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정유미 5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쟈니 클라인과 7월 27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예전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고 조금 더 좋은 시간이었다. 편안하게 좀 쉴 수도 있었고...”

덩치 크고 수더분하게 생긴 미국인 쟈니 클라인(Johnny Kline, 55세). 5년 전 그를 만났을 때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인터뷰를 이어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 정유미 씨가 병마와 싸우다 2009년 7월 26일 세상을 등졌을 때 홀로 남겨진 그의 넓은 어깨가 유독 좁아 보였다.

7.27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일을 맞아 국제평화대회가 한창인 지난달 26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자주통일열사 故 정유미 동지 5주기 추모제’가 열렸고, 그는 고인의 남편으로서 추모객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자작시를 선사했다.

죽음은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그러나 유미는 아직 우리의 영혼속에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는 지난달 27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 과정에서도 “정유미가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 같았고, 정유미의 열정이나 사랑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공감을 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남과 북, 해외가 함께하는 전민특위(미군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전민족 특별위원회) 활동에 온 힘을 쏟아온 정유미 사무총장은 2006년 6.15민족통일대축전 참가차 방한했다가 말기 위암을 선고받고 투병하던 중 2008년 끝내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 만나 서로를 쟈니와 유미로 부르며 인연을 맺은 그들은 유미가 모진 암투병을 진행하던 2007년 10월 눈물겨운 결혼식을 올렸지만 유미를 이 세상에 끝까지 붙들어둘 수는 없었다.

그는 당시 결혼 결정에 대해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이미 결정한 사이였다”며 “내가 청혼을 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 회고했다.

유미가 떠난 뒤 그는 유미와 의논했던 대로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고, 1년 후면 학교를 마칠 예정이다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추후에 공부를 마치고 아예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의 평화와 통일 관련한 기구나 단체를 조직해 일할 생각도 하고 있다”는 그는 유미의 뜻을 이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7.27 정전 60주년 기념행사 등에도 빠짐없이 참석한 그는 “유미만큼 그렇게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은 못한다. 그래서 유미를 대체하려고 감히 시도할 의사는 없다”면서 “사실 내가 특히 한국 관련해서 뭔가를 할 때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기준이 있다면 내안에 있는 그녀의 영혼이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 그때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지난달 27일 오후 6시 서울 시내의 한 호젓한 장소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통역은 정유미 씨와 함께 미국에서 전민특위 활동을 함께했던 김익태 변호사가 맡았다.

"정유미의 열정이나 사랑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공감"

▲ 7월 26일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자주통일열사 故 정유미 동지 5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통일뉴스 : 언제 한국에 들어왔고, 몇 년 만의 방문인가?

■ 쟈니 클라인 : 7월 4일에 들어왔다. 내가 마지막 온 때는 2010년이다. 유미가 죽은 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 올해는 특별히 정유미 5주기 추모행사도 있어서 각별했을 것 같다. 이번 방문 소감은?

■ 올해는 상대적으로 조금 나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예전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고 조금 더 좋은 시간이었다. 편안하게 좀 쉴 수도 있었고, 나라와 문화,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됐다.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유미의 흔적을 여전히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이번 방문이 어떤 점에서 보면 분리나 이별이라기 보다는 재결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제 묘역에 다녀온 것으로 아는데, 이번이 3번째 묘역 방문인가?

■ 몇 번 더 있었다. 첫 번째 왔을 때는 기일에 온 건 아니고, 혼자 묘지에 두 번 정도 갔었다. 그리고 두 번째 왔을 때도 한두 번 왔고, 이번에 또 두 번 갔다.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묘역이 좋다. 미술관도 있고 산도 멋있다.

▲ 쟈니 클라인이 유족을 대표해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자작시를 낭송했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어제 5주기 추모행사가 진행된 것으로 안다.

■ 어제가 떠난 딱 그날인데, 10시에 추모식을 했다. 약 50명 정도가 왔다. 평화대행진단도 왔고, 오종렬 의장, 손미희 대표도 왔고, 한상렬 목사가 감옥에서 시를 써줘서 낭독했다. 북의 전민특위에서도 추모사를 보내와 연대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 많은 이들이 고인을 기억하면서 추모행사를 했는데, 당신이 전한 메시지는?

■ 먼저 나는 유미를 기억하고 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특별하게 몇 분을 거명했다.

내가 유미에 대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정유미라는 사람이 운동세력 내에서 어떻게 통합과 단결을 이뤄냈던가이다. 그런 기억들이 요즘 특별히 많이 생각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내가 시를 하나 썼다. 사람들을 통합시키고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았던 정미의 능력, 그런 기억들에 대한 시를 썼다. 그리고 북과 남을 하나로 끌어모았던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이 정유미를 되살리는 기억들이었다. 많은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으리라 생각하는데 정유미가 그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 같았고, 정유미의 열정이나 사랑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공감을 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이미 결정한 사이였다"

▲ 2008년 7월 장례식장에서 헌시를 바치고 있는 쟈니 클라인. 김익태 변호사가 통역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고인과 만나게 된 계기, 결혼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간략히 소개해달라.

