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조(극동대 교수, 전 통일부 차관)


바람을 타자.
두루미가 월동을 하려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두루미 혼자의 힘으로는 그 높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을 수 없다. 그래서 두루미는 바람이 불기를 기다린다. 그 바람을 타고 산맥을 넘는다.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번영을 향해 나아가려면 국제정세의 흐름을 타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는 멈추면 뒤로 밀린다. 남북관계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 진전이 없다. 비록 느리더라도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야 한다. 대북정책은 지도자가 뚝심을 갖고 일관되게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동북아 정세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중국의 영향력이 시간이 갈수록 두드러지게 증대하고 있다. 미국도 ‘아시아에로의 복귀’를 내세우며 중국의 팽창정책에 대응하고 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협력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김정은 체제가 출범한 다음 체제 안정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대내외 정책을 추구해 왔다. 북한은 당초 예상과 달리 김정은 유일 지도체제의 기반 구축을 무난하게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내부에서도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이 장기화되는데 대한 우려와 함께 새 정부는 이전의 이명박 정부와 다른 차원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공약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68주년 경축사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남북한의 공동발전을 이뤄나갈 것”이며 ‘새로운 남북관계’를 시작하여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열어 나가려는 것임을 천명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이후 통일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개념, 목표, 추진원칙, 추진과제를 정리하여 발표했다. 여기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서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정책”으로 규정했다.

정부의 설명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해 그동안 제기되었던 논란을 해소하기에는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총론만 있고 각론이 없다’, ‘프로세스라고 하면서 단계적 로드맵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수동적이고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등이 그것이다. 앞으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 나가려 한다면 이러한 평가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구체적 행동계획(action program)을 검토해서 마스트 플랜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북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도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남북대화의 재개와 합의 도출을 우리의 ‘원칙적 대북정책’의 성과로 자평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선 남북대화의 재개에 임하는 북한의 전략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왜 대화로 입장을 선회했는가? 남북대화의 과정에서 과거와 달리 우리 측 요구를 수용하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남북대화의 진행에 대한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가의 반응은 어떨 것인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 북핵문제는 어떻게 관리,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반도 문제 해결과정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행사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노력보다 더 힘든 과제가 우리 앞에 가로 놓여있다.

지금 남북 간에는 ‘개성공단 정상화 합의서’에 따라 후속조치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남북공동위원회 구성 운영에 관한 합의서’가 서명 발효되고 이에 따른 첫 회의를 9월 2일 개성에서 갖기로 했다. 아울러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준비도 함께 추진되고 있다. 9월 25일 금강산 상봉행사와 이어지는 화상상봉도 과거의 전례가 축적되어 있는 만큼 준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다만 금강산 관광 재개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은 조기 협의를 요청하고 있으나 우리 측이 이산가족 상봉행사 후에 논의하자고 해서 일정 합의가 미뤄지고 있으나 실무회담 개최 자체에 대해서는 양측이 동의하고 있는 만큼 남북관계 진전에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가 대화국면을 맞이하자 잠잠했던 국제사회도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던 중국의 시진핑 체제는 출범이후 ‘한반도 문제 해결의 3원칙’으로 △한반도의 비핵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유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제시하고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과 한국 양국 지도부에게 협력을 요청한 바 있다. 물론 북한에도 최룡해 특사의 중국방문과 리위안차오(李源潮) 국가 부주석의 평양방문 등을 통해 중국 정부의 입장이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다음은 북미대화이다. 최근 미국을 방문한 중국 창완취안(常萬全) 국방부장은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 만나 “미국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것을 요구”한데 이어 수전 라이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만나서는 “북한 지도부는 3자 또는 4자 회담 형태의 다자회담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는 입장 전달했다고 외신은 전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할 기회와 창구가 생겼으니 미국이 조건을 달아 어렵게 얻은 대화의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요청한 것이다.

한편 지난 8월 30일 미국무부의 로버트 킹 북한인권 특사가 북한에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시민 케네스 배의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은 미국의 전략폭격기 훈련을 문제삼아 킹 특사의 방북 직전 이를 철회했다. 북한 김정은 체제 출범 후 미국 고위관리의 첫 방북이라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으나 미국이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북미대화는 별개라는 입장을 분명히 함에 따라 북한은 킹 특사의 방북으로 얻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실제 이유로 보인다. 물밑대화를 통해 조율이 이뤄지면 조만간 다시 방북이 추진될 것으로 생각된다.

킹 특사의 방북 계획이 공개되던 시점에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수석대표가 평양을 방문했다. 마침 우다웨이가 평양을 방문한 다음 날이 6자회담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2011년에도 우다웨이는 남북대화→ 북미대화→ 6자회담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중재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2012년의 2월 29일 북미합의였다. 물론 이는 김정일 사망과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로 이행되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 길로 갔을 것이다. 6자회담이 정체상태에 빠지면 6자회담의 의장국인 중국은 늘 일련의 양자대화를 통해 6자회담의 재개를 모색했다. 6자회담의 무용론이 있지만 이를 대체할 다른 방안이 없다. 그러나 이번은 과거와 달리 북한이 적극적이다. 남북대화에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북미대화 재개를 위해서도 그러리라 짐작된다. 다른 변수가 작용하지 않는다면 북미대화는 조만간 가시화 될 것이며 2012년 2월 북미합의 수준의 합의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원칙을 관철하려면 유연성을 잃지 않는 정책구사가 절실히 요청된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 점을 유념해야 한다. 남북대화든 북미대화에서든 기존의 선후구도를 병행구도로 바꾸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국면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

나아가 북한만 보지 말고 동북아 전체의 역학구도와 각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남북관계 전환 대책을 강구할 때이다. 이미 주변국가들은 북한의 안정적 변화가 그들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관점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루하루 상황이 바뀌고 있다. 우리의 적극적 대북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전 청와대 통일비서관

전 통일부 정책실장

전 NSC 정책조정실장

전 통일부 차관

전 통일연구원장

현 도산통일연구소장

현 극동대 교양학부 교수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