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구 / 전 동국대 교수

아주 친한 고등학교 동기 중 일본 삿뽀로 대학에서 조선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수가 있다. 그는 제주 4.3항쟁 당시 그 어린 나이에 토벌대에 의해 어머니께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이 천추(千秋)의 한을 안고 결국 고등학교 때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는 ‘만경대사건’ 이후 나에게 미국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누누이(屢屢—) 해 왔다. 왜 그렇게 미국에 대해 ‘지나친’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국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충고를 이해하게 되다

▲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표지 (마고사키 우케루 지음/양기호 옮김, 메디치: 2013)
그러나 나는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 이 책을 읽고는 그가 왜 나에게 그토록 간곡한 우려를 계속해 왔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아예 싹을 잘라버린다’는(crush in the bud) 말과 분할통치(divide and rule)라는 말이 무척 애용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국제정치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이 지배하는 일본인 것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일부에서는 또 미국음모론이냐고 힐난할지 모르겠다. 마치 <아사히신문>이 처음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음모론으로 몰고 갔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독자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첫 서평을 철회했던 사례처럼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외무성에서 영국, 소련, 이란 대사 등과 국제정보국장 등으로 36년간 재직했던 전직 ‘자주파’ 외교관이다. 퇴임 후에는 방위대학 교수, 대학 강사, 국제문제 언론해설자, 하토야마 수상의 외교브레인 등을 역임했다.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자료를 뒷받침하여 이 책을 펴낸 것으로 그의 주장과 논증이 충분히 객관화 될 수 있다고 본다.

일본에서는 수상이 왜 그렇게 자주 바뀔까?

이 책이 확인하고 시사 및 암시해 주는 미국의 일본 예속화를 위한 음모와 공작(주로 국무성과 CIA 등)의 중요 사례를 몇 가지 선택적으로 나열해 보겠다. 이 사례는 내가 평소에 의문을 품어 왔던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수상이 왜 그렇게 자주(9개월짜리 등) 바뀔까?

왜 일본은 독도, 댜오위다오, 쿠릴열도, 류쿠 등 영유권 분쟁이 많고, 지금 이 시점에서 동아시아 영토분쟁이 더욱 촉발되는가?

지진 일등국에 핵발전소가 세계 3위가 될 정도로 그렇게 많은가?

일급 전범들이 왜 면죄부를 받고 오히려 권력의 중심에 앉았는가?

왜 아시아 중시론자 정치인은 중도에 하차하고 마는가?

다나까 수상, 거물 정치인 오자와, 대(對)북한 수교에 앞장섰던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등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무죄로 귀결되는가?

대미 추종일변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중시정책을 기치로 자민당 50여년 독재를 무너트린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이 왜 9개월 만에 하차하고, 함께 한 중국 중시론자인 오자와도 검찰의 공작에 의해 기소되었다 결국 무죄로 귀결되었지만 정치생명은 거의 끝나고 말았는가?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을 계승한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수상 등은 기존 당의 노선과 180도 회전해 친미와 종미(從美) 일색의 정책을 펼쳤나? 등등

미국의 공작과 음모에 의해 종미사회로 순치된 일본

이러한 의문들이 이 책을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더 큰 소득은 일본이 이 지경인데 한국은 어떨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 점이다.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통일과 민족자주를 위해서는 한국사회가 대미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더욱 절박하게 고민하게 했다. 한국의 정치, 군사, 외교, 학술, 언론, 경제 등의 권력들이 지금처럼 마냥 종미(從美) 일색으로 갔을 때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지를 이 책은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오늘의 일본은 미국의 공작과 음모에 의해 사회 전체가 순치되어 종미사회로 생체화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사회에 대미 자주파의 수상을 끌어내려 대미 추종파로 바꾸려는 시스템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검찰이다... 다음으로 언론이다.”

또, 그는 미국의 공작에 의해 희생되는 일본 권력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점령군 지시의 경우, 검찰 기소와 언론 띄우기 경우, 내각을 붕괴시키는 경우, 당내 반대세력을 강화시켜 축출하는 경우, 대중 동원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경우, 선거 패배 유도의 경우 등이다(370-371쪽).

이들은 주로 주일미군, 주일미군기지, 군사관련 일, 대중국 수교와 관계개선, 대북한 관계개선 등에서 미국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죄목’으로 공작의 대상이 되었다. 곧 미국에 ‘불경죄’를 저지른 탓이다.

이러한 불경죄의 범위는 1951년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앞두고 당시 미 국무장관 덜레스란 자가 그 기준을 제시한 것 같다. 그는 “미국이 일본에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만큼 주둔시킬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8쪽) 했다한다. 이게 관철된 게 바로 미·일안보조약이고, 주일미군 관련 지위협정이란다.

완전 닮은꼴이 바로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8월1일 덜레스가 체결하고 1954년에 발효시킨 한·미상호방위조약이고 이를 위한 한·미합의의사록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이 조약과 의사록에 의거한 한미동맹은 박근혜 정부에 의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자발적 의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순치된 한국?

일본은 미국의 음모와 공작에 의해 종미사회로 순치되었다면, 한국은 이승만 이후 최고위 당국자 대부분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자주적’으로 순치되고 있는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7일 미국에서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아 동맹을 ‘21세기 전략동맹’으로 격상하기 위한 3대 비전을 제시했다. 한미동맹을 ‘통일한국 주춧돌동북아협력 기둥지구촌 번영의 지붕’으로 만들겠단다.

그러나 통일의 주춧돌은 민족자주여야 하고, 동북아협력은 비동맹 중립화를 기반으로 해야 하며, 지구촌 번영은 패권구조 타파여야 가능하다는 것을 이 책은 확인해 주는 듯하다. 또 3대 비전은 비전이 아니라 민족사 파탄의 길이란 우려가 더욱 더 나의 뇌리에 꽉 차 오른다.

끝으로, 미국에 대한 자발적 예속주의자들로 가득 찬 것으로 보이는 남한의 외교국방 고위관료 중에서도 이런 종류의 책을 펴낼 수 있는 굳세고 정의감 넘치면서 자주지향적인 ‘제2의 우케루’를 기대해 본다.

이 서평은 평통사 <평화누리 통일누리>(통권 125호)와 동시게재 됩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