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혜경(사할린국립대 파견 교수)님이 조옥주(사할린한인 2세)님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그 세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관련글 1] 사할린 장돌뱅이 ‘따냐’ - 어느 사할린한인 2세의 반생
[관련글 2] 내 아버지와 어머니


바늘쟁이가 되다

1970년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창생들과 함께 우루루 하바로브스크로 날아갔다. 양재전문학교에서 재단재봉기술을 배워 바늘쟁이가 되겠다고.

러시아어도 제대로 못하는데다 무국적의 우리들이 바라볼 수 있는 직업은 기술자였다. 남자들은 전기나 건축, 선박 기술을. 여자들은 미용이나 재단재봉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특히 재단재봉사는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서도 인기 직종이었다.

하바로브스크의 양재전문대학은 경쟁률 6.7:1의 최고 인기 대학인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달려간 것이었다. 나는 낙제점수를 받았고, 다른 아이들도 별반 다름이 없었다. 다들 떨어지고 풀이 죽어 돌아왔다.

당시 무국적 상태인 한인 젊은이들을 받아주는 대학은 노보시빌스크와 아르크츠크의 기술대학 정도로 큰 도시의 전문대학은 만약 시험점수가 좋아도 우리는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세상물정도 모르는 순진한 열여섯살 시골 가시네들의 첫 꿈은 이렇게 좌절되었다.

우리는 코르사코프 아뜰리에(양장점)라도 들어가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한인들에겐 이런 고상스러운 일터의 벽은 너무 높았다. ‘쭐’이 없으면 들어가기 힘들었다. 동무들 중에 춘희와 영선이는 부모나 형제들이 ‘빠리빠리’해서 어떻게 자리를 얻었지만, 순옥이와 나는 ‘쭐’을 찾지 못해 뒤쳐졌다. 순옥이는 끝내 이발소로 갔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 바늘쟁이가 되고 싶었다. 궁리 끝에 무작정 아뜰리에를 찾아갔다. “졸업한 지 세 달이 지났는데 아직 일자리를 못 찾았어요. 저는 손재주도 좋고, 성실한데 저를 좀 써 주시면 안될까요?” 하고 사정사정했다. 마침내 출근하라는 대답이 떨어졌다. 그러나 재단재봉 파트도 아니고 수선파트의 견습생 자리였다.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는 곳에 일단 발은 들여놓았다’고 생각하고, 정식직원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나는 감사히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잠시도 손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손재간이 있고, 눈썰미가 좋은 나는 곧 일 잘하는 아이로 지배인 눈에 들었다. 당시는 모든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코트 한 벌을 장만하면 대를 이어 입었다. 오래 입어 낡아 헤지면 처음엔 겉과 속을 뒤집어 다시 입고, 그 다음엔 멀쩡한 부위를 오려내어 손자손녀들에게 코트를 만들어 입히던 시절이다. 나는 아침 8시에 출근해 헌 코트를 손에 잡으면 퇴근시간이 될 쯤 새 코트를 한 벌 만들어 내놓을 정도로 일하는 속도가 빠르고 또 정확했다.

이상하게도 러시아 사람들은 단추 하나도 제대로 못 다는 둔한 민족이다. 일 한지 몇 년이 된 러시아 여자들도 코트 한 벌을 가지고 며칠씩 풀었다 꿰맸다를 거듭하면서 고치고 또 고치고 했다. 나는 한 번 손을 대면 그것으로 완성이다.

나는 맡겨진 일을 번개같이 끝내고는 일부러 재단이나 재봉사 곁에 가서 어슬렁거렸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손이 놀고 있어서요...”하면서. 이렇게 해서 곁눈질로 재단과 재봉 기술도 조금씩 익혀갔다. 7개월만에 수선 견습생에서 재단재봉 파트로 자리를 옮겼는데 여기서 내 인생의 첫 은인을 만났다.

