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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 조선인학살, 국가차원 진상규명 할 수 있어" 간토 조선인학살 현장조사 다녀온 김종수 목사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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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01  12: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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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수 목사가 '간토 조선인학살 현장 한국조사단' 활동 결과에 대해 지난달 22일 <통일뉴스>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국 진상조사단이 가서 쭉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덕상 교수 같은 경우에는 “아, 이제 나에게도 조국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아서 참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7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의 간토(關東) 조선인학살 현장을 조사하고 온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김종수(50살) 목사는 22일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간토 조선인학살 9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에 새로운 국면이 열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간토 조선인학살은 일제시기인 1923년 9월 1일 발생한 일본 간토(관동) 대지진 당시에 6천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으로 그간 유언비어에 동요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살해했다고만 알려졌지만 실상은 일본 정부와 군의 주도하에 자행된 조선인 집단학살(코리안 제노사이드)임이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다.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등은 ‘간토제노사이드희생자 90주기 추도행사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지난 6월 국회에서 ‘간토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토론회’를 가졌고, 7월초 일본 현지조사에 나섰다.

김종수 목사는 “우선 일본 분들이 한국에서 특히 국회에서 행사를 하면서 국회의원들이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또 적극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말한 것에 굉장히 고무돼 있었다”며 “일본의 현장 활동가들이 지난번에 갔을 때와 달리 굉장히 많은 것을 준비했다”고 전했다.

재일동포로서 1970년대부터 외롭게 이 사건을 연구해온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이 이번 한국 조사단의 활동을 지켜보며 “아, 이제 나에게도 조국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아서 참 마음이 따뜻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이 진전된 것이다.

김종수 목사는 “그동안 책에 나왔던 기록물들을 보면서 현장에 가서, 지금은 변해버린 상황이지만 이 지역에서 이러이러한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내받으며 설명을 들었다”며 “가보지 못한 곳도 많이 안내해줬다”고 전했다.

   
▲ 이번 현장 조사과정에서 새롭게 입수한 사진. 아사쿠사 지역에서 사지가 잘리고 목까지 잘려나간 조선인 사진으로 당시의 잔혹한 조선인 학살을 웅변하고 있다. [사진제공 - 김종수 목사]
특히 “아사쿠사 지역에서 조선인이 사지가 완전히 잘리고 목도 잘려진 사진”도 새로 접할 수 있었다. 이 사진은 이미 다른 책에 실린 사진이지만 그간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사진으로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간토 조선인학살 현장 한국민간조사단 활동보고 (일부)

<7.2 치바지역> 나기노하라

나기노하라(나기 들판)에서는 군에 의해 ‘배급된’ 조선인이 일본민중에 의해 학살된 장소이다. 다까쓰의 한 농민이 남긴 일기로부터 학살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9월 7일에 나라시노 수용소로부터 조선인을 줄 테니 받으러 오라는 말이 있어, 주민들이 15명을 받아 이들을 각 구별로 나누었고, 다까쓰 구는 세 명을 받아오게 되었다. 다음날 8일에 또 두 명을 더 받게 되어, 도합 다섯 명의 머리를 베고 그 사체는 나기노하라에 구덩이를 파서 매장했다. 9일 늦은 밤에 또 한 사람을 받아와 곧 살해해, 지난번과 같은 구덩이에 묻었다.”

<7.3사이미타, 군마지역> 조선인 강대흥 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경계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됐는데, 강대흥 씨는 24살이었다. 우라와 방면에서 이곳으로 도망쳐 와 저기에 있는 벼랑에서 그 아래 고구마 밭으로 뛰어 내렸다가 그 곳에서 자경단에 잡혀서 살해를 당하게 됐다. 잡히자마자 농기구로 다짜고짜 베고 중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이송 도중에 사망하게 됐다. 처음에는 자경단, 민중들이 ‘내가 죽였다’고 앞을 다투어 자랑을 했다. 나중에 경찰이 ‘살인사건’으로 바꾸게 되자 ‘자신은 관련 없다’며 서로 발뺌했다. 결국 대표 다섯 명이 잡혀들어 갔다. 당시 제 할아버지가 자치회의 대표를 맡고 있어서, 정부의 명령에 의해 민중들이 학살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왜 정부는 책임을 지지 않는가, 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냈지만 쉽게는 풀려나지 못했다.”

