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로스앤젤레스에서 KOWIN(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서부지부 주최로 “‘위안부’ 문제 바로 알기- Justice for ‘Comfort Women’” 컨퍼런스에 연사로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미하원 에드 로이스 외교위원장, 일본계 2세들의 민권운동단체 NCRR 케시 마사오카 공동대표, 글렌데일 소녀상을 세운 가주한미포럼의 윤석원 대표 외 변호사, 학자, 활동가들이 참여해 차세대와 함께 일본군성노예 문제를 짚어 보았다.

이 컨퍼런스에 연사로 참여하면서, 일본과의 역사갈등을 해결하는데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야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일본과의 역사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분명 통일 코리아의 탄생에도 크나큰 암운이 드리워질 것이기에, 이 문제는 통일운동에도 무척 중대한 사안이라 여긴다. 

▲ 2014년 4월 5일 미서부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가 주최한 “Justice for the Comfort Women” 컨퍼런스에서 발제하고 있는 나. 왼쪽부터 앤 박 검사, 신혜원 변호사,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교수, 정연진 바른역사정의연대 대표. [사진제공 - 심흥근 재외기자]

▲ 미하원 외교위원장, 일본계 활동가가 기조연사로 참석한 이번 컨퍼런스에 동포사회가 높은 관심을 보였다 200여명이 참석했고 미주한인언론사들의 열띤 취재가 이어졌다. [사진제공 - 심흥근 재외기자]

내가 관여했던 활동은 미국 법정에서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다개국 징용피해 소송,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 대만, 중국, 필리핀 성노예 피해자들을 위한 집단소송 관련 활동(1999-2006년),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시도했을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세계 인터넷서명운동 (2005년), 그리고 남북을 포함한 10개국 민간단체 네트워크인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 활동(2003-2008년) 등이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과 경험을 바탕으로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과의 역사갈등을 해결할 길이 없을지, 오랜 기간 고민해왔다.

25년째를 맞이하는 일본군성노예 문제의 현주소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본과의 역사 갈등은 더욱 골이 깊어지면서 동북아의 평화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 과거 20여년간 일제강점기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활동가와 관련단체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해 왔고, 여러 면에서 성과를 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보상’의 길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김학순 피해자가 “내가 바로 ‘위안부’였다. 일본은 거짓말을 멈추어라!” 하고 한 맺힌 절규를 터뜨린 것이 1991년, 올해로 일본군성노예(‘위안부’) 문제가 세상 밖으로 불거지고 사회운동으로 전개된 지 25년째를 맞이한다.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서 피해자들과 피해자단체들의 수요시위는 2011년에 1,000회를 돌파해서 세계 최장 시위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매주 그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 2000년 워싱턴연방지법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다개국 소송을 제소하던 날, 미 국무부 앞에서 시위에 나선 피해자들. 오른쪽 끝부터 고 황금주 피해자, 고 김순덕 피해자, 고 문필기 피해자. 수 년 전에 모두 고인이 되셨다. 2000. 9. 18 워싱턴DC. [자료사진 - 정연진]

한국의 시위 상황은 네델란드의 경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과거 일본과거사 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에 참여했을 때, 네델란드 피해자단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2차대전 당시 네델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네델란드 사람들도 성노예로 동원되었다. 네델란드의 일본대사관 앞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 일제에 의해 강제노역, 성노예 등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한다.

그러한 시위 때면 주 네델란드 일본대사가 피해자들을 모두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정중하게 차를 대접하면서, “당신들의 요구사항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도 본국정부의 지시를 따라야하는 외교관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유감이지만, 이해해 달라”면서 피해자들의 양해를 구한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가해국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우는 받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외치며 일본대사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기네스북에 세계 최장의 시위라고 기록되는 성과는 있을망정, 일본대사의 정중한 대우는 고사하고, 단 한번이라도 일본대사관의 문이 열린 적이 있었던가?

수요시위 때면 일본대사관의 문은 항상 굳게 닫혀있고 시위대가 무슨 불상사라도 저지를까, 한국의 각종 시위에 매번 동원되는 대한민국 경찰들. 그들이 오히려 일본대사관을 철통같이 지켜주고 있는 꼴이다. 한국의 피해자들은 일본 당국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우도 못 받고 있는 이 통탄스러운 현실. 고령인 피해자들이 야외에서 굳은 날씨 시위에 나서다 갑자기 병을 얻어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뜰 수도 있지 않을런 지, 지켜보는 마음은 항상 조마조마 하다.