그곳에 기술이 뛰어난 유태인 바늘쟁이 아주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던 재단재봉 기술을 나에게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내가 자기 제자가 될 만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꿈에서도 치수를 재고 계산을 하고 본을 뜨고, 옷감을 자르고 할 정도로 나는 열성적으로 배웠다. 4년간을 그녀 밑에서 일한 결과, 헌 옷이나 고치고 있던 ‘가시네’가 ‘마스쩨르’ 소리를 듣게 됐고, 재단재봉 파트 책임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동네 여자들은 모두 내가 지은 옷을 입고 싶어했다. 드디어 우리 ‘함안 조씨’ 집안에도 ‘쭐’이 생겼다. ‘옥주, 따냐’라는 ‘쭐’이. 나는 먼저 언니들과 동생을 이곳에 취직시켰다. 특히 큰 언니는 바느질 솜씨가 좋았지만 ‘쭐’이 없어서 아뜰리에에 못 들어가고 박스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늘 맘이 아팠다. 이후 내 ‘쭐’은 점점 더 굵어지고 점점 더 여러 곳으로 뻗어갔다. 수완 좋은 옥주로 통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다. “바느질쟁이는 평생 먹고 산다”고. 나는 정말 잘 먹고 잘 살았다. 직장에서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아 옷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집에서...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렸다.

사진쟁이, 시계쟁이(수리공)와 함께 바느질쟁이는 돈 잘버는 최고 직업으로 손꼽았었다. 일이 재미있고 돈 버는 재미까지 있으니 나는 힘들다는 생각은 커녕 신이 나서 페달을 밟았다.

차츰 동생들도 학교를 졸업하고 판매원으로 건축노동자로 일을 하게 되었고, 모두가 번 돈을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가져다 주었다. 어머니는 “내 평생 이런 돈을 마지며 사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도 못 꿨다”하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러는 새 어느덧 나는 스물다섯살 노처녀가 되어 있었다.

결혼과 출산

코르사코프에서 나는 1등 신부감이었다. 오바상(‘아주머니’의 일본어_편집자주)들은 모두가 “옥주한테 장가들면 절대로 굶어 안 죽는다”고 했다. 부지런하지, 깔끄름하지, 알뜰하지, 게다가 바느쟁이가 아닌가! 남자들이 줄을 섰다.

그런데 나는 꼴랑거리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러는 동안 동무들은 모두 내가 지어준 하얀 드레스에 노을(면사포)을 쓰고 시집을 갔다. 동무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어머니는 “안 되겠다. 너도 빨리 남자를 찾아야겠다.”며 초조해 하셨다.

사실 내가 맘에 둔 남자가 있기는 했다. 동창생인데, 인물도 성품도 맘에 들었다. 내 첫사랑이다. “나한테 시집 와 줘. 옥주!” 했는데도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하는 사이에 그만 다른 가시네가 채가고 말았다. 이 아이를 꼬셔서 자고서는 임신을 해 버린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임신만 하면 그 남자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여전하다.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꼭 처녀로 시집가야한다고 생각했을까? 잠을 자주었다면 그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았을까?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눈이 높아 시집도 못 가고 쳐졌다는 소리를 듣고 있던 어느 날, ‘이용대’라는 남자를 소개 받았다. 키도 작고 인물도 없고, 공부도 많이 못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나는 어머니가 정해주는 대로 시집가리라고 맘먹고 있었다. 그래서 누굴 만나면 먼저 어머니께 보고를 했었다.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남자 얼굴 보고 사는 거 아니다. 잘 생긴 남편은 내 남편 아니야. 좀 못난 남자한테 시집가야 맘 편히 산다. 거기다 술 안마시지, 막내니 시집살이 안 할테지. 무엇보다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산다는 게 맘에 든다. 그리 나갈 수 있잖아. 50년 용띠하고 53년 뱀띠면 궁합도 괜찮다. 이리 시집가라”하고 단번에 결론을 내려주었다.

▲ 조옥주씨 결혼 사진. [사진제공 - 남혜경]

어머니는 ‘절대로 옥주만큼은 장남한테 안 보낸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살기 힘든 시절 줄줄이 동생들을 돌봐야하는 장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고생길로 접어드는 것과 다름없었다. 큰딸, 둘째딸이 모두 연애를 걸어 성질 고약한 시어머니까지 달린 장남한테 시집을 갔으니 어머니는 한이 된 것이다. 막내라는 사실이 어머니 맘을 샀다. 드디어 우리는 78년 2월 5일 잔치를 했다.

