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최악의 비방중상 국면

남북관계가 최악의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또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남북이 주고받는 언어의 살벌함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다.

“박근혜가 이번에 오바마앞에서 놀아댄 몰골을 보면 흡사 주먹깡패를 불러다 누구를 혼내달라고 떼질쓰는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애 같기도 하고 기둥서방에게 몸을 바치면서 남을 모해하는 간특하고도 요사스러운 기생화냥년 한가지이다.”(4월 27일자 북한 조평통 대변인 성명)
“북한이란 나라가 나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인권이 있습니까? 자유가 있습니까? 계속 거짓말하는 역사 퇴행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로 있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빨리 없어져야 하는데요.”(5월 12일자 국방부 대변인 김민석의 발언)

이런 정도면 그야말로 최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냉전 시기의 남북관계에서도 이런 정도의 발언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북한의 대남공세에 사용되는 언술은 정세에 따라 워낙 진폭이 크고 때로 자극적이고 입에 담기 어려운 무례한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런 정도의 욕설은 냉전시기에도 거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외교적으로 훨씬 세련된 남한 정부가 공식적 자리에서 북한에 대해 ‘나라도 아니다’라는 막말을 한 경우도 최소한 냉전 이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다.

지난 2월 14일의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북과 남은 호상 리해와 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중상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라고 합의한 공동보도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런 격렬한 상호비방이 오고가는 것은 현재의 남북관계가 갖는 불안정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실 지난 2월의 고위급회담 공동보도문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남쪽으로서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시기에 북이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한 것이 북의 중대한 양보를 얻어낸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고, 또 북으로서도 상호 비방금지를 공적으로 약속받은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북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이 합의는 북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비방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체제인정으로 가는 과도적 조치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방중상의 상호 동학(動學)

상호 비방금지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문제의 하나는 언술로 인한 긴장도 군사적 긴장과 마찬가지로 남북 사이의 ‘상호작용’의 산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남쪽에서는 비방금지의 문제를 주로 북한의 횡포한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방적 피해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이는 특히 남쪽 당국의 태도에 스며있는 전형적인 비방에 대한 인식론이다. 하지만 올 봄의 상황을 돌아보면 우리 정부의 이런 일방적 피해 주장은 사실과 많이 동떨어져 있다.

올 연초 북한 국방위는 설 명절을 계기로 ‘서로를 자극하고 비방중상하는 모든 행위를 전면 중지할 데 대한 중대제안’을 남쪽 당국에 정식으로 제안하였다. 이후 정부는 북한의 중대제안을 거부하였고, 북은 이에 대해 “우리의 최고 존엄을 악랄하게 헐뜯고 우리의 체제에 대한 터무니없는 비방중상이 계속되는 한 이룩된 합의의 리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2.6 북한 국방위 정책국 대변인 성명)라며 남북간 비공개접촉에서의 합의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식의 입장을 발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제의로 판문점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고 거기서 상호 비방금지가 합의되었다. 그 결과 이산가족 상봉은 예정된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북은 그 경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상부의 위임을 받고 고위급접촉에 나선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신뢰조성이 대통령의 의지》라고 하면서 《우리 당국은 비방과 중상을 하지 않을 테니 지켜봐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측이 미군과 남조선군에 의한 북침전쟁연습이 감행되는 기간인데도 흩어진 가족, 친척상봉을 예정대로 성사시킨 것은 《신뢰조성》으로 관계개선의 기초를 쌓겠다고 한 남측의 언약을 일단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각기 최고수뇌부의 특명을 받아 진행된 접촉에 대한 기대는 높았고 거기서 이루어진 합의에 대한 믿음은 컸다.”(<조선신보>, 4월 25일자)

