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우크라이나 크림자치공화국과의 합병조약 비준안에 최종 서명함으로써 우크라이나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앞서 크림자치공화국은 주민투표에서 96%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러시아 귀속을 희망했습니다. 전쟁 등 물리적 강제력 없이 국가의 일부가 다른 국가에 귀속된 전례가 드문 일을 목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도 러시아 귀속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크림반도를 상실했고, 정작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미국입니다. 이번주 ‘친절한 통일씨’는 이른바 ‘우크라이나 사태’를 짚어봅니다.

<우크라이나 개황>

건국 : 1991년 8월 24일
면적 : 603,550㎢
인구 : 44,573,205명
GDP : 3,971달러 (2012년)
민족 : 우크라이나인 77.8%, 러시아인 17.3%, 기타 4.9%
언어 : 법적 공용어인 우크라이나어 67.5%, 실제 공식어인 러시아어 29.6%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경>

◯ 흐루쇼프의 ‘크림’ 선물

구 소련 스탈린 집권시기인 1932~1933년 집단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홀로도모르, Holodomor)으로 8백만여 명 이상이 아사했다. 소련 당국은 아사한 우크라이나인을 대신해서 러시아인을 우크라이나로 이주시켰다.

스탈린에 이어 권력을 쥔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모스크바 차르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은 1954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선물했다. 정확하게는 크림반도를 포함해 드네프르 강 동쪽 영토로 지금의 동부지역이다. 당시는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아니었고 소련이 해체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우크라이나 독립과 ‘부다페스트 양해각서’

1991년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의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의 최고 소비에트는 구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12월 1일 크라프추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투표를 통하여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4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귀속시켰던 크림 반도도 우크라이나에 속하게 돼, 우크라이나 내부의 크림자치공화국이 됐다. 친러 성향의 우크라이나 정부와 크림자치공화국은 세바스토폴 등 크림반도의 해군기지를 러시아 흑해함대에 조차해줬다. 부동항이 없는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이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거점이며, 2042년까지 사용권을 보유한 상태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독립하면서 구 소련 시기 보유한 군사 시설과 장비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특히 176기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1,800여 개의 핵탄두는 1994년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와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맺어 폐기하고, 대신 주권과 안보 그리고 영토를 보장받았다. 당시 러시아는 혼란 상태로 무기력했고, 우크라이나 핵무기 폐기의 주역은 사실상 미국이었다.

◯ 내부 지역갈등

▲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득표율. 동부와 서부의 정치성향이 뚜렷이 갈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를 포함한 서부는 주로 우크라이나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친서방(EU) 성향이 강하다. 산업은 주로 농업이다. 이에 반해 크림자치공화국을 포함한 동부는 러시아인이 상대적으로 많고 친러시아 경향이 강하다. 주요 공업지대가 여기에 몰려있다. 이 같은 동서지역 간 이질감은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의 배경이 된다.

<우크라이나 사태>

1991년 구 소련에서 독립이후 친러시아계 동부 출신 대통령이 집권해오다 2004년 대선에서 동부 출신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다. 서부인들의 시위로 이른바 ‘오렌지 혁명’을 통해 서부 출신 빅토르 유센코가 대통령이 된다. ‘오렌지 혁명’의 배후에는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들이 있다.

그러나 유센코 치하 10년간 지속된 경제위기로 국가부도 위기까지 몰리게 되자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한다. 조지아 전쟁의 여파와 유센코 정권의 경제적 무능력으로 2010년 2월 동부 지역 출신의 친 러시아계 빅토르 아뉴코비치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2013년 11월 21일 EU와 협력협정 체결 잠정 중단을 선언하자 서부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항의시위가 촉발돼 유혈시위로 발전했고, 올해 2월 18~20일 1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러시아로 망명해 지원을 요청하고 러시아는 2월 28일부터 군부대를 크림반도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의회는 3월 1일 푸틴 대통령에게 군사력 사용 권한을 부여해 러시아의 군사개입이 본격화 된다. 러시아는 군사개입 명분으로 “크림자치공화국의 주권 확립과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보호”를 들고 있다.