■ 뉴욕이라는 곳이 바쁘고 복잡한 도시고 사람들이 서로 대면하면서 만날 일도 별로 없다. 사실 나도 유미와 인터넷을 통해 만났다. 100개 정도의 프로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정유미를 찍었다.

첫 번째 데이트할 때 서로 긴장했는데, 잘 됐다. 서로 호감이 있었고, 그래서 유미한테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의 가족이 어디 출신이냐.” 그랬더니 “맞춰보라”고. 제대로 맞춰야 될 것 같아 긴장을 많이 해 땀이 뻘뻘 났다.

정유미라는 이름이 일본 이름 같기도 하고, 한국 이름 같기도 했다. 중국 사람은 아니란 것은 이름을 보고 알았다. 얼굴을 자세히 한 번 들여다보니까 한국 얼굴이 있더라. 그래서 맞춰서 안심했다.

내 입장에서는 그 순간에 사랑에 빠졌다. 왜냐하면 그 질문을 통해 그녀를 자세히 뚫어지게 보고 얼굴을 읽은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의 한국의 유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그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됐다.

□ 고인은 당신에게 어떻게 빠졌나?

■ 네 번째 데이트를 하면서 뉴욕 맨하탄 77가를 걷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변변히 손 한번 못 잡아 봤다. 내가 처음으로 물어봤다. “손 한번 잡아봐도 되냐”고. 그랬더니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고, 아주 감당을 못하고 웃더라.

말로는 손잡아도 되느냐고 묻는 게 웃겼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이미 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웃었다고 생각한다. 손도 잡았고, 내 손이 되게 부드럽다는 얘기도 했고, 그게 아마 그녀가 나한테 빠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 이후 같은 영역에서 계속 활동했나?

■ 3년 동안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른 건데, 나는 PICO라는 지역공동체 네트워크사업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잠깐 그 일을 접고 신학대학원에 가서 3년 과정 중 2년을 마치고 1년 후 졸업 예정이다.

□ 신학교에 가게 된 이유나 배경에 고인의 죽음이 연관이 있나?

■ 유미가 살아있을 때 생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의 미래에 대해 같이 의논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유미도 내가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는 것이 괜찮겠다고 동의했다.

그리고 한상렬 목사도 내게 “목사하면 잘 할 거다”라고 많이 적극적으로 권고했고, 어렸을 때 엄마가 목사하라고 한 적이 있다.

□ 결혼식은 고인이 투병 중일 대 한 걸로 아는데, 그 같은 결정에 대해서 감동적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때 심경을 전해달라.

■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이미 결정한 사이였고, 사실 개인적으로는 결혼이라는 의식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내 마음으로는 다 헌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안했다고 해서 그녀를 떠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 “결혼하겠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청혼을 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 행복해 하고. 그래서 그녀가 그렇게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 한국에서 했나?

■ 유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철도회관에서 지인들 다 모아 놓고 결혼했고, 그리고 미국 대사관 가서 실제로 법적으로 혼인신고도 했다.

결혼한다고 할 때 그렇게 사람들 많이 오고 요란하게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개성공단 가는 길도 텅텅 비어있는 것 보고 마음이 아팠다"

▲ 쟈니 클라인은 국제평화대회 참가단의 일원으로 7.27 정전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둘러보고 있는 해외 대표단 모습.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이번 방한은 특별히 7.27 정전 60주년 기념행사와 시기가 겹쳤다. 관련 행사에도 많이 참여한 것으로 아는데, 느낀 점은?

■ 물론 유미 5주기가 제일 중요했지만 나도 특별히 정전 60주년 행사에 참여할 수 있게 돼 뜻 깊었다. 또 특별히 시점이 맞아서 국정원 촛불집회에 수차례 참석했다. 그 다음 노근리 추모행사에도 참석했다.

개인적으로는 작년 대선 결과가 참으로 안타깝다. 오늘 아침 DMZ(비무장지대) 갔다 왔는데, 철도.도로가 이어지다가 끊긴 것을 보니 참 우울했다. 개성공단 가는 길도 텅텅 비어있는 것 보고 마음이 아팠고, 개성공단 가는 길에 근로자들의 식당이 문 닫은 것도 봤다. 그동안 남북 간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건데, 실망스럽고 답답하다.

▲ 7월 27일 서울 대방동 한국여성프라자에서 진행된 국제평화심포지엄에 참석한 쟈니 클라인.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그러나 어제 국제평화심포엄은 너무 좋았다. 미국에서 온 연사, 캐나다,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연사들 아주 좋았다.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아주 분명한 분석,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다시 묶어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굉장히 강한 입장들, 아주 좋았다.

□ 고인의 남편이어서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 일반 미국 시민들은 관심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 한반도의 문제를 미국사회에서 알리고 확산시킬 방법은 무엇이라고 보나?

