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만에 다시 울려퍼진 ‘대한독립만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 근처 작은 농촌 도시 리들리(Reedley)와 다뉴바(Dinuba). 95주년 3.1절을 맞아 한적한 이 농촌도시에 지난 3월 1일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 등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300여 명의 미주한인들이 몰려들었다.

LA에서 중가주까지는 버스로 왕복 7,8시간되는 만만치 않은 거리. 폭우가 몰려온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이 찾은 곳은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30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해 퍼레이드가 열린 곳이다. 94년만에 선조들이 벌인 독립 퍼레이드를 다시 재현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회장 차만재)와 흥사단, 다뉴바.리들리시, 한국보훈처 등이 공동주관한 이날 행사 명칭은 ‘중가주 3.1절 기념행사: 리들리 기념식, 다뉴바 시가행진’. 1920년 3월 1일 열린 다뉴바 한인들의 시가행진은 세계 최초로 3.1절을 기념한 행사였다.

▲ 1920년 중가주 다뉴바에서 미주한인들이 3.1절 1주년 기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홈페이지]

흥사단, 미주3.1여성동지회, 3.1 USA, 6.25 참전동지회 등 각 단체 회원들, 또 가족들과 함께 개별적으로 참가한 한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긴 대열을 이뤄 시내를 행진했다. 이민선조들이 독립을 알리기 위해 걷던 길을 감격스럽게 따라 걸으며 역사의 발자취를 마음에 새겼다.

행렬에선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로 시작되는 삼일절 노래가 간간히 터져 나오기도 하고. 행진 참여자들은 다뉴바 시내 사거리에 운집해 한국어와 영어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 대한여자애국단과 적십자단 여성 회원들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1920년 당시 모습. [사진출처 -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홈페이지]

 

▲ 대한여자애국단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1920년을 재현한 모습. 2014.3.1. [사진 - 정연진]

 

▲ 대한여자애국단이 대형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1920년을 재현한 모습. 2014.3.1. [사진 - 정연진]


임시정부의 자금줄이 된 미주동포들의 독립운동

한반도에 일제 침략의 사슬이 점점 죄어오던 1903년, 97명의 한국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일자리를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미주한인사회는 이들을 이민선조라 칭한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하와이 노동 계약이 끝나자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토에 입국한 2,011명의 한인과 후손들 중 일부가 다뉴바, 리들리 지역에 정착한다.

▲ LA에서 220마일(350킬로) 떨어진 중가주 리들리 가는 길. 왕복으로 7,8시간이 걸리는, 하루를 온전히 할애해야 하는 거리이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복숭아밭이 보인다. [사진 - 정연진]

중가주의 번창한 농업지대였던 다뉴바에는 당시 인근에 300~400명의 한인들이 대부분 과일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1920년 이들은 인종차별과 싸우며 하루 10시간 노동에 일당 20,30전을 받으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때 월 생활비가 10~15달러에 달했으니, 빠듯한 살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민선조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를 뒷받침한 독립기금의 거의 절반이 미주한인사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주한인역사연구회 차만재 박사에 따르면 상해 임시정부 수립 당시 미주 지역에서 상해로 간 독립자금의 20% 이상이 이 지역에서 모아졌고 ‘왜간장 불매 운동’ 등으로 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던 대한여자애국단이 다뉴바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  리들리에 2010년에 세워진 독립문을 실제 4분의 1크기로 재현한 미니 독립문. 그 앞에는 안창호, 이승만 등 애국지사 10명의 기념비가 옆에 세워져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중심적인 일을 했다. [사진 - 정연진]

리들리와 다뉴바 시에는 현재 거주하는 한인이 10여명 밖에 되지 않지만, 231명의 이민선조들이 잠들어 있다. 이역만리 타향의 뙤약볕 아래 고된 노동을 해서 땀흘려 번 돈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 해방 조국의 흙을 다시 밟아보지 못한 채 이곳에서 눈을 감은 이들의 발자취가 이 끝없이 펼쳐진 복숭아 농장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들 중 김호, 김형만 선생은 복숭아 농장을 일구고 ‘털없는 복숭아’를 개발해 특허까지 확보한다. 사업수완이 뛰어났었는지 이들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어, 큰 부를 축적해 한인이민자 중에 첫 백만장자가 된다. 이 두 사람이 설립한 김형제 상회 (Kim Brothers Company)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되었다.

재미 독립운동의 표상, 김 호 선생의 발자취

▲ 리들리 독립문 앞에 세워진 김호 선생의 기념비. [사진 - 정연진]

김호 선생은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Charles H. Kim)가 한인타운 인근에 있어 남가주 동포들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1914년 미국에 망명온 김호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생업을 뒤로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대한인국민회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가 당시 중앙총회장 안창호 선생을 설득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앞장선다. 선생은 워싱턴주, 오레곤주, 아이다호, 네바다 등 9개주를 순회하며 독립의연동맹회를 결성하는 한편, 1만 달러 이상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한다.

