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남혜경(사할린국립대 파견 교수)님이 조옥주(사할린한인 2세)님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글입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전합니다. 조옥주님에 대해서는 지난 글([KIN연재 동포소식(10)] 사할린 장돌뱅이 ‘따냐’ - 어느 사할린한인 2세의 반생) 을 참고 바랍니다.


나, ‘조옥주’는 1953년에 스미르늬흐(남사할린 북위 50도 지점, 일제시대에는 일-소 국경선 인근 지역; 편집자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줄줄이 딸 넷을 낳고서야 겨우 아들을 얻었는데, 욕심을 더 내다가 결국 딸 둘을 더 얻어 7명의 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다.

▲ 조옥수 씨. [사진제공 - 남혜경]
당시로는 많지도 않은 숫자다. 당시 한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았다. 또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도 많았다. 남편이 재징용을 당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돌아오지 않거나, 남편이 일찍 사고나 병으로 죽거나, 또는 일본측에 협력한 혐의로 감옥에 갔거나 해서 홀몸으로 아이들을 키우기가 힘든 아주머니들이 재혼을 했다. 짝을 못 찾은 홀애비들이 많았으니 시집은 몇 번이고 갈 수 있었다. 한편으론 홀애비들을 구제해 주는 좋은 일이기도 해서 누구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다. 딸을 파는 집도 있었다. 아이를 못 낳는 요리깐(요정) 출신 아주머니에게 양녀로 주거나, 나이 많은 홀애비한테 어린 딸을 시집보내거나 하는 일이 있었는데, 대가를 받았으니 팔았다는 말도 들을만하다.

한편 러시아인들이나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큰땅배기’(사할린한인들이 ‘고려인’을 지칭하는 말)들은 자식을 하나 둘만 낳았고, 우리 부모들을 무식하다고 손가락질했다. 다행히 우리 부모님은 딸들을 남의 집에 주지 않고 다 품어 키워주셨다. 의붓아버지 밑에서나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아이들도 많았는데, 우리는 가난했지만 친부모 밑에서 사랑 받고 자랐으니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아버지는 1917년 경남 하동의 부잣집 장남으로 태어나 호강스럽게 사시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토바이를 갖고 싶어서 집의 돈을 훔쳐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런데 오토바이도 사기 전에 노름판에 끼어들어 돈을 다 날려버려 집에 돌아갈 면목이 없게 되자 사할린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오토바이 값만 벌면 돌아갈 생각으로.

어머니는 1928년생인데, 전라도 ‘이리’가 고향이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부모님, 3명의 동생과 함께 열대여섯 살에 사할린으로 건너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7남매의 장녀인데 어릴 적에 어떤 섬의 부잣집에 식모로 보내진 일도 있었단다. 그런데 주인집 아이를 업고서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울고 있으니 보다 못해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릴적부터 가족애가 특별했다.

어머니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외할아버지와 함께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재징용 당한 후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으로 돌아오려다 몇 번 실패하고는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처와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포기도 못하고 세 달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결국 돌아오셨다. 약혼을 결혼과 다름없이 여기던 때라 어머니는 흠이 있는 여자가 돼 버렸다. 그래서 20살이 되던 해에 나이 많은 홀애비에게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9살 연상인데 글을 아는 유식자라고 해서 할아버지가 강제로 혼인을 시켰다고 한다.

사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부모님들 역사는 자세히 모른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되기 전에는 남조선에 친척이 있는 것도 ‘쉬-쉬-’ 하던 때여서 철없는 자식들이 밖에 나가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워 1세들은 자기들 얘기를 털어놓지 않았다. 철없는 우리는 부모들이 고향에서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사할린으로 살러온 줄로만 알았다. 자유롭게 입을 열수 있는 세상이 왔을 때 이미 부모님들은 세상을 뜨고 안 계셨으니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함께 한 시간들을 기억할 뿐이다.

오랫동안 자식들의 기억 속 아버지는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외가댁에서는 ‘노다리(일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으름뱅이_필자주) 조서방’이라고 무척 무시를 했다. 일하기 싫어하고 술 좋아하는 형부를 처제들도 대놓고 무시를 했다. 우리 또한 ‘지독히도 어머니를 고생만 시킨 아버지’라며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페레스트로이카가 되고, 고향인 하동을 다녀와서야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노동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아버지는 체격도 왜소해서 선천적으로 육체노동을 감당해 내지 못했고,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 의식이 강해 약삭빠르고 악착같이 살아야하는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우글레고르스크에서 해방을 맞은 후 잠시 조선학교에서 선생질을 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자격을 갖춘 선생들이 오면서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밀려났다. 한 동안 학교 밤뼤(수위)를 했다고 했다. 그러다 코르사코프로 와서 막노동을 하다가 벌이가 좋다는 삼판으로 다시 옮겼다. 그곳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스미르늬흐는 한인들 간에 ‘사랑의 도피처’로 유명하다. 불륜관계의 연인들(예를 들어, 형부와 처재, 유부녀와 총각)이 함께 도망을 치던 곳이란다. 숲이 깊고 울창해 이곳으로 숨어버리면 찾지를 못해서였다고...

