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11일 평소 시민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평양대극장 앞 광장과 주변 길들은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져 유달리 조용했다. 평양역 광장에 설치된 대형 TV스크린 앞에는 젊은이들이 자리를 잡았고, 공연실황이 중계되자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6일에 있었던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이 <조선중앙TV>를 통해 녹화방송됐을 때 평양의 모습이다.

첫 공연부터 북한의 젊은 세대를 사로잡다

▲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2012년 7월 6일 모란봉악단 시범공연 모습.
가수 김유경과 박선향이 노래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북한의 주민들은 기성의 틀과 관례를 벗어난 공연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공연을 본 북한 주민들은 “전자악기를 구사하는 경음악단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여성들만의 편성이라는 것이 새롭다”, “모란봉악단은 출연자들의 의상이나 몸동작, 조명 등 무대의 전반적인 구성이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에 익은 노래들이지만, 더 힘있고 약동적으로 들려 젊은 사람들이 더 좋아할 것 같다” 등 다양한 반응을 쏟아냈다. 북한의 언론은 “젊은 가수들은 곡상의 요구를 훌륭히 구현해 노래를 정서적이고 흥취나게 불러 무대를 시종 격정과 환희로 달구었다”라며 칭찬했다. 이렇게 18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모란봉악단은 첫 공연부터 북한의 젊은 세대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리고 지난해 열린 ‘전승절’(7월2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혁명 개시’ 기념일(8월25일), 노동당 창건 67주년 기념일 등을 맞아 열린 음악회에서도 모란봉악단은 파격을 이어갔다. 올해 1월 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년경축음악회 때 모란봉악단은 청중과 하나가 됐다. 차분하게 시작된 공연은 30분쯤 지나 모란봉악단의 대표곡으로 떠오른 <단숨에>가 연주되자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청중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고, 일부는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어진 민요 <노들강변> 노래에 맞춰 청중들은 손을 들어 마주잡고 흔들었다. 최고지도자가 참석한 음악회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된 것이다.

지난 7월 27일 평양 목란관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방위원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전승절’경축 연회의 축하공연에도 다른 연주단체를 제치고 모란봉악단이 나왔다. 지난해 시범공연이후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방송매체도 온통 모란봉악단의 노래로 채워졌다. 특히 <조선중앙TV>는 프로그램 사이에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일종의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편집해 보여주고 있다. 모란봉악단이 남쪽의 모든 아이돌그룹, 걸그룹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의 언론매체들은 모란봉악단이 “1년도 못되는 짧은 기간에 새 세기 조선의 예술을 대표하고 선도하는 멋쟁이 악단으로 빛을 뿌리고 있다”며 “오늘 문학예술부문은 물론 강성국가 건설의 모든 단위, 모든 초소들에서 적극 따라 배워야 할 시대의 본보기로 된다”고 선전하고 있다.

의상과 곡목에 주목한 국내외 언론

▲ 2012년 7월 6일 모란봉악단의 결성을 알린 첫 시범공연을 김정은 제1위원장과 리설주 부인이 함께 관람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지난해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에 대해 국내외 언론은 이 공연의 내용과 단원의 파격(?)적인 차림새에만 주목했다. 시험공연 때 모란봉악단은 민요 <아리랑>을 시작으로 미국 영화 <록키> 주제곡인 <Gonna Fly Now>를 <이제 곧 날아오르리(외국곡)>로 소개했고,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인 프랭크 시내트라의 히트곡 <마이웨이(My way)>도 연주했다. 미키마우스나 백설공주 등 미국 만화영화 주인공들도 등장해 연주자와 가수들과 함께 춤추는 모습도 등장했다. 그 뒤로는 <백설공주>등의 디즈니 만화영화 영상이 상영됐다.

특히 어깨와 다리가 드러난 미니원피스를 입은 여자 가수, 굽 높이가 10센티미터를 넘는 킬힐(kill heel)을 신고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솔로 연주를 선보이는 여자 바이올리니스트 등 단원들의 의상과 화려한 불꽃놀이와 레이저 조명 등 이전에 북한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무대 장치가 화젯거리로 거론됐다.