군마지역 위령의 비

이 추도비에는 “조선인 폭동 소문이 전해져 각지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후지오카시에서도 도쿄, 사이타마 방면으로부터 피해온 17명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적고 있어, 학살의 주체를 명시하는 일은 피하고 있다.

<7.4 도쿄지역> 에이타이 다리 동쪽 끝

군대자료에 의해 증언되고 있는 사실이다. 경찰 세 명과 군인 다섯명이 조선인 32명을 이송하여 히비야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었다. 도중에 조선인 한 명이 도망을 쳤고, 이것을 빌미로 17명이 도망하였다. 도망하는 조선인 전원에 대해 군대가 총을 쏴 죽였고, 나머지 15명의 사람들은 주변에 있던 일반인이 학살하였다. 당시 학살을 묘사한 그림에는 병사, 경찰, 민중이 함께 그려져 있다. 당시 목격 증언에 의하면 목이 없는 시체가 널려져 있었고, 시체 위에는 죽창이 꽂혀져 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 시체가 묶여있는 사진이 있는데 그 상태로 강에 던져지기도 했다.

2006년 안성지역에 탈북 청소년과 저소득계층 청소년을 위한 ‘아힘나 평화학교’를 개교한 김종수 목사는 역사캠프에서 10살 때 간토 조선인학살을 목격했던 야키가야 타에코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면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됐고, 2007년 11월 ‘간토 대진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 시민연대’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고 있다.

그는 “9월 하반기 국회가 열리게 되면 그때 의원들과 더불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며 “학살된 사람들의 구체적 신원이 밝혀진 경우, 누가 어떻게 살해했느냐는 사실확인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밝혔다.

90주년 추도행사는 한일 민간단체들의 주도로 8월 31일 일본 현지에서 개최될 예정이며, 여기에 우리 국회의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8월 22,23일 학술행사를 개최하고, 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한 종교계에서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간토 문제, 식민지 청산 문제를 가지고 한일 간의 평화문제를 고민해나가면 좋겠다”면서 “한국의 시민들도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재외동포의 학살 문제를 통해 지금 일본사회에서 또다시 야기될지 모르는 ‘코리안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위험한 상황을 인식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7월 22일 오후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커피숍에서 김종수 목사와 나눈 인터뷰 내용이다.

“유언비어(풍설)를 사실로 만들어라”

   
▲ 한국민간조사단은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조선인 학살 현장을 찾았다. [사진제공 - 김종수 목사]
□ 통일뉴스 : 이번 일본 방문 개요를 설명해 달라.

■ 김종수 목사 : 7월 2일부터 6일까지 일본을 다녀왔다. 첫날은 치바, 둘째날은 사이타마, 셋째날은 도쿄, 넷째날은 요코하마, 다섯째날은 다시 도쿄로 가서 최종적으로 평가회를 하는 일정으로 다녀왔다.

□ 방문단 구성은 어떻게 돼 있나?

■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에서 저하고 처음부터 진상규명 노력을 해왔던 아힘나학교 조진경 교사, 시민연대 연구원 김강산, 사무국장 김영순, 그리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이해학 목사와 이세우 목사, 에큐메니안 고수봉 기자, 이렇게 7명이 다녀왔다.

□ 네 지역을 방문했는데, 각 지역에서의 주요한 활동은 무엇이었나?

■ 이번에 보려고 했던 것은 첫째, 일본 각 지역에서 어떻게 학살이 이루어졌는지, 각 지역마다 학살 특징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를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조사과정에서 지금까지 나오지 않은 새로운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한국정부가 진상조사를 한다고 하면, 지금까지 연구하면서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자료라든지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는 학살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일본에서 진상조사를 했던 지역활동가들과 연대해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를 협의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를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다녀왔다.

□ 직접 가서 보니까 어땠나?

