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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근, 민족 자주의 한 길로<연재> 류경완의 모래내 일기 - 만남의 집 (19)
류경완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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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02  15: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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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수 이성근 선생(1931년생, 83세)의 2003년 금강산 관광 당시 모습. 빨치산 투쟁 중 1951년 장안산에서 피체, 1967년 출소. [사진 제공 - 이성근]

- 1931년 9월 17일 전북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서 부친 이영호, 모친 강종성 님의 4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 1950년 7월 ‘학도병출정’ 반대로 정읍농업학교 5년 중퇴
- 1950년 8월 쌍치면당 선전부에서 노동신문 주요기사 발췌하여 선전 사업
- 1950년 9월 쌍치면유격대 입대, 화선입당
- 1950년 12월말 정치군사학원인 <로령학원>에서 ‘해방 후 조선’, ‘소련공산당사’, ‘유격전술에 대하여’ 등 학습, 제1기 수료(회문산 안시내)


선생의 고향 쌍치면은 전봉준이 동료의 밀고로 체포된 곳이다. 어릴 적부터 ‘갑오전쟁 때 녹두장군이 농민군과 마을에 진주하자 겁이 난 큰어머니가 농 뒤에 숨었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다. 해방 후 봉화투쟁에 참여한 부친은 미군정청 포고령 위반으로 6개월 징역을 살았고, 같은 쌍치면 출신으로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노일환 제헌의원과 회문산 빨치산 번개병단장 장성구 씨의 정치적 영향도 자연스레 받게 된다.

   
▲ 1998년 유격전적지 답사 중 덕유산 망봉(1046 고지)에서. 방준표 전북도당위원장이 1954년 1월 18일 국군 5사단과 전투 중 전사한 곳이라 한다. [사진 제공 - 이성근]

   
▲ 뱀사골 반선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석실 동굴의 투보 안내판. <투보>는 남원군유격대 사령부 기관지로, 닥종이로 만들었다 한다. [사진 제공 - 이성근]

   
▲ 현재는 주차장으로 변한 로령학원 터. 1950년 순창 회문산 안시내 골짜기에 있었던 빨치산 정치군사학원. [사진 제공 - 이성근]

   
▲ 2004년 유격전적지 답사 중 심마니능선 뱀사골 입구에서. [사진 제공 - 이성근]

   
▲ 반야봉 북쪽 심마니능선에 있는 ‘달궁 느티나무 터’에서 통일광장 동지들과 함께. 정령치와 반야봉, 노고단과 산내면 등 사방으로 통하는 천혜의 요충지였다 한다. [사진 - 류경완]

   
▲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소재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의 생가터. 일제 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 <조선말큰사전>을 편찬한다. 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고 평양에 남아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조평통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사진 제공 - 이성근]

1951년 1월 초 회문산 전북유격대사령부 보위병단에 배속된 선생은 3월부터 토벌대의 공세를 피해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운장산과 덕유산으로 넘어갔다. 그 와중에 ‘나중에 평양에 가면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하도록 추천해주겠다’던 존경하는 스승 김규락 문화부장이 전사한다.

소속부대가 해체되면서 개편된 5.1병단과 함께 지리산으로 갔다가 다시 남원으로 옮긴 1951년 12월 1일, 3만 명이 동원된 백선엽 사단의 지리산 포위작전이 벌어진다. 동계 대공세였다. 지리산을 내주고 간신히 장안산으로 탈출하지만 20일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밤엔 행군하고 낮에 전투를 벌이다 백운산 골짜기에서 부대가 몰살당한다.

“여섯 명이 살아남았는데 도망치다 눈 쌓인 계곡 바위 틈에 함께 숨었죠. 그러다 한 명이 얼어 죽고 실탄도 떨어져 그냥 있으면 동사, 아사할 것 같아 두 조로 나눠 마을에 내려갔다가 12월 31일 모두 잡혔습니다.”