그러나 비방금지가 합의된 직후인 3월 25일 헤이그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서 북핵 불용 발언과 한미일군사동맹 강화 및 미국의 한일 안보보장이 논의되었다. 또 로우키(low-key)로 전개하기로 약속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은 미국의 강력한 의지로 인해 사상 최대 규모로 공개리에 추진되었다. 드레스덴에서의 자극적인 독일통일 언급과 오바마 방한시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 병진노선에 대한 공세 등도 북한으로서는 심각한 체제비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발언들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북남관계가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불신과 대결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이 박근혜의 입 때문”(4월 12일자 북한 국방위 대변인 성명)이라면서 즉각 박근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방을 재개하였다. “판문점에서 이루어진 합의에 관계없이 (…) 북의 병진로선을 비방하고 《북의 도발》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대결을 고취하였고, 외국수뇌들을 만나서도 동족을 모해하는 악담을 늘어놓았다”(앞의 <조선신보>)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의 발언 외에도 윤병세 외교부장관의 자유민주체제로의 통일 발언, 유길재 통일부장관의 ‘국물도 없다’는 발언 등도 북한을 매우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결국 북한의 일방적인 비방공세 이면에는 남측 정부의 일상화된 북한체제 부정 발언과 실질적인 군사위협, 그리고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라는, ‘물리력을 동원한’ 대북 비방공세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 지점은 남과 북 사이에 상호비방의 기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남은 비방중상을 ‘언어의 폭력성’에 주로 기준을 두고 있지만, 북은 언어의 조탁(彫琢)과 상관없이 ‘최고 존엄을 모독하고 체제를 비난하는 것’ 자체를 특대형 도발행위라고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북은 ‘그 누구의 《고통》이니, 《배고픔》이니 하며 없는 사실까지 날조하는 것’도 비방중상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이런 북의 기준에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나 정부 주요 인사들의 대북발언은 거의 예외 없이 특대형 도발행위이자 비방중상의 전형에 속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방중상과 한반도정치

이런 비방의 상호동학을 전제로 하면, 남북 사이에 비방중상을 중단하기로 합의하는 것은 남북 모두가 스스로를 크게 제약하는 매우 중대한 결단이라 할 수 있다. 상호 비방 중단은 본질적으로 상호인정의 초기 단계이며 그 단계의 가장 중요한 행동기준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이 합의는 남이 북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혹은 북이 남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호작용’의 고리를 끊어내는 각 행위자의 성찰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없이 불가능하다.

‘역지사지에 근거한 성찰적 남북관계’로 나아가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 단지 일시적 필요에 의해 비방중상 금지를 거리낌 없이 합의한 결과가 바로 오늘의 남북관계일 것이다. 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 간 비방중상이 재개된 것은 이 합의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목전의 이익만을 위해 책임감 없이 합의에 응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박근혜정부의 신뢰프로세스가 근본적으로 불신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흔들리는 분단체제’는 남쪽이라는 반국(半國)의 정치만이 아니라 남북을 포괄하는 한반도정치가 세계체제와의 연동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는 북한 역시 잘 알고 있으며 또 그간 적절히 이용해 왔다고도 보인다.

그러나 무절제하고 조악한 욕설로 가득찬 북한의 대남비방 언설(言說)들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의 호오(好惡)를 차치하고 한반도의, 특히 남쪽 시민들의 대북인식을 크게 악화시키고 있다. 북한이 아무리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발사하여 군사강국이 된다 한들, 남쪽 시민들의 반북의식이 깊어지는 한 절대 세계적 강국이 될 수 없고 한반도 정세를 주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도 가질 수 없게 될 것이다.

북한은 지금부터라도 욕설로 가득한 조악한 대남 언설을 중단해야 한다. 욕설도 일종의 공격이며, 군사적 공격과 마찬가지의 위협을 가하는 행위이다. 한반도 정치의 핵심당사자의 하나로서 비방중상 금지를 넘어 궁극적인 상호인정에 기초한 한반도식 통일과정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북한 역시 과거와 다른 성찰과 역지사지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는 박근혜정부에 대한 북한의 최종적인 평가(“선행 이명박정권보다 더 교활한 정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결론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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