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혜경(사할린국립대 파견교수)

 

이 글은 남혜경(사할린국립대 파견교수)님이 조옥주(사할린한인 2세)님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그 네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난 연재글 보기>
1. 사할린 장돌뱅이 ‘따냐’ - 어느 사할린한인 2세의 반생
2. 내 아버지와 어머니
3. 행복과 불행 사이
 

 

우체국에 일자리를 찾다

러시아에서는 임신 8개월째부터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출산육아휴가를 받아 집에서 쉴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첫 아이 구야를 낳은 후, 남편과 살림을 합쳤다. 신혼생활은 남편이 얹혀 살던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시누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좁은 집에 시누이 부부와 아이 4명, 시어머니와 우리 부부, 이렇게 여덟 명이 함께 살았는데, 우리 방은 1인용 침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방이었고, 문도 없이 천으로 칸막이를 한 방이었다. 게다가 식구가 많으니 집안일은 얼마나 많은지.

몇 달을 견디지 못하고 아이를 봐 주면 방 한 칸을 내주겠다는 사람이 있어 그 집으로 옮겼다. 그런데 나는 참 이상하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 보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내 자식들도 어머니와 동생들이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도저히 애 보는 일을 할 수가 없어서 빚을 좀 내서 1만 2천 루블에 텃밭이 딸린 조그마한 땅집(단독 주택)을 한 채 마련했다. 바자르(시장) 옆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 왼쪽에 위치해 있는 곳으로, 최근까지 이 지역은 ‘카레이츠 동네’(한인 마을)라고 불렸다.

남편은 전기기사로 일을 하고 나는 살림을 하면서 바느질일을 했다. 코르사코프의 옛 단골들 주문만 받아도 일이 넘칠 정도였다. 집안살림하면서 텃밭농사도 짓고 돼지까지 2-3마리를 키웠다. 나는 내 것이라면 물건이든 짐승이든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돼지도 매일 ‘곱다, 곱다’하면서 얼마나 잘 먹이고 닦아주고 했던지 집안에서 키우는 것처럼 늘 깨끗하고 털이 반들반들했다. 돼지를 키우는 일도 새끼를 받는 일도, 150~220kg이 되면 잡아서 파는 일도 내가 혼자서 직접 했다.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잡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그래서 내가 키운 돼지는 입에 대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 살림과 텃밭이며 돼지들을 돌보고 아침을 먹고 나면 재봉틀 앞에 앉아 밤늦도록 일을 했다. 워낙 깔끔한 성미라 집은 늘 번들번들했다. 이런 나를 보고 이웃 오바상(‘아줌마’의 일본어)들은 “아이구, 젊은 사람이 어찌 이리도 부지런하누! 돈 벌어서 어디에 다 쓰려고 그리 일만 하나?”라고 했다.

3년간의 육아휴가가 끝나오니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새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소련시대에는 반드시 직장 생활을 해야 했다. 이유 없이 직장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무위도식하는 ‘인민의 적’으로 취급했다. 그래서 직장에 다니지 않고 텃밭에서 키운 작물을 시장에 내다파는 우리 어머니들이 큰소리 한번 못 치고 주눅이 들어 살았던 것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아틀리에에 일자리를 얻었다. 이곳은 하루는 8시~5시까지 일하고, 그 다음날은 저녁 5시~밤 12시까지 일하는 방식이었다. 아틀리에에서 집까지 먼 거리는 아니지만, 저녁 근무 날은 많이 불편했다. 지금처럼 집에 차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한밤중에 아이만 혼자 두고 남편이 마중을 나와야했다. 게다가 집에서 주문을 받아 옷 한 벌을 만들어주면 12~15루블이 들어왔는데, 아틀리에서는 똑같이 일하면서도 내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30%이니 이미 돈맛을 본 나로서는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그래서 2주일 만에 다른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82년 늦여름, 아틀리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오던 중에 우체국 문에 ‘직원을 구한다’는 종이가 써 붙여있는 것을 보았다. 소포자루를 꿰매는 일이었다. 우체국장은 내 ‘노동수첩’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에서 고스란히 8년간을 일해 왔으니 성실성은 믿을 만했던 것이다.