어머니는 삼판에서 식모로 일하며 두 아이를 키웠는데, 전기도 수도도 없는 움막 생활이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도 벌이가 시원찮아 그 후 10년간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살림은 전혀 좋아지지 않고 식구만 늘었다. 외가댁 식구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애만 줄줄이 낳아댄다’며 더욱더 조서방을 미워했다. 17번을 아버지를 따라 옮겨다니던 어머니가 하루는 큰 결심을 했다. ‘저 사람 믿고 따라 다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이젠 내가 앞장서서 자식들 먹여 살려야겠다’고.

우리에게는 ‘이와모토’라고 불리는 능력 있는 이모부가 계셨다. 한인이지만 일본이름으로 불렸다. 어머니 바로 아래 여동생 남편인데 조선에서는 머슴질을 했다나... 어쨌든 상놈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생활력이 아주 강했다. 일도 잘하고 야리꾸리(수완_필자주)도 좋아서 장사로 돈을 꽤 잘 벌었다. 이분이 ‘처형이 남편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며 가엽게 여겨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이모부는 코르사코프에서 집 살 돈을 빌려주었고, 우리는 다시 코르사코프로 옮겨 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1962년부터 코르사코프 사람이 되었다.

코르사코프에서 아버지는 청소부로 일했고 어머니는 군부대에서 불을 떼는 일을 했다. 유식자라해도 러시아말 한마디 못하니 노동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식자로 통했고, 잔치나 초상이 나면 글을 써달라며 이웃들이 찾아왔다. 또 ‘장백’이기도 했다. 부모형제 없이 살아가는 한인들이 고향이 같거나 마음이 맞으면, ‘동상간(의형제)’이라 해서 형제처럼 지냈는데, 이를 ‘동상간 놀다’라고 했다. 제일 큰 형 역할을 맡은 사람을 ‘장백’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노다리셨지만,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진짜 양반이셨다. 술을 좋아했지만 술주정이라는 게 없었다. 좀 취했다 싶으면 “나 좀 들어가 누워야겠다”하면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주무셨다. 또 처자식들한테 큰소리 한 번 안내셨고, 누가 아프면 손수 쑥이나 약풀을 캐 와 약을 달여주시는 자상한 분이셨다.

어머니가 또 딸을 낳고는 “나는 미역국 먹을 자격도 없다”며 아이 젖도 안 물리고 울고 있자, 아버지는 “딸도 자식인데 이러면 안 돼오.”하며 달래고 미역국을 끓이고 쑥을 달여 어머니에게 먹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저녁 친구 집에서는 소리 내어 우셨다며 친구 분이 한참 후에 말했다고 한다. 또 어머니가 딸들을 구박하면 “이 시대에 여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불쌍하니 구박마라”고 하셨던 깬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린자식들을 줄줄이 앉혀놓고서는 “우리는 함안 조가다. 본적은 경남 하동...이다. 이건 잊으면 안 된다”며 강조하셨고, 자는 애를 깨워 “너는 본이 어디냐?”하고 확인하곤 하셨다.

그러나 어린 우리들은 부지런히 일을 해서 처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는 아버지를 원했다. 지식이 풍부하고 이웃의 존경을 받아도 그것이 잘 먹이고 입히는 아버지를 이기지 못했다. 외가댁 식구들과 함께 자식들도 아버지를 무시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 때는 왜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되고 아버지의 고향을 찾은 후에야 우리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식 노릇도 남편 노릇도 애비 노릇도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고향에 처와 어린 두 아들이 있었다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자식도 없이 청상으로 사는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앞장서 재혼을 시켰다고 한다. 한 때는 빨갱이 집안으로 찍혀서 고생도 많이 했다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버지의 동생도 죽고 안 계셨다. 작은어머니만 살아계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줄줄이 애만 낳게 하고선 술만 마시는 남편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죽어서도 같이 묻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부모형제가 여기 다 있지만, 네 아버지는 내가 버리면 아무도 없는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대신 어머니의 사랑은 고향으로 가버린 약혼자에게 있었던 것 같다. 사랑 없이 결혼생활을 하는 나를 보며, ‘네가 내 인생을 닮았나 보다’ 하고 가슴 아파하셨다.

점잖고 순한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부지런하고 깔끔하고, 대차고 성깔 있고, 야리꾸리 잘하는 살림꾼이었다. 경우 바른 소리를 잘 한다고 해서 동네 오바상(아주머니)들은 어머니를 ‘변호사’라 불렀다. 그 피를 이어받았는지 우리집 딸들도 말 잘하는 걸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첫째, 잔칫집에 아이들은 데리고 다니지 마라. 둘째, 잔치 음식은 집에 가져오지 마라. 셋째, 잘 모르면 제일 비싼 것으로. 이왕 살 거면 좋은 것으로 사라. 싼 게 비지떡이다. 넷째, 신발은 좋은 것을 신는다. 신발이 품격을 말해준다. 다섯째, 집 떠나서는 궁색 떨지 마라. 길 떠날 때 돈은 여유 있게 챙겨라.

