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부르주아지는 100년도 채 안 되는 그들의 지배기간에 지나간 모든 세대가 창조한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 공업과 농업에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경작을 위한 전 대륙의 개간, 하천의 운하화, 마치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모든 인구 - 이전의 어느 세기가 이와 같은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음을 예감이라도 했겠는가?"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공산당 선언’(1848년)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종말을 예언했던 공산당 선언이 자본주의의 엄청난 혁신능력을 극찬하기도 했다는 것은 확실히 역설적이다. 전대미문의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과 혁신능력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역설이다. 이처럼 혁신은 자본주의 자체를 상징했고 자본주의와 가장 잘 어울렸던 개념이다. 현대에서도 ‘기술혁신’이나 ‘경영혁신’처럼 실제로 기업에서 거의 독점해서 사용해온 개념이기도 하다.

사회개혁이 아닌 사회혁신?

이런 이유 때문에 기존 진보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에서 혁신은 대체로 자본의 언어로 받아들여졌고, ‘변혁’이나 ‘개혁’만이 진보적 개념으로 활용되었던 것 같다. 물론 약간의 예외는 있다.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는 변혁이나 개혁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지만, 대체로 사회운동 조직 안의 변화를 의미할 때에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피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직혁신이나 사업혁신이라는 용법이 진보운동에서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사회혁신’이라는 개념이 사회적 기업 중심의 시민사회운동에서 자주 언급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사회혁신이라는 개념과 아이디어를 선도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영 파운데이션, 미국의 아쇼카 재단이나 스콜 재단 등 대체로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거나 관련 분야의 일을 세계적 범위에서 활발하게 추진하는 단체들이기도 하다. 더욱이 사회혁신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경제, 사회적 자본, 지역 공동체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과 어울리면서 시민사회운동의 주요 아젠다로 부상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지난 2012년, “사회혁신이야말로 지금의 경제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사회혁신이 단순히 로컬 아젠다가 아니라 국가적 비전이 될 수도 있음을 제안했고 그 이후에도 자주 사회혁신을 강조해왔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회적 기업가들에게 간간히 사용되어 왔던 사회혁신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우리사회의 거시적 구조를 바꾸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얘기인가? 나아가서 앞으로는 사회혁신이라는 개념이 사회 개혁이나 사회변혁을 대체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생활현장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회혁신

정권을 장악하여 권력 구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국지적인 제도적 변화조차 불가능하거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일반적인 사회변혁운동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상의 다양한 사회운동 경험들은 단지 구조개혁을 위한 주체역량을 키우는 과정으로 간주되었고, 종국적으로 이들 역량이 집중되어 중앙권력이 교체되어야 사소한 사회변화도 실제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선거혁명을 통해 정권교체를 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구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개혁 청사진을 제시한 개혁 정당이 국민적 동의를 기반으로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때 비로소 청사진에 따라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사회가 갈수록 복잡 다양해지면서 중앙권력의 교체란 단지 사회변화의 필요조건의 하나일 뿐이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졌다. 또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복잡한 현실사회의 변화를 이끌 계획안을 모두 만들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런 청사진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갈 시민들도 갈수록 적어질 수밖에 없다.

대신에 직장과 주민공동체 등 생활단위로부터 시민들의 작은 모임들이 복합적으로 중층적 구조를 형성하고, 자기 공간에서 새로운 삶의 실험을 경험하는 가운데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나가는 다양한 모습들이 최근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들은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에 머물지 않는다. 동시에 지역과 생활현장에서 실제 ‘일을 만들고’, 문제를 ‘풀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을 실행한다.

마을에서의 공동체운동, 협동조합운동, 서민금융운동, 지역 참여예산활동 등이 그런 사례들일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을 사회혁신운동이라고 부른다. 『Small Change』의 저자 마이클 에드워드는 사회혁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회혁신은 사회적 환경적인 문제에 대한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을 찾는 과정으로, 이런 거대한 우산 아래 다양한 운동을 모두 포괄한다. 하지만 모든 사회혁신이 기업과 시장에서 유래한 것은 아니다. 뉴딜 정책이나 시민권, 여성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사회운동처럼, 정부와 시민사회에서 유래한 혁신도 많다.”

사회혁신이라는 ‘큰 우산’ 아래 지방선거를

사실 사회혁신이 상당한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음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혁신학교의 경험이 그것이다. 혁신학교는 ‘입시위주의 경쟁교육’이라는 거시적 차원의 핵심문제에 대해서, (대학)입시의 반경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초등학교)의 한 학교단위(미시적 차원)에서부터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교육감 직선제와 연결되면서 실제로도 거시적 혁신전략으로 전환되었다.

경기교육청 차원에서 혁신학교 지정을 시작한 지 단 3년여 만에 전국의 6천여 개 학교 가운데에서 7% 이상인 450여 개 학교가 혁신학교가 되었다는 것은 사실 지금의 협동조합 확산속도보다 훨씬 빠른 발전이다. 작은 초등학교의 소박한 혁신적 실험이 ‘경기교육청의 참여’와 같은 어떤 주체나 제도, 기회가 접목되면 어떤 정도의 위력을 나타내면서 사회구조변화에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회혁신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내년 6월에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가 치러진다. 기존 정치권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심판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성도 없이 너무 획일적으로 중앙권력 비판만 반복 하거나, 혹은 뻔한 지역개발 공약들에 매달리는 방식이 되면 안 될 것이다. 지역 공동체에서 구체적인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왔던 많은 사람들의 실험이 있다. 이것을 사회혁신이라는 ‘큰 우산’ 아래 모아보고 확대시켜 보면서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사회변화를 모색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두면, ‘혁신’은 여전히 사회전체에서뿐 아니라, 진보 안에서 절실하다는 점이다. 최근 수년 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적 운동이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왔다면,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혁신’의 부족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갈수록 악화되었으므로 객관적 모순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라는 탓을 할 수는 없다. 보수 세력의 억압정도가 예상 범위를 넘어서 충격적이기 때문에 진보가 와해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진보 자체의 혁신 결핍에서 문제를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보와는 거리가 멀었던 전형적인 보수 경제학자인 조시 슘페터는 일찍이 경제학에 ‘혁신’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조직상의 발전은 부단히 옛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여 부단히 내부에서 경제구조를 혁명하는 산업상의 돌연변이-생물학적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면-의 동일한 과정을 예시한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과정(creative destruction)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창조적 파괴, 돌연변이, 혁신은 기상천외한 발명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 즉 생산 요소와 자원들의 기존 결합방식에서부터 나온다. 다만 기존 결합방식을 그냥 수용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결합방식을 부정하고 파괴하여 새로운 결합방식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혁신이 이뤄진다는 것이 슘페터의 혁신 방법론이다. 비록 보수적인 경제학자이지만 혁신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고 있다. 혁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라는 단서 말이다.
 

 
전 <통일뉴스> 기자
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연구센터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저서 : 『리셋 코리아』(공저, 2012),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공저, 2009)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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