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회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63주년 합동위령제가 29일 한강대교 노들섬 둔치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전통제례로 초헌 잔을 올리는 최사묵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제7회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63주년 합동위령제’가 6월 29일 11시 한강대교 노들섬 남쪽 둔치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평화재향군인회(평군)와 (사)평화통일화해연구원,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 공동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최사묵 평군 상임대표와 한국전쟁유족회 박용현 대외협력위원장, 그리고 김원웅 전 민주당 의원과 장호권 사상계 대표 등이 참여했다.

먼저 전통제례와 독축, 추모 묵념에 이어 박용현 위원장이 나와 인도교 폭파 개요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 인도교 폭파 개요를 설명하고 있는 박용현위원장.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한강인도교 폭파 개요>

○ 6월 27일(전쟁 발발 3일째) 전황
-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 위협
-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남(새벽 2시)
-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새벽 4시)
-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가용 전력을 창동 방어선에 집중시켰으나 붕괴

○ 6월 27일 11시 : 긴급 회의
-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고,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 상의 교 량을 폭파하기로 결정
-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 함

○ 6월 27일 12시~15시 30분 : 한강 인도교,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 폭파장치 설치 완료

○ 6월 27일 19시 :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의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곧 한국 전선에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육군본부를 서울로 복귀하기로 결정
- 이에 따라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키고 한강교 폭파 연기
-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 사수 결정
- 한강 상의 교량에 설치했던 폭발물 일부 제거, 차량과 열차 통행에 지장 없도록 조치
- 폭파 지휘계통도 총참모장-참모부장(김백일 대령)-공병감-공병학교장으로 확정

○ 6월 27일 20시 : 이승만 대전에서 서울사수 라디오 방송 시작, 3회 방송
‘동포여러분’으로 시작되어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요지. “국군이 반격 중이니 도망가지 말라.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

○ 6월 27일 23시 30분(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될 무렵) : 폭파준비 명령 하달

○ 6월 28일 01시 45분(돈암동에 북한군 전차 진입 보고 접수) : 채총참모장 공병감에게 폭파 명령 하달

○ 6월 28일 02시 30분 : 한강교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절단
-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500~800명에 이르는 인원 사망, 차량 50여 대 피해
-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 차단, 국군 주력 4만 4천명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 초래
- 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
- 한강교 조기 파괴로 시민들 피난 기회 상실

○ 6월 28일 오전 10시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후 인민군 전차 한강대교 북단 출현
- 북한의 경우 10월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백선엽의 1사단이 대동강 입구에 당도한 시점에서 다리를 끊음
- 피난길이 끊겨 강북에 남겨진 많은 시민들은 수복 후 부역 혐의로 학살

○ 9월 21일 : 공병감 최창식 대령 사형
- 한강교 조기 폭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군은 민심 수습을 위해 군관계자 군사재판 회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폭파 책임을 물어 사형 선고
- 1964년(14년 후)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으로 판단, 무죄 선고로 명예회복

▲폭파된 한강인도교 모습. 전쟁 시기 여타 민간인 희생 사건과 달리 진상규명과 진혼 노력도 없이 방치되어 오다가 7년 전 김원웅 전 의원의 제안으로 위령제가 시작되었다. [사진출처 - 평화재향군인회]

▲ 1900년 한강철교 완공 후 191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앞쪽). 왼편 두 번째 교각 부분이 1950년 폭파되었다가 1958년 복구. 1982년 뒤쪽 다리를 놓아 현재의 쌍둥이다리가 됨.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이어 인사말에 나선 내빈들은 63년 전 허공에 스러져간 수중고혼들의 명복을 빌며 위로하고, 사전 경고도 없이 인도교를 조기 폭파한 이승만 정부의 반인도적 야만성을 규탄했다. 또한 대전으로 도피한 상태에서 6만 명의 일본 망명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한편으로는 거짓 방송으로 군대와 시민들의 피난 기회를 원천 차단함으로써 참담한 비극을 불러온 정부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행태를 질타했다.