그러나 북한 음악계의 흐름을 오랫동안 지켜본 전문가들은 이번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파격’보다는 ‘공식화’에 초점을 맞췄다. 2009년 은하수관현악단의 결성과 공연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모란봉악단의 공연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외 언론에서 파격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서구풍 의상과 연주 곡목은 실상 북한 젊은 세대의 변화된 정서와 ‘세계적 추세’를 반영한 것으로 이를 공식 무대에 올렸다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남쪽 가수들의 공연, 북측에 영향

북한은 2001년 가수 김연자의 평양 공연을 시작으로 2002년 이미자, 윤도현밴드 초청 공연, 2005년 조용필 초청 공연 등을 통해 남측 대중음악과의 소통을 추진했고, 2000년대 초부터 세계화 추세에 맞춰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등으로 전도유망한 학생들을 유학 보내 젊은 음악가를 키우기 시작했다. 2005년 7월에 만난 북측의 한 중견간부는 이미자와 윤도현밴드의 평양공연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이미자 씨의 공연은 이전 남쪽 가수들의 공연과 달리 가사내용이 비교적 잘 귀에 들어왔다. 반면 윤도현밴드는 솔직히 말해 가사를 하나도 알아먹지 못했고, 시끄럽기만 했다. 그러나 평양의 젊은 세대들은 이미자보다는 윤도현밴드 음악에 더 관심을 보였다.”
윤도현밴드의 락음악이 북한의 젊은 세대에게 문화적 충격을 줬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서울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두 공연을 모두 직접 봤던 30대 북측 인사의 이러한 평가는 북한 젊은 세대의 변화된 음악관을 보여준다.

2003년 10월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완공 기념식에서 한 남쪽 가수들의 공연도 북한에는 큰 충격을 줬다. 당시 번쩍거리는 무대조명과 사이키조명이 요란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베이비복스와 댄스그룹 신화가 공연했다. 공연을 지켜보던 북측의 젊은 안내원은 “저런 공연이 평양에서 열리는 것도 놀랐지만, 저런 공연을 허용한 당의 결정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해외에 나와 있는 평양식당에서의 공연과 연주, 평양 노래방에서 불리는 노래들을 접한 남측 인사들에게도 모란봉악단의 공연이 낯설지만은 않다. 2008년 5월 평양을 방문해 보통강호텔 1층의 노래방에 갔을 때 보니 남쪽 노래는 없었지만 중국, 미국, 유럽의 명곡들은 다 노래곡목에 있었다. <마이웨이(My way)>를 신청해 부르니 노래방의 접대조장이 나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또한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북한 영화나 외국 영화에 삽입된 주제곡을 통해 남쪽이나 외국노래를 폭넓게 접하고 있다. 실제로 2007년 12월 중국 남방항공의 간부와 베이징에 있는 한 평양식당에 갔을 때 북한의 한 여성봉사원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불러줬다. ‘남쪽노래를 불러도 괜찮으냐’고 묻자 “북쪽 영화 <민족과 운명>에 나오는 노래”라고 대답했다. 북한의 대학생들은 <타이타닉>등 외국영화를 보면서 영화회화 공부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 주제곡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게 된다고 한다.

해외의 북한식당에서 여성봉사원들이 하는 공연에서는 모란봉악단이 보여준 것과 유사한 악기편제나 의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대중문화 저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던 셈이다.

북한 대중음악계, 1980년대에 처음 파격 변신 시도

모란봉악단의 등장은 북한 대중음악계가 두 번째로 큰 변화의 바람을 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번째 변화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도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1969년 평양가무단을 만수대예술단으로 개편하고 이 단체를 ‘조선의 본보기예술단체’로 육성했다. 그는 ‘새 형의 음악’을 표방하며 “민족적 정서와 현대적 미감을 옳게 구현”할 것을 주문했다. 악기편성에서도 민족악기와 서양악기를 배합하는 파격이 이때부터 시도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후계자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 위원장은 “음악을 대중화하여야 한다”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83년의 왕재산경음악단과 1985년의 보천보전자악단의 결성이 그 출발점이었다.

1983년에 결성된 왕재산음악단은 북한 최초의 경음악단으로, 전속악단과 가수, 무용수로 구성됐다. 이 악단은 주로 민요풍의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이와 관련 김정일 위원장은 1993년 11월 13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최근에 민족음악을 어떻게 발전시키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생각하다가 왕재산경음악단에 우리나라 민요를 현대적 미감에 맞게 편곡하여 형상할 데 대한 과업을 주었습니다. …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이번에 전자악기와 양악기를 가지고 형상한 민요들은 들으면 다 귀맛이 있고 저절로 흥취가 납니다. 이것을 보면 전자악기와 양악기를 가지고도 민요를 얼마든지 우리 인민의 정서와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잘 형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재산경음악단이 결성된 2년 후인 1985년, 경음악단인 보천보경음악단(후에 보천보전자악단)이 결성됐다. 보천보전자악단은 엘리트 음악교육을 받은 뛰어난 연주가.가수.작곡가들로 구성됐고, 리듬보다는 가사를 중시하는 북한식 음악을 지향하면서 세계 각국의 대중음악도 연주했다. 연주 형태는 보통 전자악기를 중심으로 양악기와 전통악기를 혼용하며, 음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전속 배우와 합창단을 두었다. 대표적인 가수로는 김광숙.리경숙.전혜영.조금화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휘파람>, <여성은 꽃이라네>, <도시처녀 시집와요> 등을 히트시키며 생활(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다.