■ 우선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학살이 먼저 일어났고, 치바 지역은 나중에 일어났다. 그 다음에 사이타마 경우는 지진 피해지역이 아니어서 지진과 상관이 없었는데, 계엄령이 내려지면서 철저하게 자경단에 의해서 조선인 대량학살이 일어난 특징이 있다.

치바 지역의 경우는 9월 5일을 기해 국제적 비난을 면하기 위해서 군대나 경찰에 의한 학살은 전면적으로 금지한다. 그 대신에 “유언비어(풍설)를 사실로 만들어라”는 지령을 내린다. 유언비어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됐기 때문에 계엄령의 불법성을 없애고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유언비어가 사실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떠도는 유언비어를 조선인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했다는 것을 사실화시켜라”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이에 따라 수용돼 있던 조선인들을 그전까지는 군대가 사살하다가 9월 5일부터는 군대가 조선인들을 각 민간 자경단에게 불하한다. 하루에 5명씩, 몇 명씩 불하해서 그날 저녁에 자경단들이 학살한다. 그런 지역적 특색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이 하나 공개됐다. 아사쿠사 지역에서 조선인이 사지가 완전히 잘리고 목도 잘려진 사진이다. 이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예정이다.

□ 이 같은 지역적 특징들은 이전에도 언급된 적이 있나?

■ 그렇다. 그동안 책에 나왔던 기록물들을 보면서 현장에 가서, 지금은 변해버린 상황이지만 이 지역에서 이러이러한 학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내받으며 설명을 들은 거다.

해방이후 독립정부가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못했을까?

   
▲ 한국민간조사단은 현지에서 지역 활동가들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사진은 니시자키 마사오 씨가 도쿄 스미다구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을 목격한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 - 김종수 목사]
□ 지역에서 이 사건을 조사 내지는 연구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는데, 조선인 후세들인가 아니면 일본인들인가?

■ 우선 간토 조선인학살 문제를 연구로서 일본 사회에 알린 것은 70년대 강덕상 교수가 처음이다.

그 이전부터 치바 지역 등 각 지역에서 일본인 교사들, 주로 사회과 교사들이 지역에 대한 역사를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그 지역에서 조선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마을 사람들한테 듣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사 작업에 착수해서 수십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지금까지 계속 그 일을 해온 거다.

그분들에게 축적된 자료가 굉장히 많다. 한국에는 아직 그 자료가 번역돼 나온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단행본으로는 강덕상 교수가 쓴 『학살의 기억』과 야마다 쇼지 박사의 『관동대지진 1923.9.1-조선신학살에 대한 일본 국가와 민중의 책임』이 있다.

자료들을 통해서 많은 진실들이 사실 오래전부터 나와 있었는데 한국 정부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본격적인 진상조사를 하지 못했던 거다.

□ 왜 한국 정부는 본격적인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나?

■ 저희들도 한국 정부한테 묻고 싶은 사실이다. 왜 안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식민지시대였기 때문에 진상조사를 하기에 여러 가지 역부족이 있었다 치더라도 해방이후 독립정부가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왜 못했을까?

문제는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마 대부분 친일적 인사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사건의 진상조사를 착수하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올해가 간토 대진제 90주기이기도 한데, 이번에 다녀온 소감은?

■ 우선 일본 분들이 한국에서 특히 국회에서 행사를 하면서 국회의원들이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또 적극적으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말한 것에 굉장히 고무돼 있었다.

그리고 한국 진상조사단이 가서 쭉 활동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강덕상 교수 같은 경우에는 “아, 이제 나에게도 조국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아서 참 마음이 따뜻해졌다”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동안 왜 한국 정부가, 국가가 이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이렇게 긴 시간이 흘러왔을까 하는 생각에.

우선 일본의 현장 활동가들이 지난번에 갔을 때와 달리 굉장히 많은 것을 준비했다. 제가 가보지 못한 곳도 많이 안내해줬고. 어떻게든 90주년을 맞아서 한국과 일본에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이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결의도 다지는 계기가 됐다.

□ 정치권의 약속이란 게 알다시피 쉽게 실현되는 것은 아닐 텐데.