◯ 우크라이나 사태 주요 일지

2013.11.21 우크라이나 정부, EU와 협력협정 체결 잠정 중단 발표
EU와 협정 찬성 시민, 대규모 항의 시위 시작
2013.12.1 야권 시위대, 키예프 시청 점거
2014.1.16 여당이 주도하는 의회, 집회.시위 규제 강화법 통과시키면서 시위 격화
2014.1.28 니콜라이 아자로프 총리 사퇴
2014.2.16 정부, 시위 참가 인사 석방
야권 시위댜, 키예프 시청 등 관공서서 철수
2014.2.18 키예프에서 반정부 시위대와 경찰 간 유혈 충돌로 26명 사망
2014.2.20 야권, 100명 이상 사망 주장
우크라이나 보건부, 2월 18일∼20일 77명 사망 발표
2014.2.21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수도 키예프 떠나 피신
2014.2.22 의회, 야권 지도자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 석방 가결
2014.2.23 의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퇴진과 5월 조기 대선 선언
2014.2.28 러시아군 크리마아 반도 이동
2014.3.1 러시아 의회,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내 군사력 사용권한 부여
러시아군 크리미아 반도 통제권 장악
오바마,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 군사행동 경고
2014.3.6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러시아 합병 의결
2014.3.16 크림자치공화국 국민투표, 러시아 합병 96% 찬성
2014.3.21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크림 합병 비준서 서명

<크림자치공화국 합병과 반발>

크림자치공화국 의회는 3월 6일 러시아 합병을 의결하고 3월 16일 주민투표에서 96% 찬성으로 가결된다. 이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8일 크림공화국과 병합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은 러시아 상.하원 비준을 받아 21일 푸틴 대통령이 최종 서명했다. 이로써 1954년 흐루쇼프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귀속됐던 크림반도는 다시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미국과 EU 등은 러시아의 크림자치공화국 합병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은 15일 러시아 편입 여부를 묻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자치공화국의 주민투표는 무효라는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그러나 결의안은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해 부결됐으며, 중국은 기권하고 13개국이 찬성했다.

미국은 24~25일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러시아를 제외한 G7회의를 개최해 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규탄할 예정이다. 미국과 EU, NATO는 잇따라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경제제재 조치를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EU가 당장 군사행동을 통해 크림반도를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미 2008년 조지아(그루지아) 사태 당시에도 러시아의 남오세티아 무력 점령을 저지하지 못했다. 아프간과 이라크의 수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미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면전을 각오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강력한 경제제재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러시아와 미국의 교역액은 38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EU와의 교역액은 4,620억 달러로 10배가 넘는다. 게다가 EU는 석유.천연가스 등 에너지의 30%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따라서 EU는 러시아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실행하기 어려운 조건에 있다. 중국도 유엔에서 기권표를 던진 데서 알 수 있듯이 서방측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있다.

크림 사태가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주목되는 상황이다. 동부지역인 도네츠크에서는 22일 약 5,000명의 주민들이 크림반도처럼 러시아로의 귀속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자며 시위를 벌였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한반도>

한국 정부는 19일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주권, 영토 보전과 독립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며 “우리 정부는 크림 주민투표와 러시아의 크림 병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러시아의 반대편, 미국의 편에 확실하게 선 것이다.

더구나 한.일 관계에 진전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25일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다시 한 번 미국에 힘을 실어줄 계획이다. 무리한 한.미.일 3자 정상회담 추진 배경에 ‘크림 합병’을 강행한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어쨌든 향후 우리 정부와 러시아와의 관계는 당분간 원만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개최된 한.러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나진~하산 프로젝트’ 등 이른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의 미래도 어두워졌다. 미-러 간 대결구도가 강화되면 ‘통일 대박론’을 내세우며 남북관계 개선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박근혜 정권의 행보에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에 반해 북한과 러시아의 관계는 더욱 밀착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으로 평가된다. 한.미.일 3각 동맹이 강화될수록 북.중.러 3각 동맹이 강화되는 반작용의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러시아 사회과학원의 한반도 프로그램 소장을 맡고 있는 게오르기 톨로라야는 13일 <38노스>에 기고한 ‘크림 위기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이라는 기고문에서 서방의 견제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가 북한이 주장하는 ‘핵 억제력’에 동조하면서 “러시아가 이번 우크라나이 사태를 계기로 6자회담에서 중국과 비슷한 견해로 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러 간 갈등이 격화되고 있어 러시아가 중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북핵 문제에서 중국을 지지해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이럴 경우 6자회담이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 루디거 프랑크 교수는 18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국제사회가 러시아 영향권인 크림 반도에 러시아의 개입을 용인한다면, 중국이 자국 영향권에 있는 북한에 개입했을 때에도 국제사회가 이를 용인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국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자국민과 자국민의 재산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의 교훈으로 북한이 핵무기 폐기에 더욱 소극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요구대로 핵무기를 폐기했지만 ‘핵을 포기하면 안보를 보장해준다’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자국을 방어할 결정적 무력이 없으면 강대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고, 미국이 대신 지켜줄 수는 없다는 냉엄한 국제정치 질서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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