한 호기심으로만 바라보던 선생. 몇 차례 인터뷰 요청에 “내가 살아오며 한 게 뭐가 있다고”라며 늘 고사하던 선생도 권 회장의 요청에는 순순히 응해 주셨다. 귀만 조금 어두울 뿐 선생은 정정했다. 인민군 중대장으로 참전, 빨치산 활동과 수형, 40년 간의 택시운전. 올해 구순을 맞은 선생의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필자 주


▲ 올해 구순을 맞은 인민군 출신 장기수 유기진 선생. [사진 - 류경완]

<유기진 선생 약력>

◇ 1925년 1월 16일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축상리 90번지 농가에서 부친 유치보 님과 모친 김어인순 님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
◇ 27년 홍수 재해로 삼수갑산 화전민촌으로 이주, 2년 뒤 귀향
◇ 37년 하원천보통학교 3학년 편입, 41년 졸업
◇ 42년 함흥농업학교 입학, 학비 부담으로 이듬해 중퇴
◇ 44년 일제 징병예비병력으로 차출, 흥남비료공장 노역징발, 일본인 십장과 다투다 헌병대 구금, 유치장 탈출.은신하다 해방을 맞음
◇ 해방 직후 열병으로 부친, 동생, 숙부모, 사촌 등 일가 병사
◇ 함주군 주지면 민청 일꾼으로 활동하다 47년 8월 군 입대, 만포 45mm 포병부대 배속
◇ 48년 7월 내무성 소환, 38경비대 해주 포병직속중대 1분대장으로 복무, 김석원 백골부대에 맞서 1년 반 동안 까치산, 운파산 전투 등 참가
◇ 50년 3월 재소환, 특수교육 후 소대장 임명, 전쟁 발발 후 인민군 9사단 직속연대 포중대장으로 참전, 낙동강 2차 도하 전투 중 왼쪽 발목 관통상
◇ 9.28 후퇴 때 회문산 입산, 문화부 소속으로 빨치산 활동
◇ 51년 1월 15일 장진호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던 미군의 폭격으로 모친 사망
◇ 54년 1월 덕유산 숯막에서 동료의 배신으로 국군 토벌대에 피체, 광주 포로수용소 수용
◇ 54년 12월 청주형무소 감방에서 재판 없이 특별조치령 위반으로 10년 선고
◇ 58년 전주교도소 전향공작사건, 고문을 통한 100% 강제 전향
◇ 61년 10월 1일 5.16군사정권의 특별조치로 목포형무소에서 출소(37세), 서울 갱생보호소와 동두천 두부공장 등 전전, 주변의 보증으로 인민군 출신 출소자들에 대한 납치 위기 모면
◇ 62년 박초순 님과 결혼, 3남 1녀, 미아리 구멍가게 운영
◇ 70년 40년 간의 택시운전 시작, 71년 부인 폐결핵으로 사망
◇ 72년 반금숙 님과 재혼
◇ 99년 2월 금강산 관광
◇ 2003년 2월 남북이산가족 상봉에서 평양의 여동생 유복순 님과 해후


선생은 1925년 1월 16일 함경남도 신흥군 하원천면 축상리 90번지에서 부친 유치보 님과 모친 김어인순 님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원천은 장진수력발전소 인근으로 함흥 북쪽 100리 길에 있었다. 두메산골이지만 부친이 열심히 일해 좀 넉넉한 농가에서 복순, 진순, 태진 세 여동생과 함께 농사일을 배우며 성장한다.

20년대 시작한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가혹한 수탈에 민초들은 풀뿌리로 연명한다. 홍수까지 겹친 세 살 때 가족은 삼수갑산의 화전민촌으로 이주해야 했다. 하지만 그 곳의 삶도 한 많은 타향살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소를 타고 2년여 후 다시 귀향한다.

시골에서는 드물게 서당에 다니던 선생은 13세 되던 37년 하원천 보통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41년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농업중학교에 진학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버리고 ‘함흥차사’를 만들어냈던 함흥본궁에서 가까웠다고 한다.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함흥의 전경이 눈에 선하고, 자식 교육을 위해 당나귀에 곡식 싣고 100리 길을 걸어오시던 부친 생각에 가슴시리다. 학비에 하숙비 부담까지 얹혀드릴 수 없었던 선생은 고심 끝에 2학년 중퇴를 하고 만다.

▲ 해방 무렵의 선생(가운데). [사진제공 - 유기진]

▲ 선생이 건너 다니던 함흥시 만세교 모습. [사진제공 - 유기진]

고향으로 돌아온 19세 청년을 현실에 눈뜨게 하고 이후 삶의 노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6촌형 유종진이었다. 20년 연상의 형은 야학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에 힘을 쏟으며 ‘아리랑’ 등의 연극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던 애국투사였다. 감옥살이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아 바로 조직을 결성하는 등 남다른 활동을 했다고 한다. “레닌이 ‘나는 노동자와 똑같은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주기도 한 형이었다.

스무 살 되던 44년 선생은 징병예비역으로 차출되어 흥남비료공장 노역에 동원된다. 어느 날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며 일본인 십장과 다툰 것이 화근이 되어 헌병대까지 끌려갔다. 이후 유치장에서 탈출하여 숨어 다니던 중 고향집에서 8.15 해방을 맞는다.

그런데 해방 직전 보국대로 끌려갔던 사촌동생 춘진이 돌아오면서 그만 열병을 얻어 왔다. 그 병이 집안에 전염되기 시작해 숙부와 숙모, 사촌, 동생, 조카 등이 차례로 병사하고 급기야 부친도 해방 몇 달을 못 넘기고 세상을 떴다.

가업을 이은 선생은 농사일을 하며 민청에 들어간다. 함주군 주지면 당원이던 동복(同腹)형 이명훈을 따라 민청 일꾼으로 2년 정도 활동했다. 당시 8.15 이전에 이미 해방의 날이 임박했음을 전했던 최종문 면당위원장의 적극적인 활동도 기억하고 있다. 한설야가 흥남 시당위원장을 맡고 있던 무렵이었다.

<계속>

(수정, 17일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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