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서(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1992년 8월, 난 시위 진압을 위해 서울대 앞에 있는 광장에 서 있었다. 서울대 광장은 전날의 시위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 채 던지지 못한 돌멩이들과 발사하고 남은 최루탄 탄피들이 방패 깔고 앉을 틈이 없을 정도로 많았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였다.

공권력의 집행을 위해 내가 속한 부대 외에도 다른 부대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전날 진압을 담당했던 부대와의 교대를 위해 집결한 병력들이었다. 그 당시 내가 맡은 임무는 부사수였다. 최루탄을 발사하는 총을 가진 사수 분대장을 따라다니는, 최루탄을 양쪽 어깨에 가득 메고 다니는 부사수였다.

아침 일찍 도착했으나 학생들도 전날 치열하게 시위를 해서 쉬고 있는지 오전 내내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함성을 지르고 광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다여서 학생들과 별 접촉이 없었다. 그렇게 오전과 오후를 보내고 이제는 부대로 복귀하려나 했는데, 우리 부대에는 복귀가 아닌 철야 근무 명령이 떨어졌다. 해가 지자 큼직한 물건들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 물건의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으나 모양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물건이었다.

 
위의 물건들이 놓여지면서 우리는 성 벽 뒤에 있는 셈이 되었다. 그 뒤에서 우리는 방패를 깔고 교대로 잠을 잤다. 난 사수인 분대장 옆에서 잠을 잤고.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학생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고, ‘기상! 기상!’이라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 눈을 뜨니 내 옆에 있던 분대장이 잽싸게 최루탄 격발 총을 챙기더니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나도 순간적으로 분대장을 따라 뛰었다. 그 새벽에 진압복을 입은 전경 두 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후방의 어둠 속으로 냅다 뛴 것이었다. 한참을 뛰다가 우린 멈춰 서로를 쳐다봤다. 분대원을 통솔해야할 분대장이 제일 먼저 튄 것을 확인했고 그 새벽에 도망친 유일한 전경이 우리 둘뿐이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죄로 따지면 부대를 이탈한 ‘도망죄’에 해당하는 것도 같고 탈영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린 또 다시 뛰었다. 우리가 뛰어왔던 반대쪽으로 다시 헐레벌떡 뛰었다. 그리고 부대에 합류했을 때 우리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아마 그날 새벽에 멈추지 않고 계속 뛰어 도망을 쳤다면 분대장과 나는 도망죄 또는 탈영으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먼저 도망친 분대장이 먼저 멈춘 덕분에 우린 그 죄에서 벗어났다.

이상이 내가 군대에서 법의 심판과 집행을 모면한 이야기이다.

‘집행’이라는 말은 법률 용어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래서 남북의 사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풀이를 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조선말대사전》

① 실제로 시행함

② 법률, 명령, 재판, 처분 따위의 내용을 실행하는 일.

③ =강제 집행

 

① 실제적으로 실행하는 것.

② (법과 규범, 재판 검찰 기관의 결과 지시 같은 것을) 현실적으로 되게 시행하는 것.

③ -------------------------------------.

④ ‘강제집행’의 준말

남과 북의 ①, ②번 풀이가 같고 남의 ③번과 북의 ④번 풀이가 같다.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것은 《조선말대사전》의 ③번 풀이로 “------------”로 처리한 부분이다. 이 풀이를 보이기 전에 북측의 용례를 보이면 아래와 같다.

⁃ 용근 아바이는 서투르게나마 모임을 {집행하여} 나갔다. 《리북명: 등대》
⁃ 회의를 {집행하기} 위하여 초급단체 부위원장 불꽃이 사람들 앞에 나섰다. 《백현우: 젊음을 자랑하라》
⁃ 회의를 {집행하는} 소장은 먼저 리지민 교수에게 조의를 표하고 우리 모두가 그처럼 조국과 인민에게 무한히 충실한 과학자로 되자고 호소하였다. 《김동섭: 로보트 - 승리호》
⁃ 해당 부문의 기술자들과 생산 직장의 작업 반장들, 맨 앞좌석에 틀고 앉은 로동 안전과의 성원들은 오늘의 모임을 {집행하는} 공장 기사장의 말꼭지를 접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훈훈해졌다. 《황용국: 이땅을 사랑하라》
⁃ 엄혹한 시대의 파동 속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의라 누구나 다 긴장하고 엄숙한 그야말로 회의의 력사적인 의의를 감득한 그런 얼굴들로 교실을 메웠다. 그런데 회의를 {집행하러} 나간 강창수는 말을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 《415문학창작단: 은하수》
⁃ 나는 회의를 {집행하면서도} 내내 두 사람을 살폈다. 《오광호: 대답》

북측의 용례에서 ‘집행’ 대신에 ‘진행’을 넣어도 문장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북측 용례에 쓰인 ‘집행’의 의미는 ‘진행’과 다르다. 진행은 ‘어떠한 일을 처리하여 나감’의 의미만 있는데 반해 북측의 ‘집행’에는 첨가된 의미가 있다. 그 첨가된 의미는 위에서 보이지 않은 ③번 풀이에 있다.

  ③ 회의 같은 것이 제대로 운영되어 나가도록 이끌어 가는 것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