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포 소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일본, 중국 동포로서 한국 혹은 거주국에서의 일상과 그 삶 속에서 느끼는 문제의식, 울림, 바람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통일뉴스>는 KIN의 ‘동포 소식’을 공동 게재해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축구경기를 처음으로 본 기억이 생생하다.
1974년, 6살이 되는 해였다. 평양 4.25축구단이 일본에 와서 친선시합을 했다. 상대 일본팀에 관해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젊은 세대 선발팀이었던 것 같다. 꽉 찬 관중석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앉을 수 있게 아버지는 6살이었던 나를 무릎 위에 앉혀놓으셨다. 그렇게 많은 동포들이 모인 자리도 나에게는 생전 처음이었다. 5-0인가 6-0인가 하는 큰 차이로 4.25팀이 승리했다. 아버지 양 옆에 앉아계셨던 아저씨들도 처음부터 끝까지 웃고 소리 지르고 뭔지 정말 행복스러워 보였다. 사람들의 함성은 깊고 길었다. 시합은 내내 일본 진영에서만 벌어졌다. 하릴없이 서있던 4.25팀 골키퍼가 관중들을 웃기는 퍼포먼스를 살짝 했고 관중들을 그 모습에 열광했다.
그 모습들이 마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얼마 전, 일본 축구 프로리그가 20주년을 맞이했다. 그동안 축구 인구가 많이 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주류 스포츠는 야구다. 그런 속에서 프로리그가 생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도 야구보다 축구를 많이 하는 지역이 몇 곳 있었다. 내가 자란 사이타마(埼玉)가 그랬다. 또 오늘날에도 조선학교 주변을 중심으로 재일동포들에게 축구는 특별한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자연스럽게 축구시합을 관람하는 기회가 자주 있었고, 그때는 아직 정보가 많지 않았지만 유럽축구 정보를 찾아 축구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었다.

일본에서는 거의 무적으로 보였던 재일조선축구단의 시합도 자주 보았다. 이기는 시합을 많이 보았고 그런 날에는 아버지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조선이 8강까지 진출했을 때의 추억을 이야기 하셨다. 동포들이 소리가 툭툭 끊기는 라디오를 둘러싸고 조국의 맹활약에 가슴이 뜨거워졌고, 방송이 끊긴 사이에 역전된 포르투갈전에 경악과 실망을 금치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이야기를 하셔야만 축구 관람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처럼 꼭 그렇게 하셨다.

80년대 중반까지 남이건 북이건 일본과 국제시합을 해서 밀리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에서 조선학교와 일본학교의 축구팀들도 그와 비슷했다.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보기만 하는 나에게도 축구가 기쁨이었고 당연히 대리만족이지만 자존심을 굳혀주는 스포츠였다.

80년대 중반에 있었던 월드컵 예선 ‘조선 대 일본’ 경기를 마지막으로 한 동안 축구 관람을 끊었다. 계기가 되었던 그 시합에서 일본이 이겼다. 도쿄에서 열린 시합이었지만 관객석을 매운 사람들은 90%가 재일동포였고 조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본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은 완전히 소수자였다. 이제는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가 없지만 시합이 끝난 순간 가까운 곳에 있었던 일본사람이 기쁨을 표현하면서 조선에 대한 차별적인 말을 했다. 그랬더니 응원을 위해 긴 대나무 깃대를 들고 있던 아는 후배가 깃대로 그 사람들을 패기 시작했다. 경비원들이 뛰어왔다. 그때 뭔가가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축구 따위는 이제 안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은 피할 수가 없었지만 끝나면 또 지나갔다.

몸을 사리고 조심하면서 살았는데 아들이 초급학교에 들어간 해에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이하 ‘오사카조고’) 축구부가 일본의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한 시합 이기고 또 한 시합 이기는 사이에 오사카에서도, 대회가 열리는 도쿄에서도 동포들이 오사카조고 축구부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과도하게 흥분하지 말자고 마음에 제동을 걸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우승하게 된 야스고등학교와 승부차기로 지고 준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 화면 속에 펑펑 눈물 흘리는 아이들이 보였고 참 대견하고 고맙다는 마음만이 남았다.
그렇게 다시 축구 관람이 시작되었다.

