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의(고박노학회장기념사업추진위원회 회장)


▲ 박노학씨(왼쪽)와 허조씨(오른쪽). [사진제공 - 박승의]

1956년 하토야마 일본 내각에 의해 일소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져 소련에 억류되었던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송환됐다. 그와 더불어 전후 사할린에 남겨진 한국인 남편을 둔 일본 여성에게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갈 길이 열렸다. 그리하여 1957년 8월부터 1959년 9월까지 총 2,345명이 2년 동안 일본인 부인과 함께 한인 동포들, 그리고 자녀들이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때 한국인 중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일본 여자와 결혼했을건데'라면서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넘었는데 사할린에 독신 일본 여자가 있을 리 만무하였다.

1958년에 일본으로 박노학, 이희팔, 심계섭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귀환했다. 그때 박노학을 전송하러 나온 많은 친구들은 이별을 아쉬워하며 흐느껴 울면서 '일본에 들어가면 우리도 빨리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주게'라고 이구동성으로 부탁했다. 그는 동포들의 비참한 소리를 가슴 깊이 안고 후에 일본에서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앞으로 재사할린 조선인 귀국 탄원서를 쓰고 동행한 5명 동포들의 서명을 받았다고 한다. 박노학은 일본에서 사할린 동포들을 귀환시키기 위하여 '카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를 결성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사할린 토마리시에 거주하는 허조는 박노학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게 되었고 이곳 상황을 전하였고 귀환자 명단을 작성하는데 힘을 썼다. 편지는 처음에는 잘 들어갔고 회답도 잘 받았다. 그 당시 한국과 소련 사이에는 국교가 없었기 때문에 사할린의 조선 사람들과 한국에 남겨진 가족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었고 서로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박노학이 사할린의 동포에게 한국에서 받은 편지를 사할린에 보내면 그것을 받은 사람은 한국의 가족 앞으로 보내는 답장을 박노학에게 전달했다. 박노학씨의 가족이 그것을 개봉하여 새 봉투에 넣어 한국 주소로 우송했다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온 편지는 어느 것이나 눈물 없이는 읽지 못했다'고 박노학은 증언했다.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 귀환 희망자를 확인하고 그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데에 코르사코프에서 살고 있는 김영배과 토마리시에 살고 있는 허조가 적극 도와 나섰다. 사할린에 살고 있는 한인 동포들은 대다수 문맹자였기 때문에 편지를 써달라고 허조에게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단을 작성한다는 소식이 전 사할린에 퍼졌다. 편지만 쓰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러시아말과 일본말로 주소를 적어야 했다. 몇 달 동안 사할린과 일본 사이에 서신거래가 활발했고 명단 작성도 거침없이 잘 진행되어 박노학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런 귀환 운동을 둘러싼 일련의 움직임은 소련 당국으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사할린 한인 대부분이 남한 출신이니까 그들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나라는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소련이 그들의 귀국을 인정할리 없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박노학의 사업과 그를 협조하는 사할린 귀환 운동은 당연히 ‘반소, 반공’ 행위로 파악했다.

사할린 한인들은 명단을 작성하니 이제 귀환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사할린 각지에 전해져 이미 소련국적이나 북한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 다시 무국적자로 돌리려고 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잘 전달됐던 편지도 이제는 일본 박노학에게 가는 것이 드물어졌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각 편지를 KGB(소련 국가 안전위원회)가 조사하여 압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허조는 대륙으로 (이르쿠트스크, 노보시비르스크 등) 공부하러 가는 사람을 부탁해서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서 일본으로 보내곤 했다. 사할린주의 KGB는 거기까지 손을 뻗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KGB가 반공분자들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었다. 어느 날 공산당 사할린주위원회 조선인 담당자가 사할린의 <레닌의 길로> 조선신문사 기자와 같이 토마리제지공장 회의실에서 시한인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신문기자가 “소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사람은 반소분자이다. 사할린의 조선 사람들 중에는 귀국 희망자가 있을 수 없다. 귀국하고 싶으면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가라. 북조선도 조선이 아니냐?”라고 발언하는데,

허조가, “맞다. 북조선도 조선이다. 그러나 고향은 아니다. 나는 고향에 아버지, 형제들이 살고 있다. 나는 고향에 가려고 한다. 당신들이 알다시피 지금 조선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 않느냐? 북조선으로 나가도 고향으로는 가지 못할게 뻔하지 않느냐? 나도 한때 북조선으로 갈 생각했다. 북조선도 조선이니까 어쩌면 거기서 국경을 넘어 남쪽 고향에 갈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라고 반발했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 국가에 가려는 것은 반동분자나 다름없다’라는 협박에 ‘그러면 너희들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느냐? 형제도 자식도 없느냐? 내가 부모형제를 만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되는가?’라고 허조가 남한 고향으로 가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날 회의가 끝난 후 KGB에서 온 사람이 허조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회의 참가자들은 이런 행위에 분개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 당시 소련에서는 재판 없이 투옥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회의 후 200명 이상이 서명한 청원서를 해당기관에 보냈다. 그 결과 15일 만에 허조는 석방됐다.

박노학과 사할린 잔류 한인들의 서신왕래를 근거로 5년여에 걸쳐 7천여 명의 귀환명부를 만들어 한국, 일본, 소련에 보냈고 영주귀국사업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박노학의 노고에 관한 자료는 일본에서 발간된 수많은 서적, 특히 “사할린과 일본의 전후 책임”(타카기 켄이치), “슬픈 섬 사할린의 한인”(쓰노다 카주코), “한 자원봉사자의 기록”(아라이 사와코의 일기) 등과 여러 신문에 발표되었고 또 최근에는 인터넷, 특히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여기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필자 소개]
전 러시아 사할린국립대 교수
2009년 파주지역으로 영주귀국
현재 고박노학회장기념사업추진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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