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오는 1월 18일은 늦봄 문익환목사 서거 20주기가 되는 날이다. 늦봄이 세상을 떠난지 벌써 20년,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적지 않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늦봄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난 문 목사님 얘기는 가급적 피하려고 해요. (…)목사님 얘기를 한 번씩 쏟아놓고 나면 몸이 아주 엉망이 되어서 보름씩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목사님 없는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목숨이 독하다고들 말해요.”(이소선 여사, 2009년)

격변의 2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마음속에 이토록 그에 대한 그리움이 사그라지지 않는 것은, 살면서 그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온갖 구석구석마다 남긴 피할 수 없는 발자취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익환의 공생활은 그가 역사의 간난신고 속에 발을 내디딘 1976년 3.1구국선언에서부터 1994년 1월 18일, 법적으로는 여전히 가석방인 상태로 마석공원에 묻힐 때까지 기껏해야 18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 18년의 세월 동안 그는 여섯 차례, 햇수로 12년을 감옥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는 결국 약 8년, 달수로는 102개월, 날수로는 3,102일만을 감옥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활동했던 것이고, 겨우 100여 달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발자취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여섯 차례에 걸친 투옥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1985),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1989),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준) 위원장(1991), 미국 친우봉사회에 의한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1992년), '통일맞이칠천만겨레모임' 운동 제창(1993년) 등 셀 수 없이 많은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의 이력도 이력이지만, 사람들 마음속의 문익환을 더욱 애틋하게 하는 것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그의 사람됨의 향기였다. 해맑은 순수함과 한결같은 열정, 그리고 결코 좌절하지 않는 치열함을 함께 갖춘 그의 풍모는 그와 접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노동자, 농민, 철거민, 학생 등 민중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싸우고 함께 눈물 흘렸다. 그는 권력과 돈을 가진 그 누구보다 강자였고, 그래서 광오하게도 “사랑은 남아도는 젖처럼 넘치는 생명을 가진 강자에게만 있는 것입니다”라고 포효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그가 가진 생명과 사랑 그 자체만을 사용해서 보통의 사람들이 “끝없이 돌진하고자 하는 부와 명예, 기타 성취의 영광들을 모두 합해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버린”(김형수 『문익환평전』) ‘우리 시대 최고의 강자’였던 것이다.

문익환 통일사상

문익환 통일사상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민(民) 주도의 통일론’이다. 이 민 주도 통일론은 문익환 통일사상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며, 민족의 부활은 민중의 자각과 해방을 향한 노력, 즉 ‘민중의 부활’ 없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통일은 부활한 한겨레입니다. 그러나 민중의 부활이 없는 겨레의 부활은 없습니다. 민주 없이는 통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민주가 민중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그는 “통일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민주과업이라면, 그것을 이루어 가는 절차도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통일도 다른 모든 일과 같이 민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의 결론은 ‘통일은 곧 민주’이고 ‘민주는 민 주도’이므로 ‘통일 역시 민 주도’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 주도 통일사상에 근거하여 그는 민의 통일운동은 기본적으로 “남북한 당국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북쪽과 해외가 남한 정부를 비난, 공격할 때, 우리도 덩달아 하게 되면 한쪽으로 기울게 됩니다”라며 중립성의 원칙을 강조하는 한편, 남의 민이 북의 민을 강화하는 것에도 절제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문익환의 민 주도 통일론은 오늘날 남측 시민사회가 스스로를 통일과정에서 남북 양 당국과 별개의 제3당사자임을 자임하는 ‘제3당사자론’(백낙청) 혹은 ‘시민참여 통일론’으로 연결되고 있다.

문익환 통일사상의 또 다른 한 축은 통일은 공존의 원칙과 점차성이라는 방도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보는 ‘과정으로서의 통일론’이었다. 그는 1989년 방북 당시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남과 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감이 깊을 대로 깊어졌기 때문에 연방제 통일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과 함께, 북이 주장하는 외교․군사권을 통합한 연방제 통일방안으로는 통일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늦봄의 이 말에 김일성은 “좋습니다. (연방제는)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협상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흔쾌히 합의하였다고 한다.

