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개최 예정이던 남북당국회담이 무산됐습니다. 이유는 수석대표의 ‘격’(格) 문제였습니다.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던 남북당국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른 문제도 아닌 ‘격’ 문제로 무산되었다고 하니 다소 황망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남북당국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오후 1시 남과 북은 대표단 명단을 동시에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시쳇말로 패를 까는 순간입니다. 남측은 북측에서 수석대표로 김양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나오지 않을 것으로 간파하고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아닌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내세웠습니다. 예상대로 북측은 남측이 그동안 줄곧 요구했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아닌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당장 북측에서 반론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북측은 예정대로 장관급을 내세웠는데 남측이 말을 바꿔 차관급을 내세웠으니 이는 ‘우롱’이자 ‘왜곡’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애초에 불씨가 있었습니다. 수석대표의 격을 둘러싼 불화는 이미 지난 9일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열린 실무접촉에서 예고됐습니다. 남측이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을 북측 수석대표로 요구했고, 북측은 이에 난색을 보인 것입니다.

이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남측은 ‘남측 수석대표는 남북문제를 책임지고 협의·해결할 수 있는 당국자’로, 북측은 ‘북측 단장은 상급 당국자’로 각각 서로 다른 내용이 담긴 발표문을 낸 것입니다.

이 같은 불씨에 부채질을 한 건 청와대입니다. 지난 10일 청와대 관계자는 “당국자 회담에서 격이 서로 맞지 않으면 시작부터 상호간 신뢰하기가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 않겠는가”라며 “그런 격은 서로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 자세로 정말 국제 스탠더드가 적용돼야 하지 않겠나”고 말했습니다. 이는 최소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여기에서 최초로 ‘격’ 문제를 야기시킨 남측 정부를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회담은 비록 명칭이 ‘남북당국회담’으로 바뀌었지만 사실상 ‘남북장관급회담’입니다, 그러면 남북은 각자 거기에 맞게 장관급을 내세우면 됩니다. 그런데 남측에서 북측의 김양건을 콕 집어 이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은 일종의 월권행위입니다. 사실상 장관급 회담인 만큼 남측에서는 장관을 내세우고 북측에서 누구를 내세우든 그를 장관급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게 ‘신뢰’입니다. 북측에서 김양건이 나오면 그게 신뢰가 되는 게 아니라 북측에서 장관급으로 내세우는 인물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게 신뢰인 것입니다.

게다가 김양건은 노동당 소속입니다. 정부(내각) 인물이 아니라 당인(黨人)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역으로 북측에서 남측 수석대표로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특정 의원을 나오라고 하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아가, 남북 간에 동급의 직책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맞추려 하는 것은 억지춘향이 되는 셈입니다.

급히 먹은 밥이 체했나 봅니다. 지난 6일 북측의 전격적인 회담 제의와 남측의 파격적인 수용으로 급진(急進)된 당국회담에 일단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하지만 ‘결렬’이 아닌 ‘보류’나 ‘무산’이라 하니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같은 민족끼리 ‘격’을 따지지 맙시다. 남북이 숨고르기를 한 뒤 다시 대화에 나서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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