▲ 독립특별의연금 증서.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가 모금한 독립특별의연금. 당시 의연금을 기부한 김장연에게 발행한 증서.(1919년 8월) 중앙에는 일본 경찰이 한국 여성의 팔을 자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하단에 영문으로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치욕스런 역사 대신 영원한 자유를 물려주리라”는 문구가 있다. [사진 출처 - <태평양을 가로지른 무지개 -북미주한인이민역사 총서1>(2006), 크리스천 헤럴드, 67쪽]

김호 선생은 해외한족회의 결성 등 수 많은 독립운동 관련 단체의 결성과 운동에 앞장선다. 해방이 되자 좌우합작 운동을 지원하며 조소앙을 중심으로 한 ‘한국 사회주의 노동자 진보당(Korean Socialist Labor Progressive Party)’을 지원했고, 통일국가 수립에 노력한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그 정부는 합법적인 정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49년 다시 도미해 재미한인의 역사를 정리한 <재미한인 오십년사>를 발간해서 이민역사에도 큰 몫을 담당했다.

김호, 김형순 선생의 기념비를 보니, ‘한반도 중립 통일을 지원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했으나 통일국가를 이르지 못하고 분단되고만 조국의 현실에 독립지사들은 얼마나 좌절하고 낙담했을까. 그러나 이들은 또 다시 통일운동에도 힘을 보탠다. 미주지역의 통일운동에도 이민선조 때부터 이루어진 기나긴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단절된 역사를 다시 하나로 이어나갈 책임이 이민 후손들에게 있지 않을까.

독립운동과 통일운동, 어느 것이 더 힘든 길일까

▲ 1920년 3.1절 행진후 다뉴바한인교회에서 기념촬영을 한 이민선조들. [사진출처 -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홈페이지]

 

▲ 2014년 3월 1일 다뉴바 시내에서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는 캘리포니아 한인들.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에서 나누어주기로 한 태극기가 모자라, 성조기가 태극기보다 더 많이 보이는게 아쉽다. [사진 - 정연진]

LA에서 올라온 지인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태극기를 흔들며 당시 조국을 잃어버린 채 태평양 건너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선조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또 독립운동 선조들이 오늘날의 분단 조국 현실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해본다.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세월이 70년이 다가온다는 기막힌 현실에 독립운동에 몸 바친 선조들은 얼마나 통탄스러워 할 것인가. 해방은 맞이했으나, 허리가 끊긴 한반도에서 우리는 완성되지 못한 광복을 맞았을 뿐이다. 미완의 광복을 완성하는 길, 동강난 한반도의 허리를 하나로 잇지 않는 한, 우리들에게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일 뿐이다.

빼앗긴 나라를 찾는 것과 통일을 이루는 것은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일까.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국내에서 일제의 감시와 혹독한 탄압으로 인해 멀리 해외로, 해외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국내 분들과 마음과 생각을 모아 통일염원을 토로할 수 있으니 오늘날 우리들의 처지가 훨씬 낫다고 하고 싶다. 또 예전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패가망신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통일은 대박'이라 온 국민을 설득하는 마당이니, 통일운동을 하면 ‘3대가 흥한다’고 해도 되려나.

미완의 독립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려, 김호 선생이 남긴 글을 살펴본다.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서 김호 선생 일행이 낭독했다던 선언문을 한번 소리 내어 읽어보자. 완전한 독립, 즉 하나된 코리아를 세계 만방에 선언하게 될 그 날의 감격스러움을 미리 상상해보며, ‘독립 자주의 정당한 권리 행복을 평등 향수하고자 하는 결의’로, 해외와 국내 지구촌 곳곳 나라 안팎 동포들의 ‘분투’를 오늘도 고대한다.

해외한족대회「선언」문

“해외한족대회를 소집함은 대한민족은 일치 협력하여 (중략) 독립 자주의 정당한 권리 행복을 평등 향수코자 하는 민족 자연의 충동과 요구에서 이 시대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을 연구 토의하자 함이니, 대회와 및 대회의원의 사명이 실로 중대하며, 그 임무가 또한 신성 중대함을 우리는 깊이 자각하고 가깝게는 미령동포의 성실한 협조와 지도가 있기를 바라고, 멀리는 전 민족의 뜨거운 편달이 있기를 바라노니, 금일로부터 통일과 조직적 전투로써 최후의 승리를 굳게 맹약하노라.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불원 장래에 다시 세계에 선언하고 위대한 민족의 장래를 자유와 행복으로써 광휘 있게 개척하고 건설하자. 3천만 민중의 건전한 분투를 기대하며 이에 선언하노라.”

1941년 4월 20일 해외한족대회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의장 안원규와 김호를 비롯한 대회 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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