지금도 그렇지만 한인들의 잔치는 늘 자리가 부족하다. 그런데도 하루 잘 먹이겠다고 잔칫집에 늘 자식들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머니는 ‘눈칫밥은 살로 안 간다’며 절대 우리를 안 데리고 다녔고, 잔칫집에서 싸주는 음식도 마다하셨다. 맛을 들여놓으면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니 애들 애태우기 싫다며 원천 봉쇄를 한 것이다.

우리 자식들은 ‘주전부리’라는 걸 모르고 자랐다. 형편이 어려워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여자가 주전부리를 좋아하면 살림 말아 먹는다’며, 사탕이나 과자 같은 걸 일체 사주지 않았다. 그래도 옷이며 신발은 늘 깨끗하게 좋은 걸 차려 입혔고, 뭘 갖고 싶다면 최고로 좋은 것을 사주시는 통 큰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군부대에서 불 떼는 일을 하면서 텃밭농사에, 철철이 나물이며 열매를 따다 팔았고, 해바라기씨도 볶아 거리에서 팔았다. 우리는 이런 어머니가 너무도 딱해서 열심히 도왔다. 언니들은 집안일과 동생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는데 나는 웬일인지 시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던져놓고는 시장에 나가 엄마 장사를 도왔다. 여러 명이 줄줄이 앉아 똑같은 것을 파는데, 아주머니들 사이에 어린 아이가 끼여서 팔고 있으니 불쌍히 여겨 내 것을 사주었다. 그걸 깨달은 후로는 부지런히 달려갔다. 또 어머니 대신에 딸들이 불 떼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자식들에게 노동을 시킨다고 어머니가 고소를 당했다. 사정사정을 해 감옥에 가는 일은 면했지만, 불 떼기를 도와주는 일은 그 후로 금지 당했다. 우리는 어머니가 누워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 잘까?’ 하고 의아해 했을 정도다. 어머니는 정말 뼈 빠지게 일만 했다. 7명의 자식에다 친정 동생들까지 돕느라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엾기 짝이 없는 인생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키가 크고 몸매도 옷맵시도 좋은 미인이었다. 차려입고 나가면 우리가 우쭐해질 정도로 멋진 어머니였다. 외모는 둘째딸 옥희가 어머니를 제일 많이 닮았다. 그런데 인물값 한다고,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사고를 쳐서 시집을 갔다. 홀시어머니에 3형제의 장남이고, 키도 작고 인물도 없고 공부도 제대로 못한 이웃집 유라에게 동네에서 소문난 미인인 딸을 주는 게 어머니는 너무 아까웠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임신을 해버렸으니.. 망신스러워서 쉬쉬하면서 서둘러 혼사를 치렀다. 그런데 어느 날 시어머니가 사돈을 불렀다.

“당신 딸을 다시 데리고 가시오. 철이 없고 뭘 할 줄 아는 게 없어 안 되겠오.”
며느리 교육시킬 생각으로 으름장을 놓은 것인데, 우리 어머니는 “얘야 짐 싸고 애 업어라. 집에 가자. 사돈! 19살에 애를 가져 시집을 왔으니 뭘 제대로 배워서 왔겠소? 이런 며느리가 맘에 안 드시면 내 다시 데려갈 터이니 새 며느리 맞이하소”하며 딸을 재촉했단다. 시어머니가 당황해서 “사돈! 며느리 버릇 고치자고 한 번 해 본 소리인데 왜 이러시오. 참으시오, 참으시오”하면서 딸 손목을 잡아끄는 어머니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성질 고약한 시어머니의 며느리 길들이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40살에 과부가 된 어머니. 자식들이 의붓아버지 밑에서 눈칫밥 먹는 게 싫다며 홀애비들의 청혼도 거절하며 20년을 혼자 보내셨다. 당시에는 이런 어머니들이 드물었다. 두 번 세 번 시집가는 어머니들이 가득했다. 여자의 행복을 포기하고 우리들을 당당하게 키워 준 어머니.

첫째와 둘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연애를 걸어 시집을 가버려 집안 살림에는 전혀 도움이 못 됐다. 나는 16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양장점에 취직을 해서 바느질을 시작했다. 노처녀로 시집가는 25살까지 번 돈은 전부 어머니에게 갖다드리면서 함께 4명의 동생들을 돌봤다. 시집을 가서도 친정살림을 돌봤다. 어머니가 아파서 일을 못하셨던 수 년 간은 어머니가 우리 아이들을 돌보고 내가 돈을 벌었다. 어머니는 ‘네가 내 남편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59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환갑상을 받으시고 그 다음해에 떠나셨다. (계속)


[필자 소개]
남혜경. 1964년생.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졸업.
오오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교육학)
최근 다년 간 구소련지역 한인사회 연구.
2006년 가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파견교수로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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