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명옥(재일조선인 3세)


20년 전 남편과 결혼을 하기로 하고 부모님께 “결혼하고 싶어요. 허락해주세요”라고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는 그때는 정정하시던 외할머니께 여쭤봐야겠다고 하셨다. 이미 여러 번 집에 놀러 와서 본인을 만난 뒤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여쭤봐야겠다”는 것도 “알려드려야겠다” 정도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할머니가 반대를 하셨다.
외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그 당시 우리집안에서 단 한 분 남은 재일 1세 어르신이셨다. 울산에서 태어나시고 처녀시절 일본에 건너오셨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으셨고 평생 동안 힘에 부치는 육체노동만을 골라서 하셨다. 처녀시절에는 맏딸이라서 그러셨고 결혼 한 다음에는 갓난아기까지 세 자식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때문에 ‘남자만큼’ 벌어야만 해서 그러셨다.

우리 함매 손자는 모두 7명이었고 겉으로는 무스마들 아끼시는 척하셨지만 사실은 나를 제일 귀여워해주셨다. 그래서 더욱 서운했다.

▲ [사진제공 - 리명옥]
반대하신 이유는 상대방 고향이 제주도라는 것과 외동아들이라는 것이었다. 고생할 게 뻔한데 우리 손녀딸 뭐가 모자래서 하필이면 그런데로 보내냐고 어머니를 추궁하셨다. 상대방 집안에서도 고향이 ‘육지’인 며느리 후보를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결혼을 했고 20년 동안 ‘제주도’나 ‘육지’나 ‘외동아들’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리 외할머니도 내 남편을 아껴주셨고 내 남편도 외할머니한테 잘 했다. 외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지신 다음에도 멀리 있는 내 형제들보다 내 남편이 더 자주 병문안을 가기도 했었다.

해방 전에 징병을 피해 전라남도 화순에서 일본으로 건너오신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할머니를 만나시고 결혼하셨고 우리 아버지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셨다. 우리 부모님 그러니까 전남 화순이 고향인 총각과 울산이 고향인 처녀가 결혼 할 때에도 주변에서 반대를 해서 난리가 났었다고 들었다. 부모님도 우리 부부도 모두 여태껏 고향에는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지금 그 고향에 사시는 분들이 들으면 이상하다고 느낄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는 나를 충분히 우울하게 만들었던 ‘함매의 제주도 발언’ 사건 당시 아버지가 나와 둘이 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해방 직후 고향에서 편지가 오면 할머니는 어린 아버지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고 한다. 동네 어떤 아주머니 집에 읽어달라고 편지를 들고 찾아가서 내용을 외우고 돌아와 할머니께 전해드렸다. 편지 읽어주시는 아주머니는 한 분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그런데 그 아주머니들은 하나같이 다 제주도 출신이었어. 아무래도 너 시집가서도 책 본다고 욕먹지는 않을 것 같다”라며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시니까 엉뚱하게 웃음이 솟구쳤다.

몇 해 전 아버지가 고열이 나시더니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간 일이 있었다. 다음날에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고, 다른 생각을 전혀 못하실 만큼 당황하면서 집중치료실에 붙어있었던 어머니가 한나절이 지난 뒤에야 겨우 연락을 주셨다.
6시간을 걸려 친정집에 가까운 병원으로 뛰어갔다. 출장 가 있다가 돌아온 남동생도 막 도착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으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짧은 주기로 밀려왔다 가라앉았다 하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가 으깨지지 않을까 겁이 날 정도로 악물기도 하셨다. 그리고 말을 못하셨다. 그 상태가 2주 동안 지속 되었다. 그런데 나와 남동생이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시고 우리들을 보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다음 유럽인들이 몰려와서 선주민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별의별 방법들을 생각해내면서 마구 죽였는데 거기 있었던 선교사가 자세하게 기록을 남겼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와 남동생은 깜짝 놀랐지만 그냥 “네...”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좀 있다가 간호사랑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아버지는 두통과 실어 상태로 바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병실을 지키기로 하고 다른 사람은 있어봐야 병실에 못 들어간다 해서 동생과 같이 그날 첫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나가서 라면집에 들어갔다.

‘아버지 머리 괜찮으실까? 아무래도 그 상황에 그 얘기는 좀 그렇지?’라고 내가 말을 했더니 동생은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아버지답지 않으냐고 말했고 나도 동의했다. 친정집에 가니까 아버지 책상위에 선교사 라스 카사스가 1542년에 쓴 <인디어스의 파괴에 대한 간결한 보고>가 있었다.

‘아, 이거였구나.’ 그 상황에서 이 책이었다는 것에 식민지 때 종주국에서 태어난 2세이신 아버지를 생각해서 뭔가 의미를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통과 실어 상태가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도 오직 나와 남동생이 같이 병실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말씀을 하셨다. 나와 어머니, 동생과 어머니, 어머니와 작은아버지, 그 외 다른 사람들끼리 들어가도 아버지는 계속 상대를 못 알아보셨고 말도 못하셨다. 그래도 다행히 한 달 넘은 입원 끝에 완쾌하셨다.

아버지는 어떨 때 보면 참 특이하신 분이지만 늘 한결같으신 분이다.
‘믿는 일보다 생각하는 일에 익숙해라’, ‘평생 책을 읽으면서 살아라’고 늘 가르쳐주셨고 당신께서도 그렇게 사신다.
나는 덕분에 책을 보면서도 욕먹지 않고 잘 살고 있다.

[필자 소개]
리명옥(李明玉).
재일조선인 3세. 1968년생.
현재 오사카 거주.
삼남매를 초,중,고 조선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직업은 조선어(한국어)와 일본어 프리랜스 번역과 통역.
[번역서] 재일3세 스포츠기자가 쓴『祖国と母国とフットボール』의 한글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2010.6.15 왓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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