행사는 기념 묘비석 설치와 진혼제 추진을 제안하고 분향과 자유발언, 음복으로 마무리되었다. 같은 시각 노들섬 위에서는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라는 단체 주최로 빨간 조끼를 입은 30여명이 제2회 ‘민.관.군 합동 추모위령제’를 열고 있었다.

▲ 인사말을 하는 한국전쟁유족회 박용현 위원장, 최사묵 평군 상임대표, 김원웅 전 의원과 장호권 <사상계> 대표(장준하 선생 장남).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합동 참배.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기념촬영.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한강인도교 폭파 증언>

○ 로이 애플먼 _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책자에서
『한강다리가 폭파되었을 때 피난민과 차량은 생명의 탈출구인 인도교에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폭파를 목격한 미군장교는 500~800명이 폭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4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리 위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피아의 상황으로 보아 한강 다리를 6~8시간 후에 폭파해도 무방했을 것이며, 그랬으면 3개 사단의 병력과 중장비차량을 충분히 후송했을 것이다.』

○ 페렌바크 _ <한국전쟁> 책자에서
『다리 북쪽 끝에서 150야드쯤 왔을 때 시간은 오전 2시 14분이었다. 다리는 수많은 자동차와 보행자들로 들끓었다. 장대령은 수천 명의 시민과 군인들을 실제로 다리를 건너면서 보았다. 땀에 젖은 그는 화가 나서 찝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고 시계를 보니 오전 2시 15분이었다. 그때 다리가 폭파되었다. 오렌지빛 불이 캄캄한 하늘에 번쩍이고 땅이 흔들렸다. 귀가 째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리 남쪽 두 개의 긴 아치가 출렁대는 시꺼먼 물속으로 떨어졌다.

이 폭파로 얼마나 많은 병사와 시민이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짐작으로는 천 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었다.』

○ 이원장(16연대 부연대장) _ <한국전쟁>
『중앙청 앞을 지나 용산 한강인도교에 이르는 동안 길 가득히 메운 차량대열(군·민)은 흡사 홍수였다. 다행히 인도교를 지나 선두가 노량진 수원지 정문에 이르렀을 무렵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밤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때야 비로소 연대장은 내 손을 잡으며 “부연대장, 고맙소! 우리 부대는 당신 덕으로 살았소.” 하던 일이 눈에 선하다. 단 2분이라는 시차… 이리하여 나는 죽을 고비(사선) 하나를 넘기게 됐다.』

○ 이창록(국방부 정훈국 소위) _ <한국전쟁>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번째 아치쯤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예요. 그 많던 차량은 온 데 간 데 없고 파란 인의 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는 피바다를 이루고 있고 그 위에 살점 등이 엉겨있어요.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아마 죽을 때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사람의 본능인가 보지요.

나는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국민에 대한 이런 폭거가 어디 있느냐고… 이렇게 만든 자는 마땅히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양원진(양심수후원회 장기수, 85세, 당시 신흥대 재학)
『포탄이 떨어져 27일 자정쯤 한강교 북쪽에 있는 육본 연병장 부근의 수로 터널로 피난을 갔죠. 새벽 2시 반경 불이 번쩍하더니 열폭풍과 폭발음이 밀려와 한강이 폭파된 줄 알았습니다. 뒤이어 2차 철교 폭발음이 들려 왔습니다. 아침에 한강변 파출소로 가보니 인민군 전차가 도열해 있었어요.』



한강 인도교

                    서영선(시인, 한국전쟁유족회 상임고문)

63년 전 오늘
천둥 같은 우레 소리
뭉게구름처럼 먼지가 일었다

이승만은 벌써 도망가고 방송을 했다
“서울은 내가 지킬 테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십시오”

차들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달리다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아흐_
보따리 이고지고 이리저리 방황
긴 고무다리가 생겼다

출렁대는 다리 위에 긴 줄이 생겼다.
다리는 떨렸지만 걸어야만했다.
하나 밖에 없던 인도교

시민들은 속아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수중고혼이 되었다

63년 전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렸던가!
오늘 우리 영령들께
술 한잔 올리오니
흠향하옵시고 편히 쉬소서

63년 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수정, 7월 2일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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