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항하는 듯한 남북관계가 암초에 걸렸다.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나흘 앞둔 지난 21일 북측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 성명을 통해 갑자기 상봉 행사를 연기하고 또한 다음달 2일로 예정돼 있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도 연기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남과 북이 관계개선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다. 사실 개성공단 정상화 과정도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고,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도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산가족은 연기 마지막 순간까지 아직 숙박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측당국은 북측의 연기 발표가 나오자 금강산에 체류 중이던 선발대를 즉시 철수시켰으며 또한 “모든 이산가족과 우리 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반인륜적 행위”라고 북한에 강경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숱한 학습효과가 말해주듯 남북관계는 감정적이거나 강경책으로 풀 것이 아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해야 한다. 그 이유는 북측이 끊임없이 전략적 선택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기정사실화했던 이산가족 상봉을 북측이 연기했다면 필경 전략적 선택이 작용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기에 북측이 밝힌 연기 이유를 먼저 살피는 게 순서이다.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연기한 표면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조평통은 21일 성명에서 최근 남북관계 개선은 남측당국의 ‘원칙론’ 관철 때문이라는 것, 한.미가 전쟁연습과 무력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남측당국이 ‘이석기 사건’을 북측과 연결시키면서 진보민주인사들을 ‘종북’으로 탄압하는 것 등을 들었다. 여기에다 22일에는 <조선중앙통신>의 논평을 통해 “어용 매체들을 통해 감히 우리의 최고 존엄을 비방 중상하는 모략적 악담질을 거리낌 없이 해대고 있다”며 이를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라며 새로 추가했다. 이는 보수언론에 보도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 리설주의 성추문설을 의미한다. 이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이유는 남측 ‘원칙론’의 승리 운운일 것이다. 이는 북측이 23일 <노동신문>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대북 ‘원칙론’이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근본 요인이라며 대남 비난을 계속 이어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신문은 남측당국의 원칙론이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의 변화를 견인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없는 궤변’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사실 남측의 ‘원칙론’은 곧바로 북측의 ‘전략적 선택론’과 충돌하고 있다.

‘원칙있는 남북관계’란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서 핵심 기조이다. 이 ‘원칙론’은 남북의 상호 신뢰에 기초해 정치적 상황과 경제협력ㆍ인도주의 이슈를 분리 대응하되, 북측의 도발에 대해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박근혜 정부는 잠정폐쇄된 개성공단도 이 원칙론으로 정상화를 시켰고 또한 ‘선(先) 이산상봉, 후(後) 금강산 회담’이란 투트랙 접근도 이 원칙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수차 언명해 왔다. 그런데 북측으로서는 개성공단 정상화를 비롯한 최근의 남북관계 개선이 자신의 전략적 선택에 의한 것인데도 남측이 원칙론의 결실이라 하면서 그 과실을 따가니 기분이 영 언짢았을 것이다. 주지하듯 북측은 전략의 나라다. 이는 정세와 시기에 따라 항상 전략적 판단을 한다는 뜻이다. 북측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동시 발전을 원하고 있으나 아무래도 전략적 선택에서 우선순위는 북미관계 발전에 방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북미대화 재개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했는데 최근 정세가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측의 대남 지렛대인 이산가족 상봉이 금강산 관광 재개와 연계도 안 됐을 뿐더러, 설사 남북관계가 일단 개선되더라도 북미대화가 직방으로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6자회담 10돌을 기념해 북측이 중국과 함께 공들여 진행한 반관반민(1.5트랙)에도 미국이나 남측이 별다른 감흥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다가 미국을 방문한 왕이 중국 외교부장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의 회담에서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대화와 6자회담 재개의 전제’라고 했던 그간의 명제가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북측으로서는 북미관계의 진전을 위해 남북대화라는 전략적 선택을 했는데, 이 선택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북미대화 재개의 앞날이 무망(無望)한 상태에서 북측이 남북관계 조정기를 갖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연기라는 전략적 선택으로 선회했을 공산이 크다. 지난 8월 말 북측은 한국계 미국 시민권자 케네스 배 씨의 석방을 통해 내심 북미대화를 바랐으나 여의치 않자 로버트 킹 미국 국무부 북한인권특사의 방북을 불허하지 않았는가. 결국 북미관계 진전 없는 남북관계 개선은 북측으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결정임이 드러났다. 게다가 남북관계 개선 과정에서 남측이 ‘원칙론’을 자화자찬하고 북측은 ‘전략적 선택론’이 엇나가니 북측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했을 법도 하다. 분명한 건 이 같은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북측은 어떤 새로운 전략적 선택을 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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