■ 오늘 두 의원을 만나고 왔는데 유기홍 의원도 임수경 의원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고, 구체적으로 임수경 의원은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차원에서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는 말도 있었다.

유기홍 의원은 국회 차원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발표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8월 광복절 즈음에 이번 조사단이 활동했던 것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어서 그때 기자회견을 하자는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정치인들 쪽에서도 90주년을 맞이해서, 특히 일본의 선거 이후 일본이 극도로 우경화 될 것이 뻔한 이 상황 속에서, 간도문제를 통해서 ‘헌법 9조’가 곧 개악될 것을 조금이라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고 한다면,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뭔가의 계기를 마련해야 되지 않겠나 공감하고 있다.

특별히 현재 일본에서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락하지 않는 시민들의 모임)가 날뛰고 있는 상황은 간토 문제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간토문제를 제대로 청산해 가는가라고 하는 것이 재특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시초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지금 재일동포들이 위축돼 있다. 극심한 차별을 받고 있고, 위협을 당하고 있다. 간토문제를 함께 공감해서 이 문제를 부각시켜낸다면, 이 차별의 근원이 어디로부터 비롯됐는가를 역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는 차원에서 의미를 두고 싶다.

일본 변호사연합회 “국가가 이 학살의 주범이다”

   
▲ 6월 19일 국회에서 간토 조선인학살 진상규명을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들은 특별법 제정 추진을 다짐했다. [사진제공 - 김종수 목사]
□ 일본 현지에서 이번에 특히 정성스럽게 조사단을 맞을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새롭거나 특징적인 것 몇 가지만 소개해 달라.

■ 이번에 새로 발견된 이 사진 같은 경우도 이미 출판된 책에서 나왔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오랫동안 준비하면서 일본 곳곳에 이런 사진들이나 자료들이 이미 다 나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 지역에서 재판기록도 상당수 많이 있다. 그 당시의 재판 내용을 제가 잠깐 재구성해 스케치 한다면, 재판 과정에서는 주로 재판장하고 피고인들하고 농담이 오고갈 정도로 장난스럽게 이 문제를 다뤘다. 그리고 학살자 대부분이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그리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일본인들은 “왜 국가가 조선인을 죽이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죄를 뒤집어 씌우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같은 재판기록들은 지역의 역사책에 기록돼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이미 사법적으로 이 부분을 다뤘었고 아주 우습게 처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국가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으로 전부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 재판 기록에 나타나 있다.

또 하나, 1923년에 일본 중의원 회의에서 나가이 류타로 의원이 “지금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국가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지금 조사 중이다”라고만 대답했다.

다른 하나는, 2003년에 일본 변호사연합회가 재일교포 2세 문무선 의원이 진상조사를 해달라는 요구를 받아서 조사했더니, “국가가 이 학살의 주범이다. 또 군대가 학살했다라고 하는 것이 이미 기존 자료를 통해 다 드러났다. 따라서 일본이 사죄하고 응분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지금도 차별적인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달라”라는 것이 변호사연합회의 권고문이었다.

당시 고이즈미 총리에게 권고문을 보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아무런 대답을 안했다. 일본의 변호사연합회는 진보적 단체가 아니고 대한변협 같은 곳인데, 이들이 객관적으로 조사했더니 그 같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따라서 일본 의회와 사법부에 대해서는 자료를 통해 진실규명을 하는데 있어서 근거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의원들에게 1923년에 ‘진상조사 중’이라고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물을 수 있다. 또 사법부에서는 이런 재판을 했는데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사실관계 확인 소송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곳곳에 이런 학살된 사진들을 통해서 학살된 사람들의 구체적 신원이 밝혀진 경우, 누가 어떻게 살해했느냐는 사실확인을, 국가적 차원에서 진상규명을 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 피학살자 신분이 확인된 명단은 이미 일부 있지만, 연고자나 살해 경위는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지난번 국회 토론회 이후 제보가 들어온 것이 있나?

■ 그 이후에는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학살자 주소가 있는 각 지역 노회를 통해 적극적으로 유족들을 찾아내는 작업들을 교단의 사업으로 끌어안겠다고 약속해줬다.