소련시대 노동자들은 말없이 일을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월급날이면 잔뜩 먹을 것을 사서는 잔치처럼 모여서 먹고 마신다. 책임자가 수소문 끝에 집에 찾아가 보면 술에 절어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일이 흔했다. 돈을 계획적으로 쓰지 못하니, 국가에서는 월급도 한꺼번에 주지 않고 2번에 나눠 지급했다. 거기다 도둑질하다 들키는 일도 많고, 이런 사람들은 직장을 자주 옮겨 다니기 마련이고, 개개인의 노동경력이 모두 적혀 있는 ‘노동수첩’을 펼쳐보면 이런 것들이 다 보인다. 그래서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한 직장을 오래 지키면 훈장까지 준다.

우체국 근무는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방식이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에 12시간 일하고 그 이튿날은 쉬었다. 우체국에서 천을 내주면 규격대로 소포자루를 만들고 이를 팔고 소포물을 접수하고 내주는 일을 했다. 당시는 모든 소포를 반드시 우체국에서 파는 소포자루에 넣어서 보내야만 했다. 중앙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우체국이니 물량은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신이 났다. 기본급에 일한만큼 더 얻어 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손이 재빠른 나는 하루에 300개씩 자루를 꿰매 팔았다. 부수입도 짭짤했다. 주민들은 소포자루를 사면 그 안에 물건을 넣고 각자가 실로 자루를 봉해야 했다. 어차피 내 옆에 실과 바늘이 있으니 나는 이런 귀찮은 일을 대신 해 주었다. 그럼 팁처럼 20코페이카(1루블=100코페이카)를 준다. 당시 빵 한 덩어리를 살 수 있는 값이었다. 월급만 해도 300루블 이상이었다. 게다가 남편도 내 이상으로 돈을 벌어왔다. 경제적으로는 풍요했다.

대학 나온 엔지니어들의 월급은 겨우 120루블 정도였고,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그들보다 2배를 더 받았다. 그래서 소련시대는 대학을 나온 인텔리들이 참 가난하게 살았다. 적은 월급만으로 살아야했으니까 늘 살림이 궁색했다. 사무실에서 뭘 훔치겠는가. 종이 밖에 더 있는가? 그런데 종이로 배를 채우겠는가, 옷을 만들어 입겠는가! 사겠다는 사람도 없고 바꾸자는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은 남은 음식이나 재료를 집에 가져올 수 있으니 식비를 줄일 수 있고, 상점,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물건을 빼돌려 팔거나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교환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돈이 필요 없는 세상,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세상이 곧 온다’고. 그리고 ‘소련의 인민들은 가장 행복하게 살고 있다. 소련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어린 우리들은 그런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집에는 늘 돈이 없었고, 맛있는 걸 먹지도 못했고 예쁜 옷이며 신발들은 가질 수가 없었다. 또 어른이 되어서는 돈이 있어도 ‘줄’이 없으면 원하는 것을 구할 수가 없었다.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직원들은 아는 사람들에게만 정보를 흘린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인맥’이 절대 중요하다. 어디든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일이 된다.

러시아 사람들은 지금도 빼돌리고 훔치는 습성이 있다. 상점 주인은 판매원이 훔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월급 액수를 정한다. 국영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년 전쯤인데, 외국인과 식당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커피맛이 너무 옅다고 불평을 했다. 나는 종업원에게 커피를 통째로 가져오게 하고, 직접 한 숟가락을 더 넣었다. 그제서야 커피맛이 난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훔치는지 안다. 매번 한 숟가락씩 커피가루를 빼돌린다. 본인이 집에서 마시기도 하고 모아서 팔기도 한다. 상점에서 사는 것보다 헐값에 파니 당연히 사는 사람이 있다. 요즘도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치즈 한 조각이라도 끊어서 뱃속에 감추고 나와야 맘이 편하단다. ‘빈손으로 나오면 뭔가 크게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우체국에서 10년 이상 근무하면서 아는 사람들이 참 많이 생겼다. 주 중앙도시에 하나 밖에 없는 우체국이니 주민 모두가 내 고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해서 상대방의 수고를 덜어주면 호감을 사고, 때론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 주면 빚진 듯이 고마워하고. 자연스럽게 상부상조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다 보니 ‘수단 좋은 따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소포를 접수하고 내줄 때는 반드시 내용물을 확인하게 되어 있다. 때로는 수상한 물건들을 보내고 받는 경우가 있다. 사할린공장에서 훔친 연어알 통조림 같은 것을 대륙에 사는 친척에게 보내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대륙에서 이리로 보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밍크 공장에서 일하는 친척이 밍크털을 한 조각씩 매일 빼돌려 집으로 가지고 온다. 1년을 이렇게 모아서 한 벌의 조각 밍크코트를 만든다. 그러나 그곳에서 팔면 금방 들통이 날테니 멀리 사할린으로 보내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현지에서 처리 곤란한 것들이 이렇게 우편으로 오고가는데, 이런 정황을 꿰뚫고 있는 게 나다. 당연히 내게도 ‘줄’이 생기게 된다.