일본을 성토, 규탄하는 것 만으로는 해결책을 얻을 수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딱한 상황이 반복되어야 하나. 연로한 피해자들의 사망률은 해마다 높아만 간다. 과거 234명으로 집계되었던 피해자들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세상을 뜨고 있다. 2014년 1월 현재 55명의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일본은 피해자들이 모두 돌아가시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라는 자조적인 푸념도 들린다. 앞으로 10년 후면, 아마도 모두 고인이 되어 있지나 않을런 지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고인이 된 피해자들이 동상으로 서있다. 왼쪽 첫 번째 ‘위안부’ 제도를 최초로 증언한 고 김학순 피해자, 가운데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남긴 고 김순덕 피해자. 2012년 3월. [사진 - 정연진]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일본의 태도를 성토하고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세계 도처에서 과거 20여년 간 그렇게 해왔으나 과연 일본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었던가. 어떻게 하면 역사 갈등을 극복하고 화해의 시발점을 만들어 갈 수 있는가, ‘갈등 해결’의 시각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접근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일본군성노예 문제는 반일 이슈가 아니다. 반일의 시각으로만 접근하면 실패한다. 한국인이어서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일본인이어서 이를 반대하거나 왜곡하는, 다시 말해, ‘한국 대 일본’의 대결구도로는 한 발짝의 진전도 이룰 수가 없다. 국가를 뛰어넘어 인간존엄성을 훼손한, 반인륜범죄로 보는 시각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에 전쟁이 있을 때는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폭력이 있었으나, 국가가 관여하여 성노예를 제도화한 시스템을 운영한 예는 일찌기 없었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이 끔찍한 반인륜범죄에 대해 다시는 이러한 인권유린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고한 원칙 과 인류보편적 가치의 잣대로 세계인의 공감대를 얻어야한다.

▲ 글렌데일 소녀상이 세워지던날 글렌데일 도서관에서 일본군성노예 제도 관련 전시물을 보고 있는 미국인들.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는 잣대가 중요하다. [사진 - 정연진]

대개가 우리는 일제식민통치를 겪은 피해심리 때문에 피해국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피해자는 절대선, 가해자는 절대악’이라는 이분법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류보편적인 잣대를 가지자는 말은, 세계 인류사적 시각으로 보자는 말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어떻게 하면 좀 더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일본을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양민학살과 베트남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과 성적 착취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배상한다면,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지 않을까.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인, 군속들이 뿌리고 온 전쟁고아들이 2만에서 5만을 헤아린다는 보도가 있었다. 민간인 대상 전쟁범죄에서 한국이 피해국이 아닌 가해국이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세계인들이 만약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한국이 사과해야 일본의 성노예 범죄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다”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국가적 사과와 배상안이 대한민국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한-일간의 시각을 벗어나,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찌독일의 예와 일본의 예,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우리는 흔히 “독일은 과거의 전쟁범죄를 사죄하고 끊임없이 반성했는데, 일본은 왜 그렇지 못한가”라고 개탄한다. 그러나 나찌독일의 예와 일본의 태도를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독일은 엄연히 나찌라는 자국 역사의 어두운 챕터를 청산하고 끊임없이 반성해오고 있으나, 일본의 전후 역사 전개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킨 세력이 오늘날까지 전후 집권층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나라, 역사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 일본을 나찌가 청산된 독일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자국의 역사청산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국제무대에서의 역사청산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 아시아의 피해자들은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에서 했던 것과 같이, 일본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무릎끓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사과와 배상이 이루어지길 원하고 있다.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2차대전후 전후 전쟁범죄 처리에서 독일의 만행은 뉴른베르그 전범재판을 통해 엄중히 단죄되고 처벌되었지만 일본 국왕과 전쟁범죄 세력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지 않고 극소수 몇 명만 대충 벌을 받고 넘어갔다. 이러한 역사의 이면에는 2차대전 후 승전국 미국의 패전국 일본에 대한 사후처리가 독일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는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재미한인사회에서도 한국의 정신대문제협의회가 만들어지던 거의 같은 시기, 1990년대 초반에 풀뿌리 시민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단체들의 노력이 축적되어 2007년에는 풀뿌리 시민들의 힘으로 미하원 결의안 HR121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정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사죄하라”는 결의안을 미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는 마이크 혼다와 같은 용감하고 진정성 있는 일본계 의원과 미주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에 의해 얻어진 값진 결과였다. 그것도 미하원 435 의석 중에 단 한명의 한국계 의원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미주한인 이민사에 남을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쾌거였다.

▲ 2007년 7월 30일 미하원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마이크 혼다 의원이 한국의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혼다 의원은 일본계 4세이나 진정성과 용기로 지금까지도 미주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사진 - 정연진]

그러나 아직 미정계는 미국의 책임까지는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연방의원들이 나서게 된 것은 미국의 책임을 인정해서라기 보다는 일본의 전쟁범죄가 청산되기 바라는 세계사적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2007년 하원결의안은 앞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미국 정치인들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덮어준 자국의 책임에 대해 ‘결자해지’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하원 결의안이 통과하던 2007년 7월 하원에서 결의안이 상정되느냐 마느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던 톰 랜토스 하원 외교위원장. 그 당시 연방의회에서 유일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그는 하원 연설에서 “한 나라의 진정한 힘은 자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페이지를 직시할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말해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자국 역사의 어두운 페이지를 직시할 수 있는 힘, 이제 그 힘을 일본정부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도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일본이란 나라는 어떻게 성노예 제도가 가능했던 것일까

일본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잔학무도한 성노예 제도를 만들고 유지하고, 지금까지도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안하는 것일까, 못하는 것일까. 일본에 대한 역사, 문화적 이해를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망발을 할 때마다 흥분하고 성토만 해왔지, 일본이란 이웃나라의 문화나 역사가 도대체 어떠하길래 인류역사에 유래가 없는 ‘위안부’제도가 가능했었는지 진지하게 연구해보려고 했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자.

(다음 주에 계속)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