□ 이후 ‘1923한일재일시민연대’의 주요 추진사업은?

■ 9월 하반기 국회가 열리게 되면 그때 의원들과 더불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 올해 90주기 기념행사는 어떻게 준비되나?

■ 지금은 종교 단위에서 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일본 현지에서 8월 31일 모든 단체들이 모여서 연합 추도행사를 하는 것이 확정됐다. 추도행사에는 한국 의원들 몇 명과 같이 그 행사에 참여해서 한일이 함께 연대해서 진상규명을 해나가자고 격려도 하고 연대 의지도 다지는 그런 프로그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8월 22,23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간토 90주년을 맞아 학술행사가 있는데, 이때도 민간단체 가 해야 할 구체적 작업들을 제가 정리해서 발표할 예정이다.

특별법 제정과 아울러서 두 번째는 무엇보다도 학살희생자들의 유족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지금 간토 지역 특히 요코하마 지역에서 학살의 주체를 명확하게 기록한 중학교 역사 부교재가 2012년에 만들어졌지만 불과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우익의 집중공격을 받고 그 책들을 회수했다.

현재는 두리뭉실하게 ‘유언비어에 의해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고 왜곡된 역사기술이 실려있다. 학살도 개인적인 살해로 돼 있는 이 왜곡된 교과서를 한국과 일본의 민간단체가 함께 공동 역사교과서를 만들자고 제안해놓은 상태다.

한국과 일본의 민간단체가 공동의 역사교재를 만들어서 양심있는 교사들에게 이 교재를 쓰라고 권하는 것이다. 특히 재일동포학교나 조선학교 등 민족교육 현장에서 이 교재로 공부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해서, 아마 9월쯤 되면 뭔가 구체적인 과정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 2009년 아힘나 평화학교 학생들이 세워놓은 추도목비를 들고 2013년 민간조사단의 이해학목사가 진실규명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사진제공 - 김종수 목사]
□ 이번 방일 과정에서 조선인 차별이나 위축에 대해 느낀 것이 있나?

■ 우선 선거 벽보에 ‘혐한(嫌韓) 발언’들이 그대로 찍혀서 마을 구석구석마다 붙여져 있었다. 이것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왜곡된 의식을 보여주는데 굉장히 큰 효과가 있다.

또 우리는 직접 재특회가 연설하는 현장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신문 보도를 통해서 계속 그런 시위나 집회가 일어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조속하게 재일동포 차별의 시정을 요구하는 책임있고 실효성 있는 조처를 외교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김 목사가 이 문제에 관심 갖고 활동한 계기는?

■ 대부분의 일본 지역활동가들이 교사였듯이 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특별히 한일 근대사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 재일동포 청소년들과 함께 역사캠프를 열었다. 캠프를 하면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공동인식 없이는 미래의 동북아평화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역사캠프에서 당시 10살 때 간토 조선인 학살을 목격했던 야키가야 타에코 할머니 증언을 들으면서 단순히 역사교육적인 차원이 아니라 이것은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야키가야 할머니는 올해 1월에 돌아가셨다.

저는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유언비어에 동요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살해했다고만 배웠는데 일본 국가가 조직적으로 학살에 관여하고, 그리고 은폐하고 또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 이것은 한 국민이기도 하지만 종교인으로서도 그냥 단순하게 교육적 차원으로 넘어갈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한국 정부가 한 번도 진상조사를 안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이 부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2007년부터 조직을 만들면서, ‘간토 대진제 조선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한일재일 시민연대’를 만들게 됐다. 그때가 2007년 11월이었다.

그래서 그분들과 같이 한국과 일본을 오고가면서 심포지엄을 열고 학살현장을 아이들과 더불어서 ‘스터디 투어’를 하고,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찾아가고 국회의원도 만나고 특별법 제정에 대한 호소도 하고 하는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이르게 된 거다.

그러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법적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특별법 제정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따라서 이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의원과 계속 준비하던 차에 90주년을 맞이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된 거다.