‘공존’이라는 통일의 원칙과 점진적 추진이라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에 대한 이 역사적 합의는 바로 그 6.15공동선언의 제2항 “남과 북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합의의 전사(前史)가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늦봄이 89년 방북과 그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후 가장 힘을 기울였던 생애 마지막 운동은 ‘7천만겨레 통일맞이’ 운동이었다. 이 ‘통일맞이’ 운동은 문익환 통일사상의 완결편이라 할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실천적으로는 그의 서거와 함께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그는 세계적 탈냉전의 도래와 함께 ‘통일을 위한 시급한 준비’의 필요성을 선구적으로 자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민의 통일운동의 자유를 쟁취하는 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정말 통일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통일을 ‘민족을 통합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고 그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고 보았다. 즉 그가 말하는 “통일은 됐어”라는 의미의 통일은 완성이 아니라 통일과정의 시작의 의미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통일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고, 준비 없이 맞이한 해방이 분단으로 귀결되었듯이 준비 없는 통일은 심각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래서 문익환은 그 생애의 마지막 옥살이에서 풀려나자마자 ‘통일맞이 7천만겨레운동’을 제창했던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보수 통일담론의 대두와 문익환 통일사상

문익환 통일사상의 생명력은 근래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통일대박론’과 비교해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1월 6일 박근혜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면서 “내년이면 분단된 지 70년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통일 시대를 열어야만 한다”며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 통일대박론은 박근혜정부가 장성택 숙청사건을 계기로 김정은체제의 붕괴 같은 북한 급변사태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통일’의 담론화에 나선 것이라 할 수 있다. 급변사태론을 다시 들고 나온 것도 그렇지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북정책으로 내세우는 박근혜정부가 신년 벽두에 난데없이 북한과의 불신만 가중시킬 통일대박론을 들고 나온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박근혜정부의 통일론이 당국 간 대화와 민간교류 없이 북한 급변사태에 따른 남한의 흡수통일 방식으로 이뤄질 경우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쪽박’이 될 수 있다”는(양무진) 지적처럼 통일대박론은 민 주도와 공존의 원칙, 실사구시적 통일준비를 강조한 문익환 통일사상의 견지에서 볼 때 통일로의 전진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박근혜정부의 ‘통일대박론’은 이명박정부에서부터 시작된 통일담론의 보수헤게모니화의 연장이기 때문에, 정책적 평가보다는 오히려 담론경쟁의 차원에서 좀 더 무겁게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판단된다. “한때는 좌파가 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가 북한이 추락하기 시작하자 현상유지식 평화노선으로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다. 일부 우파는 우악스럽게 흡수통일론을 주장해왔지만 적지 않은 우파는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끼리 잘 사는 게 낫다'는 쪽이었다”(주용중, “새 통일운동의 불씨들” <조선일보> 1. 11). 보수진영의 이런 평가는 통일담론의 보수헤게모니화와 함께 보수 통일담론의 현실화, 즉 흡수통일을 원칙으로 그를 위한 ‘실질적 준비’의 강조라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보수 통일담론의 확장은 ‘자주통일’이라는 민족주의적 통일담론의 틀에 묶여 있는 일부 진보 통일운동, 그리고 분단색맹적인 평화 혹은 녹색 근본주의 등과 비교할 때 상당한 담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 통일운동의 또 다른 담론적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늦봄이 통찰한 한반도 통일의 새로운 사상과 경로, ‘시민참여’ ‘공존과 점진성’ ‘실사구시적 통일준비’라는 문익환 통일사상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문익환의 통일사상은 기존의 어떤 사상이나 이론에 경도되지 않고 그 자신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만난 민중의 현실을 바탕으로 반공주의와 분단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성취해낸 한국 통일운동의 사상·실천적 정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의 통일사상은 기존의 민족해방통일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일사상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통일평화운동’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20주기를 맞는 늦봄의 통일사상을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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