러시아인들은 인내심이 강하다. 성질 급한 사람은 러시아인들을 상대할 수 없다. 도둑질도 큰도둑질에서 작은 도둑질까지, 그 방법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가지가지다.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국 사람이 사할린교포들을 속여 먹겠다고? 허-어-, 어림없는 소리. 이런 사람들 속에서 살아나온 우리들인데 무슨 소린가? 우릴 어리숙하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습니다요~.”

타슈켄트에서 날아든 편지

1980년쯤이었던 것 같다. 코르사코프시에 사는 큰언니 집으로 타슈켄트에서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나는 우편국에서 근무하고 남편은 고추 농사를 짓는데, 그곳으로 고춧가루를 보내주면 좀 팔아줄 수 있습니까’라고. 타슈켄트에 사는 큰땅배기(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지칭하는 말) ‘김 따냐’라는 여성이 보낸 것이었다.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약 10년간 고춧가루를 보내고 팔아주고 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고춧가루, 찹쌀, 깨, 콩 이런 것들을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큰땅배기들이 고향에서 가져가 팔았었다. 타슈켄트에서 1년에 10kg짜리 소포 20~30개 이상이 온다. 그럼 내가 코르사코프로 실어가고 어머니는 알뜰하게 주위사람들에게 팔아서 그 돈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우편으로 부쳐준다. 우리가 이문을 남기지 않는 대신 우리 식구들이 먹을 것을 챙겨줬다.

고춧가루와 함께 오는 편지 속에는 늘 ‘한번 놀러오라’고 써 있었다. ‘어머니 모시고 한번 가야지, 가야지’하다가 그만 갑자기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다음해 딸을 데리고 친구 춘희와 함께 갔다. 한 달 동안을 그 집에서 묵으면서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는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따냐 부부는 “당신들 덕분에 우리가 아이 4명을 다 대학공부시킬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라면서 수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돌아온 후 곧 우즈베키스탄이 시끄러워졌다. 소련이 무너진 후 그녀도 우체국에서 쫓겨났고, 고련이 농장도 없어져서 농사도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자식들은 살길을 찾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92년부터는 고춧가루도 편지도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지금 따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장미 모종을 구하러 ‘리가’로 날아가다

1983년 4월, 어머니에게 집을 맡기고 나는 ‘라트비아’로 향했다. 5천 루블을 뱃속에 감추고 모스크바를 거쳐 ‘리가’로 장미 모종을 사러 나선 것이다. 그 당시 5천 루블이면 ‘지구리’나 ‘모스크비치’(러시아산 자가용차)를 살 만한 큰 돈이다. 이만한 돈을 들고 젊은 여자 혼자서 생판 모르는 곳을 찾아간다는 건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70년대 후반부터 사할린 한인들 중에 장미나 튤립을 재배해서 시장에 내다파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여덟 집, 코르사코프에 두 집 정도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게 돈을 끄는 장사라고 했다. 물론 돈 욕심이 많은 내가 탐을 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가 어디서 모종을 사고 어떻게 키우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쉬쉬해서 말이다. 우체국에서 일을 하니 장미모종이 라트비아에서 소포로 부쳐져 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한다고 생각하다가 하루는 궁리 끝에 소포의 주소를 몰래 훔쳐 적었다. 그리고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류다씨, 나는 사할린에 사는 따치야나라는 사람입니다. 당신에게서 장미 모종을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자기집에서 숙식이 가능하니 오라는 답장이 왔다. 그리고 나는 ‘리가’로 향했던 것이다.