이용대는 4형제의 막내로 누나 둘, 형님 하나가 있다.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인데 시어머니는 양반집 딸이라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 큰딸과 사위가 살림을 꾸려나가는 집이었다. 시누이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었고, 큰 조카와 남편 이용대는 3살 밖에 차이가 안 나니 아이 5명을 키우듯이 한 것이다.

노동일에 텃밭 농사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니 남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기공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고, 결혼 당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전기야간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말수가 적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남자였다.

남편이 아직 공부 중이었고, 벌이가 좋은 직장을 떠나는 것이 아까워서 잔치를 한 이후에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는 코르사코프에서, 남편은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누이집에서 살면서 오고가는 생활을 했다. 임신 7개월에 들어서면 어차피 일을 쉬어야하고, 그 후로 3년간은 육아 휴가에 들어가니 아이가 생길 때까지는 직장을 그대로 지킬 작정이었다.

결혼 후 곧 임신이 되고, 78년 11월 11일, 아들 구야가 태어났다. 그런데 하늘은 귀한 선물과 함께 내게 크나큰 고통을 주셨다. 아이가 너무 커서 제왕절개 수술을 받다가 수혈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 실수로 간이 나쁜 사람의 피를 받은 것이다. 황달에 걸려 두 달간을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고, 아이에게는 젖 한번 물려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받아 돌보셨다. 나에게 들이닥친 첫 불행이다.

이후 적혈구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암 판정도 받았다. 병원에서는 2급 장애인증을 주면서 평생을 병과 싸우며 살아야한다고 했다. 나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이를 악물고 병과 싸웠다. 좋다는 음식이나 약은 무엇이든 구해먹으며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당시 같은 병실에 누워있던 사람들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의사들은 징징대는 환자들에게 “이 사람을 보라. 한 번도 우는 소리 않고 이렇게 열심히 치료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이 사람한테 배워가!”고 야단을 쳤다.

병원에서 두 번째 내 인생의 은인을 만났다. 평생 내 주치의를 맡아주고 있는 유태인 의사 엘레나 유리에브나. 뻬쩨르부르그로 이사를 간 이후에도 줄곧 전화로 주치의 역할을 계속해 주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녀는 사할린 제일의 외과의사였다. 병원을 가면 “따냐! 이리 좀...”하고 주위를 살피며 손짓을 한다. 방에 들어가면 환자들이 가져다 준 초콜렛이나 맛있는 것이 책상 밑에 숨겨져 있었다. 갈 때마다 한 짐을 챙겨주었다. 잘 먹어야 한다고. 때때로 좋은 붉은 포도주도 있었다. 적혈구가 모자라니까 식사 때마다 한 잔씩 붉은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고,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입원을 시키고 좋은 약도 아끼지 않고 주었다. ‘내가 누구라고...’ 그런데 내가 살아있어 주는 것이 고맙고, 나를 살려놓은 것이 뿌듯했던 것이다. 진짜 의사다.

요즘 소련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소련을 욕하지 못한다. 한국이었다면 벌써 나는 죽었을 것이다. 30년간 병원에 쏟아 부을 돈이 있었겠는가. 해마다 대륙의 공기 좋은 휴양소에서 쉬게 해주고, 치료며 약이며 모두 공짜다. 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비롯해 8번의 대수술도 모두 공짜로 해주었다. 소련이라는 나라한테 이렇게 신세를 져왔는데 어떻게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친구 명순이는 시누이는 평생 국가가 먹여 살리고 있다. 7살 때 그네를 타다가 다리를 다쳤는데, 수술과 재활치료가 필요했다. 사할린에는 이런 시설이 없어 대륙으로 보내졌다. 부모들과 헤어져 살아야했지만, 다리를 고치면서 전문학교까지 그곳에서 마쳤다. 절룩거리기는 하지만 살렸고, 공부도 시켰다. 사할린으로 돌아온 이후도 먹고 살라고 일자리도 찾아주고 아파트도 줬다. 한인이지만 이렇게 국가가 돌봐줬다. 어떻게 사회주의가 전부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죽어가는 사람을 눈앞에 두고 돈부터 가져오라는 한국의 병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필자 소개]
남혜경. 1964년생.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졸업.
오오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교육학)
최근 다년 간 구소련지역 한인사회 연구.
2006년 가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파견교수로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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