왕재산경음악단과 보천보전자악단의 결성은 근로자들의 다양한 생활을 반영하고, 인민들이 이해하기 쉽고 부르기 쉬운 노래를 창작, 보급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0년 2월25일 음악예술부문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최근에 근로자들의 문화정서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조기천의 시 <휘파람>을 가지고 노래를 지어 보급하도록 하였습니다”라며 “우리는 부르죠아 음악예술의 침습을 막고 사회주의 음악예술을 건전하게 발전시키며 인민들의 높아 가는 문화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근로자들의 다양한 정서를 반영한 노래를 많이 창작 보급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했다. 그는 또한 “정서생활을 반영한 노래는 당과 혁명, 충성심에 대한 것을 직선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일없습니다”라며 “노래는 가사부터 누구나 리해하기 쉽고 소리를 내기 쉽게 써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대중가요의 ‘통속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은 후 두 악단간의 역할분담을 명확히 했다. 그는 1993년 11월 “앞으로 현대음악은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하고 민족음악은 왕재산경음악단에서 하여야 합니다”라고 지시했다.

두 악단은 북한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당시로서는 이들 악단 가수와 무용수가 입은 의상 자체가 파격적이다. 특히 평양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만수대 TV>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정오에 보천보경음악단 공연이 방영됐는데, 북한 신세대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모란봉악단이 나오기 전까지 평양의 식당이나 노래방, 해외 평양식당에서는 대부분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후반~2000년대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왕재산과 보천보전자악단의 음악을 향유하며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변화의 시작, 은하수관현악단 결성

▲ 2010년 9월 북한 정권 수립 기념음악회에서 은하수관현악단이 공연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민족21]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음악계는 다시 한번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맞이한다. 국제교류가 늘어나고 남북의 상호 방문 공연이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남쪽의 노래가 중국으로 거쳐 ‘연변가요’란 이름으로 북쪽에서 폭넓게 불리기 시작했다. 전도유망한 음악인의 해외유학도 활발해졌다. 민요풍의 노래를 주로 하는 왕재산경음악단, 20년이 흘러 전형화된 보천보전자악단의 음악으로 중독성이 강한 남쪽이나 중국 노래의 유입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과거의 역사를 담은 ‘혁명가요’로는 더 이상 젊은 세대의 변화된 감성을 담아낼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후계자의 등장을 계기로 북한은 2009년 ‘인민 정서’와 ‘세계적 추세’를 내세우며 만수대예술단 내에 구성됐던 삼지연악단을 중심으로 은하수관현악단을 새로 결성했다. 우선 클래식음악의 대중화에 나선 것이다. 은하수관현악단에는 인민예술가 2명, 인민배우 3명, 공훈예술가 6명, 공훈배우 6명 등 수준급 연주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악단의 수석 지휘자는 평양음악대학을 피아노 전공으로 졸업하고 모교 관현악단에서 지휘 경험을 쌓은 뒤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한 리명일이 맡았다. 드럼을 맡고 있는 리진혁은 2000년 4월에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첫 서울 방문 공연과 2005년 청년학생협력단의 인천 방문 때 남쪽에 온 경험이 있다.

단원들은 주로 어릴 적부터 조기 영재교육을 받고 평양음악대학을 비롯한 북한 각지의 음악 교육 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경력이 있는 젊은 연주자들 위주로 뽑았다. 북한 유일의 음악 경연대회인 ‘2.16예술상’을 비롯한 국내외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해외 유학을 갔다온 연주자들도 배속되어 있다. 성악가수로는 해외유학파인 황은미와 서은향, 리향숙이 은하수관현악단을 대표한다.

▲ 2009년 은하수관현악단의 공연 모습. [자료사진 - 민족21]
2009년 10월 13일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조선노동당창건 64돌 10월 음악회’에서 은하수관현악단은 그 진면목을 보여줬다. 은하수관현악단은 남쪽의 ‘팝스 오케스트라’처럼 기존의 클래식 악기부터 전자기타, 드럼, 색소폰 등을 모두 갖춘 편제로 구성됐다. 여성연주자들은 어깨와 쇄골이 드러나는 검은색 연주복을 입고 나왔다. 여가수들의 의상도 처음부터 끝까지 드레스였다. 고전적인 디자인(?)부터 최신 유행 디자인까지 다종다양했다.