처음 출발은 아이들하고 교육을 통해서 하게 됐고, 문제가 점점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게 되면서 결국 국가가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깨달음까지 진전하게 된 거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학자가 없었다. 물론 단편적으로 소논문을 발표한 것은 있었지만 그것도 재일동포 역사를 다루면서 짧게 언급된 논문들 뿐이다. 제 아들이 간토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 아힘나학교 학생들도 같이 다니던데, 2007년부터 함께 했으면 오래된 학생들도 있겠다.

■ 우리 아이들하고 같이 2009년 한국에서 소나무를 가져가서 ‘조선인 학살의 진상규명을 멈추지 않겠습니다’라는 의지를 담아서 추도 목비를 10개정도 만들어 곳곳에 세웠다.

목비는 일본에서는 토바라고 하는데, 석비가 있으면, 추도하는 사람들이 오게 되면 새롭게 얇게 추도 목비를 만들어 그 뒤에 꽂는다.

저희도 이번에 갔더니 날씨 때문에 많이 낡아져 버린, 그래서 글자도 희미해져 버려 그때 의지를 담았던 사람들의 서명도 잘 안 보였지만 그 추도 목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에 진상조사단으로 갔던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도 진상규명을 하기 위해서 선생님들과 함께 진상조사 노력을 해왔는데 국가가 정말 나서야 되는구나 그런 책임감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목사님들이 많은 느낌을 가지고 절실한 기도도 해주었다.

□ 아힘나학교는 언제 어떻게 출발했나?

■ 2006년도에 작은 대안학교로 출범했다. 목회자들은 목회활동을 많이 다니는데 제가 안성지역에 터를 잡게 된 것은 2004년이다. 처음에는 무연고 새터민과 한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같이 남북통합교육을 한 것이 ‘아힘나 평화학교’의 출발이었다. 지금은 일반 대안학교의 모습이다.

□ 목회자로서, 교육자로서 이런 일을 해오면서 보람이나 어려움, 개인적 소회가 있다면?

■ 학교란 아이를 키워내는 곳인데, 제가 목사로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아이를 키워낼 것이냐 고민하면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일꾼을 만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새터민 아이도 남북의 여러 아픔을 끌어안고 통일동이로, 통일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아이로 키워가고 동북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아픈 역사를 딛고서 정말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아이로 키워가고 싶다.

이 같은 이유로 역사문제로 접근했다. 역사교육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자기들이 어떤 일을 할 건가 많은 생각을 받았던 것 같다. 지금 1기 졸업생들은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새터민 아이들도 평화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졸업생 중 한 명은 일본의 동북아 역사문제를 다루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지금은 군대에 가 있다.

아이들이 좀더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로 커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

□ 국민들과 네티즌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 현재 동북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점점 우경화 되어가고 있는 일본이다. 일본의 전체적인 우경화 문제도 그렇고 식민지 과거사 문제가 전혀 청산되지 않은 채 한일 간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무조건 일본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국민은 물론 정치권도 자제하고 올바른 역사, 사건에 근거해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차분하게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계기로서 간토 문제가 접근됐으면 좋겠다.

특별히 선거 끝나고 난 다음에 아베 정권이 한동안 계속 보수적 리더십을 발휘할 텐데 헌법 9조가 개악된다든지 아니면 재일동포 차별이 더 심해진다든지 할 가능성도 높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한일의 시민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특히 간토 문제, 식민지 청산 문제를 가지고 한일 간의 평화문제를 고민해나가면 좋겠다. 이것은 우리도 언제든지 당할 수 있는 문제다. 한국의 시민들도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재외동포의 학살 문제를 통해 지금 일본사회에서 또다시 야기될지 모르는 ‘코리안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위험한 상황을 인식하고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선거벽보를 통해서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고, 재특회는 아주 위협적인 발언을 통해서 조선인에 대한 이지메를 가하고 있다. 재외국민들도 당연한 우리 민족으로서 같이 함께 인권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생각을 넓혀가야겠다.

그래서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서명도 하고 관심도 가져주고, 재정적 후원도 해줬으면 좋겠다. 이 일을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인력도 많이 필요하고, 재원마련이 고민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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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소나무 (qnseksrmrqhr) 2013-08-01 22:39:52
글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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