■ 미국에 작은 조직이 하나 있다. 학자와 평화운동가들로 이루어진 조직인데, 한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조직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

한 가지 방법을 예로 든다면, 이런 조직과 좀더 끈끈하게 연대를 맺어서 상호 발전에 도움을 줘 이런 조직이 커지면, 미국에 한국의 정확한 진실을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다니는 신학교가 시카고에 있는데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시카고대에 있다. 내가 강연해달라고 신학교로 초청을 했다. 강연장에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런 강연 하나로도 한국에 대한 미국인의 입장을 많이 바꿔 놓았다.

또 내가 듣는 과목 중에 기독교윤리가 있는데 교수가 나랑 친하다. 그 교수가 내가 한국문제에 대해 잘 아는 것을 알고서 ‘윤리학적 입장에서 남북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되는가’에 대해서 강의를 하라고 해서 강의했다. 역시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입장이 많이 바뀌었다.

문제는 미국 주류언론과 미국 정부의 대국민 홍보 이런 구조적인 것이다. 이것은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사람들이 진실을 알기 쉽지 않고 잘못된 정보가 항상 전달된다.

거기다가 수많은 회사들이 남북의 갈등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 않나. 무기를 만들고 폭력을 조장하고, 오히려 갈등을 통해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평화보다는 폭력을 통해서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지 않나. 자본의 속성은 결국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 당신도 그 작은 모임에 참여하고 있나?

■ 나는 학자는 아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조사하거나 그런 입장에서 참여하는 것은 아니고 운동가의 입장에서, 활동가의 입장에서 현실에 기반을 두고 참여하고 있다. 학자와 현장활동가들이 항상 연대하면서 활동을 같이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7월 27일 서울 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에 참석한 쟈니 클라인.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부시 정부 이후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자 한국에서는 기대도 많았는데, 북미관계 개선 등이 잘 안 되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고 전망하나?

■ 2008년 오바마가 첫 대선을 치를 때 나도 열렬히 지지하고 응원했다. 미국에서 인종문제가 상당히 중요한데 일단 그 부분에 대한 기대가 컸고, 흑인이 백악관에 있다는 것이 미국 인종갈등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오바마가 실제로 미국 국내정치나 대외관계에서 큰 변화를 줄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미국의 중요한 이슈인 인종관련 부분들에 변화를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미국에서 인종문제가 우선권을 가진 상위 이슈가 실제로 됐다.

그러나 대북관계에 대한 오바마의 정책은 부시와 별다를 바가 없다. 재벌이나 회사의 자본에 의해 포위돼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변화가 미국의 민주적 선거과정을 통해서 대통령을 바꿔낸다고 해서 남북문제의 전환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볼 때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미국에서 이런 대의민주주의가 과연 작동하느냐 회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변화는 역시 현장에서 바닥에서부터 와야 되지 않느냐고 본다.

□ DMZ 방문은 처음인가. 북쪽도 방문할 계획이 있나?

■ DMZ는 처음이다. 북한은 죽기 전에 가보는 것이 목표 순위 중에 항상 상위권에 있다.

"한국에 와서 살면서 평화와 통일 관련 일할 생각도 하고 있다"

▲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고인이 전민특위 활동을 했고, 이 사업은 남북해외가 함께 했던 사업인데, 이 같은 사업을 이어받고 싶은 생각은 없나?

■ 유미만큼 그렇게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은 못한다. 그래서 유미를 대체하려고 감히 시도할 의사는 없다. 그러나 정신이나 영혼, 한국적인 엑기스는 항상 저 안에서 살아있다.(울먹)

사실 내가 특히 한국 관련해서 뭔가를 할 때 잘 하느냐 못 하느냐의 기준이 있다면 내안에 있는 그녀의 영혼이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 그때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와 한국의 통일 이슈는 크게 볼 때 평생할 거다.

□ 5주기를 맞아 방한했는데, 앞으로도 계속 방문하거나 고인을 기념하는 행사를 계속할 건가?

■ 절대적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사실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지, 2년에 한 번씩은 아무리 못 와도 꼭 오려한다.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추후에 공부를 마치고 아예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의 평화와 통일 관련한 기구나 단체를 조직해 일할 생각도 하고 있다. 한국말을 먼저 배워야 하는데, 꼭 배울 거다.

□ 한국이나 고인을 포함한 한국인의 인상은?

■ 내가 볼 때 인류역사상 한국 사람들이 손꼽히는 인자하고 애정어린 문화를 형성했다고 본다. 한국 사람들이 그런 문화를 계속 유산으로 받아왔기 때문에 계속 이어지고 있고 사실 다른 문화권에서 배워야할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 오면 오히려 편하고 내 스스로가 자연스럽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내가 인자함, 사랑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웃는다. 그러나 한국의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의 끈, 인간관계에 대해 여전히 존중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인간관계의 적이라고 보고,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연결보다는 인간의 단절을 통해서 오히려 성공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 같다고 본다. 이런 자본주의 고도화를 통해서 한국의 혼이 미래에 어떻게 망가질까 두렵다.

7년 전에 한국 와서 7년째 한국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데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성장하는 것이 보여 고무적이고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유미한테도 굉장히 중요했던 일이다. 여성 지위와 역할 상승이라는 것은 점점 한국사회에서 실현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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