공항에 내리니 붉은 장미 다발을 들고 내게로 다가오는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나를 차로 모셔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먹이고 재우면서 재배법을 가르쳐주었다.

▲ 코르사코프거리에서 꽃을 파는 조옥주씨(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제공 - 남혜경]

큰 장미 모종이 한 개 3루블이었는데 천개를 샀다. 일주일 예정으로 가긴 했는데, 이틀 만에 숙제를 다 마치고 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구경이나 하며 지내라는데 빨리 심어보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표를 바꿔서 3일 만에 그 집을 나섰다. 박스 두 개에 500개씩 모종을 나눠들고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에 내렸다. 내 집으로 갈까 하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그 길로 코르사코프 어머니댁으로 달렸다. 내가 내 준 숙제를 하러 모여 있던 형제들이 나를 보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직도 시간이 있다며 쉬엄쉬엄 모종 심을 땅을 다 일구고 있는데 내가 들이닥친 것이다.

차를 한잔 마시며 숨을 고르고는 형제들을 끌고 당장에 마당으로 나갔다. 3일 동안 쉬지 않고 땅을 일구어 모종 천개를 다 심었다. 그리고 딱 1주일이 되는 날 우리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빈손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모종은 어떡하고 빈손이냐?”하면서 놀라셨다. “마마, 벌써 코르사코프에 가서 모종 천개 다 심어놓고 오는 길이라우.” 하니 어머니는 “차~암, 내 딸이지만 정말 자랑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더 바빠졌다. 하루는 우체국에서 일하고 하루는 코르사코프에서 꽃장사를 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집을 아침 7시에 나와 저녁 8시가 되면 우편국에서 일을 마치고, 우체국 바로 옆 역광장에서 8시 5분 코르사코프행 막차를 탄다. 코르사코프에 도착하면 저녁을 한 술 뜨고는 곧 어머니, 언니와 둘러앉아 장미 잎을 따고 가시를 쳐내는 일을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종일 거리에 서서 꽃을 팔고 어머니댁에서 자고 그 다음날 우체국으로 곧장 출근한다. 한겨울을 빼고는 대부분 이렇게 살았다. 어머니와 남동생은 꽃을 키우고 언니와 나는 손질해서 팔고. 물론 직장일을 하면서다.

장미는 키우기가 참 힘든 품종이니만큼 값도 비쌌다. 빵 한 덩어리에 26카페이카인데, 장미꽃 한 송이 값이 5루블이었다. 장미꽃 한다발이면 교사 한 달 월급이다. 벌이는 소문대로 정말 좋았다. 어머니는 “내 평생 이런 돈을 만지는 날이 올 줄은 꿈도 못 꿔봤다!”며 감격해 하셨다. 우리 자매들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비싼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살 수 있었고 남동생은 차를 샀다.

돈 버는 재미에 고단한 줄도 모르고 우체국과 코르사코프로 뛰어다녔다. 물론 바느질일도 쉬지 않았다. 우리 부부 월급도 상당한 액수였는데 꽃장사에 바느질에... 돈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나는 남부러울 것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제는 평생 돈 걱정 않고 살겠다’며 미소짓곤 했다.

[필자 소개]
남혜경. 1964년생.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졸업.
오오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교육학)
최근 다년 간 구소련지역 한인사회 연구.
2006년 가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파견교수로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에 재직 중.

# <동포소식>은 동포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되도록 가감 없이 전하며, KIN의 의견과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기획 연재]. <동포 소식>은 아래 사이트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KIN 홈페이지 : www.kin.or.kr <동포사회는 지금>
- 페이스북 : www.facebook.com/1999KIN

# 기고문을 게재하고자 할 경우에는, KIN(지구촌동포연대)로 전화 혹은 이메일을 통해 사전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02-706-5880 / kin2333@gmail.com)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