아들이 축구를 시작하면서 월드컵보다 아들 축구가 재미있어졌다.
지금 중급2학년인 아들이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선학교 출신 프로선수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중 조선의 국가대표가 되어 월드컵에 출전한 선수까지 나왔다. 꿈은 한없이 크게 꿀 수 있지만 눈앞의 한 시합을 생각하면 길은 한없이 먼 것 같기도 하고 아예 길이 없는 것 가기도 하다. 그래도 축구가 좋은 모양이다.

조선초급축구부는 1년에 한 번 ‘꼬마축구’라고 부르는 전국대회를 연다. 아들이 4학년 때였는데, 5,6학년이 중심으로 나가는 대회지만 팀을 2개 만들기 위해 4학년생들 몇 명을 선발해서 참가시키게 되어서 우리 아들도 뽑혔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이지만 당시 아들은 가끔씩 밤에 자다가 오줌을 싸곤 했었다. 나는 아무래도 3박4일 동안 걱정이 되어 대회는 내년부터 참가하라고 말했다. 초급부부터 고급부까지 우리학교에서 계속 같이 지내는 동무들인데 한 번 이상한 별명이라도 생기면 의외로 상처가 오래 가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한 것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아들은 “오줌 싸는 것도 별명 붙혀지는 것도 다 엄마가 아니라 나이니까 엄마는 나 대신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대회에 참가했다.
그때부터 아들의 축구라는 영역에 엄마가 발을 디딜 곳이 없어졌다.

해마다 5월초 황금연휴(골든위크,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공휴일이 모여 있는 일주일_편집자주) 때에 아들이 속한 히가시오사카(東大阪)조선중급학교 축구부는 후쿠이현(福井県)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3박4일 원정을 떠난다. 그곳에 있는 호쿠리쿠(北陸)조선초중급학교에서 숙박하면서 대회에 참가한다. 올해 들어 2번째가 되는 원정이었다. 프로축구팀도 아닌데 무슨 원정이 그리 많으냐고 경제적 부담도 적지 않아 투정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 아빠는 그래도 꼭 가야된다고 하면서 감독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 히가시오사카조선중급 축구부. [사진제공 - 리명옥]

올해 호쿠리쿠학교 중급부에는 입학생이 1명이었다고 들었다. 학생수가 적어서 축구를 할 형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도 역시 축구는 동포들의 기쁨이라고 한다. 몇십년 동안 빠짐없이 이 대회에 출전하는 히가시오사카 축구부를 응원해주시는 동포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다고 한다. 그냥 축구라면 축구인구가 늘어난 일본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지만 ‘우리 축구’를 볼 기회가 따로 없어서 이 대회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한다.

공 한 번 차보지 못한 주제에 ‘우리 축구’가 뭔지 아는 척 하기가 민망하지만 다른 곳이 아닌 조선학교 축구부에서 공을 찬다면 역시 이런 기대에 보답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불쑥 생겨났다.

아들은 돌아오자마자 원정기간동안 우리팀 뒷바라지를 호쿠리쿠학교 선생님께서 해주셨다는 이야기부터 했다. 목욕까지 다 마치면 늦은 시간인데 밤마다 50명 가까운 선수들의 빨래감을 다 들고 동전세탁소(무인세탁소)를 다녀와 주셨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전국대회 8강신화의 주인공이었던 당시 오사카조고 축구부 성원이었다.

오사카를 떠나 먼 곳의 작은 조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해마다 찾아오는 후배들을 돌보아주시는 선생님이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다.
역시 축구를 떠나기가 쉽지 않나보다.


[필자 소개]
리명옥(李明玉).
재일조선인 3세. 1968년생.
현재 오사카 거주.
삼남매를 초,중,고 조선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직업은 조선어(한국어)와 일본어 프리랜스 번역과 통역.
<번역서> 재일3세 스포츠기자가 쓴『祖国と母国とフットボール』의 한글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2010.6.15 왓북)

#.[기획 연재]. <동포 소식>은 아래 사이트를 통해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KIN 홈페이지 : www.kin.or.kr <동포사회는 지금>
- 페이스북 : www.facebook.com/1999KIN

#.기고문을 게재하고자 할 경우에는, KIN(지구촌동포연대)로 전화 혹은 이메일을 통해 사전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02-706-5880 / kin2333@gmail.com)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