북의 언론들은 은하수관현악단이 “소해금, 어은금, 가야금, 장새납, 저대, 장고 등의 조선 고유의 민족악기들과 양악기들이 적절히 배합”된 악기편성이어서 “폭넓고 다양한 표현력, 지난 시기의 관현악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독특한 음색과 풍부한 음량으로 그 어떤 외국음악이나 민족음악도 손색없이 형상할 수 있게 한다”고 평가했다.

2011년부터 은하수관현악단은 만수대예술단을 대신해 단독으로 혹은 공동으로 신년, 설명절, 당창건 기념일, 태양절(김일성 생일),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등 명절 축하 음악회를 열었고 김정일 위원장과 김정은 제1비서가 이 공연들을 관람했다. 2011년 7월 김정일 위원장은 당시 후계자 김정은 제1위원장과 함께 새로 리모델링된 은하수극장에서 은하수관현악단의 개관 기념음악회를 관람한 후 “은하수관현악단의 창작태도와 창조기풍은 우리의 모든 예술단체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라며 이 악단을 치켜세웠다.

실제로 은하수관현악단은 2012년 3월 14일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에서 단독공연 및 프랑스 라디오 필하모니관현악단과의 합동연주회(지휘 정명훈)를 갖는 등 해외연주활동에 나설 정도로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였다. 북한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리설주도 2010년부터 1년여 동안 은하수관현악단에서 활동한 바 있다.

북한 음악계의 세대교체와 ‘열린 음악정치’

▲ 2012년 10월 노동당 창건 67주년 축하 모란봉악단 공연에 앞서 대형화면을 통해 연주자와 가수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수 류진아는 최근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자료사진 - 민족21]
은하수관현악단의 결성을 통해 클래식음악계의 세대교체를 단행한 북한은 이어 보천보전자악단을 공식 해체하고, 이를 대신할 악단으로 모란봉악단을 결성했다. 은하수관현악단보다 한 발짝 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였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부인 리설주와 함께 악단 결성을 주도하면서 “젊은이들이 만끽할 수 있는 공연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러한 지향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의 변화된 정서와 세계적인 추세의 수용이 모란봉악단의 결성배경이 된 것이다.

보천보전자악단의 경우 악기연주자는 남성들이었고 성악가는 여성들이었는데, 모란봉악단 연주자는 모두 여성들로 구성됐다. 악기 편제와 연주자는 다음과 같다.

제1전자바이올린 겸 악장 - 선우향희
제2전자바이올린 - 홍수경
전자비올라 - 차영미
전자첼로 - 유은정
전자건반(신시사이저) - 김향순, 리희경
색소폰 - 최정임
피아노 - 김영미
전자드럼 - 리윤희
전자 기타 - 강령희
일렉트릭 베이스 - 리설란
가수 - 김유경, 김설미, 류진아, 박미경, 정수향, 박선향, 리명희

악장 선우향희는 평양 대동문유치원 시절부터 촉망받던 음악수재로 평양음악대학에서 수학했고, 북한 유일의 음악 콩쿠르인 2.16 예술상 바이올린 부문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만수대예술단 여성기악중주단과 삼지연악단에서 바이올린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모란봉악단에 참여했다. 최근 모란봉악단의 가수 류진아는 ‘공훈배우’칭호를 받았다. 보통 2~30년 정도 경력을 쌓아야 받는 칭호라는 점에서 이제 1년 정도 된 모란봉악단에서 공훈배우를 배출한 것은 북한이 그만큼 모란봉악단에 각별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보면 모란봉악단의 결성은 김정일시대의 ‘음악정치’를 김정은시대에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음악정치’에 대해 “노래와 정치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나간 정치인은 김정일 위원장뿐이라며 “음악은 정치에 봉사해야 하며, 정치가 없는 음악은 향기가 없는 꽃과 같고 음악이 없는 정치는 심장이 없는 정치와 같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도 김정일 위원장의 ‘음악정치’를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2011년 1월 15일 음악무용종합공연을 관람한 후 그는 “음악의 사명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감동시키고 그들의 사상과 정신을 발동하여 혁명투쟁으로 고무 추동하는 데 있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음악정치’와 구별해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이같은 행보를 ‘열린 음악정치’라고 명명했다.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을 관람한 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인민의 구미에 맞는 민족고유의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대담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밝힌 것도 김정일시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 발언으로 보인다. 젊은 세대와의 공감과 세계적 추세를 좀더 강조한 셈이다.

김정은시대 북한 음악계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모란봉악단이 앞으로 어떤 파격을 선보일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일단 북한 젊은 세대의 ‘열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모란봉악단이 ‘한국과 중국 가요’와 경쟁해 계속 최고의 인가를 누릴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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