   
▲ '회문산 투구봉 밑 아지트 터에서. [사진제공 - 이성근]

   
▲ 2003년 6월 <명지목 역사기행>에서 통일광장 류기진, 임방규 선생, 사월혁명회, 청년학생 등 40여 명과 함께 선생이 52년 전 붙잡힌 장안산의 정상에 올랐다. 동행한 양희철(왼쪽 끝, 당시 70세. 인근 장수 계남면 가곡리 출신으로 1963년 ‘고려대 지하당 사건’으로 37년 복역했다._필자 주) 선생이 “여기는 우리 뒷동산이다. 유격대가 한 마리 소 대신에 써 주고 간 인수증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유격대에 보낼 쌀을 지고 지지골을 거쳐 오르던 기억이 새롭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사진 제공 - 이성근]

장수에서 남원을 거쳐 광주포로수용소로 보내진 선생은 처음엔 전쟁포로 송환대상자였는데 나중에 미군포로와 교환할 숫자를 맞추기 위해 민간 폭도 신분으로 바뀐다. 이후 전주지법에서 교전행위가 아닌 살인, 방화, 강도 혐의로 재판을 받고 1심에서 어린 나이가 감안되어 15년형이 선고된다. 그 때까지 안 죽고 살아 있는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고 한다.

광주형무소에서 선생은 북의 <농민신문> 주필 출신 김규호 씨를 만난다.
“그분의 지도 아래 150여 명이 일사불란하게 조직 생활을 했어요. 특별한 기념일에는 정치보고와 시 발표, 연극 공연 등도 했지요.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 1960년대에 위장병으로 옥사했어요. 밥을 500~600번 씹어야 비로소 넘길 수 있을 만큼 위가 안 좋았는데 전향시키려 당국은 약도 끊었죠."

10년 넘게 시간이 흐르면서 살아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선생은 밖에서 할 일을 준비하며 의술을 배운다. 1967년 7월 대전에서 출소, 김제 후생의원에서 이봉기 원장 조수로 일하게 된다. 이듬해 열한 살 차이 나던 전남방직 노동자 한덕순 님과 결혼해서 남매를 둔다. 주변 사람들이 왜 빨갱이에게 시집가느냐고 말릴 때 부인은 ‘똑똑한 사람들이 형무소 살지 않느냐‘며 선생을 옹호했다고 한다.

1975년 초헌법적인 사회안전법이 시행되면서 남쪽에 연고가 없던 대부분의 장기수들이 재판도 없이 다시 끌려가 십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다행히 선생은 지관 일을 하던 부친이 묘자리를 봐준 군수와 병원 원장의 보증 덕에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재구금은 면할 수 있었다. 84년 병원이 문을 닫자 서울로 올라와 독서실 운영, 빌딩 경비 등으로 일했다.

숨죽이고 지내던 선생은 1993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회의’에 들어가면서 옛 동지들을 만나고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한다. 30~40년 옥고를 치른 다른 선생들에 비해 너무 편하게 살았다고, 가슴 속엔 늘 미안함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6.15 우리 민족끼리의 시대, 범민련 감사를 맡고 유격전적지 기행을 통한 역사 복원과 민족어의 통일적 발전을 위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

   
▲ 2003년 12월 이라크전 파병저지 국회 앞 농성장에서. [사진 제공 - 이성근]

   
▲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폐지 국회 앞 단식농성장에서. [사진 제공 - 이성근]

   
▲ 2009년 범민련 남측본부 제 10기 감사보고 중인 선생. [사진 제공 - 이성근]

   
▲ 2008년 11월 6.15공동선언 10.4선언 이행촉구 시국농성장에서. [사진 제공 - 이성근]

   
▲ ‘남북공동의학연구’를 위한 선생의 시신기증등록증(1996년). [사진 제공 - 이성근]

   
▲ 2011년 12월 위암으로 절제 수술 후 한양대병원에서. [사진 제공 - 이성근]

