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수 박재원 선생(1930년생, 84세). 거점 확보를 위해 남파되었다가 1969년 부산서 피체, 1989년 대구서 출소. [사진 - 류경완]

- 1930년 1월 20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 소작농가에서 부친 박봉범, 모친 김원대 님의 4남매 중 셋째로 출생
- 영천남부국민학교 졸업, 46년 덕수상고 야간 입학
- 1950년 인민군 후퇴시 북으로 피난, 평양과 강계를 거쳐 11월 심양 도착. 인민군기술학교 입교, 자동차부대 기술 습득
- 1952년 금강산 방어전 투입
- 1958년 제대, 송림 황해제철소 배속. 9년 차이 김명숙 님과 결혼해서 쌍둥이 포함 딸 넷을 둔다. 61년 황해북도 도인민위원회 지도원.
- 1964년 당 중앙 소환, 67년 1차 남파

선생의 가까운 친척 박학득은 일제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 해방 후 출소하여 계몽운동을 펼친다. 46년 10월 영남항쟁 이후 입산하여 봉화와 팔공산 등지에서 구빨치산 투쟁을 벌였고, 전쟁 발발 후 천혜의 요새인 신불산으로 들어간다.

모두 7개 부대로 이뤄진 신불산 빨치산은 남도부(본명 하준수) 부대로 일컬어진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 소속이었다. 홍길동 부대, 추일 부대, 차마일 부대 등 7개 부대는 신불산 주요 고지들을 장악하고 배내골 일대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국군이 지리산 일대에 병력을 집중한 탓에 51년 12월 동계대공세 때에도 건재할 수 있었다.

박학득은 ‘신출귀몰하던’ 홍길동 부대를 이끌다 53년 말 토벌대에 최후를 맞았다. 빨치산의 전설이었던 동부유격대 사령관 남도부 역시 생포되어 국군의 회유로 대북방송을 하고는 총살당했다 한다.

“이 지역에 남도부 부대가 있었어요. 부대장에 남도부, 정치위원 안철, 참모장 김정수, 1대대장 김진구, 2대대장 남명근, 3대대장 홍죽송, 4대대장 윤종구, 19대대장 추일, 23대대장 홍길동, 5대대장 안철제, 직할 대대장 김진기, 동부지역 당위원장 이영섭. 이영섭 동지는 1953년 말에 나와 기요과장 동지와 저 아래 내를 건너다가 놈들의 매복에 걸려서 희생되었지요. 시신을 우리 두 사람이 산 밑에 묻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요. 그 날 이영섭 동지의 시신과 기요과장이 짊어지고 다니던 동부지역 중요 문건을 함께 독에 담아서 묻었는데 여러 번 왔으나 못 찾았어요.” (통일광장 임방규 선생의 2011년 3월 5일자 <통일뉴스> 연재 인용)

1969년 9월 재남파된 선생은 거점확보 임무 중 무리하게 접근했던 포섭 대상자의 배신으로 부산방직 앞에서 피체된다. 2심 사형이 대법에서 파기 환송되어 무기로 감형, 대구와 대전교도소에서 만 20년 복역했다.

같이 구속된 조장 송병록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4년 후배였다. 교전 중 다리 관통상을 입고 피체되어 72년 8월 14일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7.4공동성명 발표로 들뜬 유화분위기 속에서 “우리 이제 살았다. 마음 놓으라”고 덕담을 건넨 지 불과 열흘만이었다. 평생 같이 죽지 못한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체포 시 구타와 고문의 후유증을 안고 재판 후까지 손발에 수정을 차고 독방 생활을 했다. 빨갱이 가족이 된 고향 친인척들은 영천 군기지 안의 농토 출입에도 제한을 받았고 당국의 압박 속에 서로 경원하며 흩어졌다. 20대의 조카는 한 번 면회 온 후 5일 만에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1989년 12월 24일 선생은 대구교도소에서 30여 명과 함께 성탄 특사로 출소했지만 1년 후 한 해직 활동가의 일본 밀항 건에 연루되어 다시 남산으로 연행된다. 60년대 북의 교육, 보건, 농촌기계화 현황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 준 게 화근이었다. 조총련과의 관계를 추궁 받으며 무려 8개월간 불법 구금되었다가 풀려나면서 “내 죄가 뭐냐”고 따지자 자신들도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후 대구에서 생활하며 다니던 공장이 IMF 때 부도가 나고 대선에서 이회창을 지원했던 사장이 자살하는 풍상도 겪었다. 양심수후원회에서 2001년 2차 송환을 일괄 신청했지만 선생은 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곧바로 취소해 버렸다.

“긴 통일사업에 무리하게 과욕을 부리다 임무 수행에 실패했어요. 헤어질 때 열 살부터 두 살이던 네 딸에도 미안하고 창피합니다.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어요. 부인도 가능하면 생각을 안 하려 합니다.”

▲ 2013년 5월 군위 남천고택 상매댁에서 선생과 함께. [사진 - 류경완]

그간 몇 차례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고 가끔 지역 활동가, 옛 동료들과 어울리며 대구에서 구청 생활보호대상자로 지내고 있다.

“현 단계 통일은 어렵고 상당한 시간이 요구될 듯합니다. 고향 초등학교 동창들도 대부분 죽었고, 통일을 봐야 하는데 젊은 시절의 기억은 흐려져 갑니다.

‘당국의 감시와 간섭이 극심해 죽을 때까지 벙어리 노릇’ 해야 하는 고담도시, 남과 북 그리고 감옥에서 각각 20년씩 보낸 여든 넷 선생으로부터 회한과 쓸쓸함이 전해져 왔다.

(수정, 21일 09:47)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