“송환 얘기를 많이 하는데 나는 남아서 할 일이 있어요. 민족 문제가 끝날 때까지 일해야 겠지요... 장기수로 인정받는 건 좋지만 과거의 권위로 살아선 안 돼요. 6.15 선언 이후의 정세에 맞는 활동 속에서 새로운 권위를 창조해 내야지요.”
“북과 남의 내왕이 자유로워지면 김일성대학에서 문학,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고 싶어요. 통일광장 선생님들 건강도 돌봐야 하고, 통일에 대한 이론과 철학을 다루는 전문 잡지를 만들고 싶어요. 이런 일들을 통해 시대에 뒤지지 않고 한 걸음 앞서는 준비를 나 스스로 하고 싶어요.” (2001년 9월 <민족 21>과의 대담에서)

통일의 기대와 의욕으로 들뜨던 한반도의 분위기는 12년이 흐른 지금 전쟁 접경으로 치닫고 있다. 그 사이 여든 세 살의 선생 역시 담낭과 위 절제 수술을 받고, 범민련 활동으로 경찰 수사를 받으며 여윈 몸으로 투병 중이다.

“북미 핵전 가능성이 위험 계선을 넘었어요. 북은 1급전투근무태세인데 남쪽은 사재기도 없이 너무 조용합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대화와 평화적 방법이 사라지고 금강산에 이어 개성공단을 통한 민족 협력까지 막혀 가슴 아픕니다.”


이현상, 내 마음속의 빗점골
                                                   이원규

내 마음속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사람
성큼성큼 검은 산으로 들어간 산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검은 산 지리산
그 아래 아카시아 뿌리 내린 돌무덤속
하얀 발가락 마디마다 꿈꾸는 별
절망하거나 다시 절망할 때
혁명의 날개를 잃어 가 닿을 수 없는 독백들이
끝내 바둥거리다 곤두박질 치는 지점마다
지고 또 피는 홀아비바람꽃들
고단한 분단 반세기의 표류 속에서 끝내
서러운 꿈 하나 낚아 올릴 수 없는 밤
별의 꼬리를 부여잡고 한없이 꿈틀대며 승천하는
내 남루한 기억 속의 빨치산

지금 여기는 어디 쯤인가
언제나 혁명을 꿈꾸면서도
지순한 노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지금
눈물 속으로 다시 눈물이 고여 오고
허물을 벗겨 보면 다시 허물이 도사리는
지금 여기는 어디 쯤인가
곳곳에 하나씩의 비밀 아지트를 남겨 두고
모두들 살해당한 지리산 빗점골
그곳에서 나는 무련, 그대를 만난다

도리어 새장 밖으로 갇혀 있는 세상을 위해
새장 속의 새는 결정적으로 날개를 버린다
무덤 밖으로 묻혀 있는 세상을 대신해
잠들지 못하는 주검의 두 눈에도
마침내 눈물이 흐른다

비틀거리는 나의 그림자를 밟으며 바짝 뒤따르는
음울한 바람의 눈초리
그대 21세기의 꿈은 새로워지는가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하늘은
이내 무너져 내리고 내 회상의 지리산 빗점골
어느 모퉁이엔가 웅크리고 앉은 산사람이
더 깊이 고개 숙이는 늦가을 저녁 무렵

뜨거운 나의 이마를 떠나
끝없이 질주하는 한줄기 별빛
나는 정녕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나는 정녕 나의 목소리를 들어보는가

여태 매듭 하나 풀지 못한 예지의 더듬이를 보듬고
여백으로 비워둔 내 오랜 잠의 속살
그 속으로 수많은 잔뿌리를 내리며
먼저 나무처럼 굳게 서는 법을 배우며
뒤늦게 빨치산 위령제를 올린다
그대 산사람의 타는 듯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한국 현대사의 하루를 돌아보며
오늘도 내 심장의 자물쇠를 잠근다 열쇠를 버린다

산 너머 산이 있고
바람의 끝에서 다시 바람이 분다

(추가2.수정2, 6일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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