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포 소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일본, 중국 동포로서 한국 혹은 거주국에서의 일상과 그 삶 속에서 느끼는 문제의식, 울림, 바람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통일뉴스>는 KIN의 ‘동포 소식’을 공동 게재해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연재를 시작하면서]

2012년 3월 26일 저녁 7시,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 조그마한 레스토랑 한켠에서 잔치상을 차리느라 분주하다. 오늘은 조 따냐의 60번째 생일. 그래서 가족들과 친한 친구 몇 명을 초대해 조촐하게나마 환갑연을 연다. 보통 사할린한인들은 호텔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환갑잔치를 한다. 200평은 족히 될듯한 넓은 홀에서도 어깨를 좁히고 앉아야 할 만큼 많은 사람들로 꽈-악 찬다. 청첩장 같은 건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알고 찾아들 오는지... 늘 150~200명 이상은 모인다. 잔치상은 또 얼마나 풍성한가! 음식이 30가지 이상은 되는 듯하다. 접시를 겹쳐 놓아야 할 정도니깐. 이렇게 성대하고 떠들썩한 게 사할린한인들 환갑잔치다. 이와 비교하면 따냐의 환갑잔치는 보통 생일잔치 수준이다.

▲ 어느 한인2세의 환갑 잔치상. [사진제공 - 남혜경]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대?”, “조카들도 오지 말라고 했다는데 뭘.. 자기 식구들 다 부르면 이 50개 자리로도 모자르지...”, “아들 생각하면 잔치할 맘도 없겠지...”. 형제들, 친구들이 이렇게 쑥떡거리고 있는데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위를 살짝 살려 세우고, 반짝반짝 광택 스프레이까지 뿌린 숏커트에, 소매 없는 검정색 원피스. 며칠을 앓아 누운 탓인지 얼굴엔 핏기가 없고 더 야위었지만 창백한 얼굴이 조명 아래서는 청순함을 자아낸다. 다소 긴장된 표정과 슬픈 미소. 귀여우면서 우아한 느낌이 마치 중년의 오드리 햅번 같다. “우와~, 우리 처제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네. 내가 본 중에서 오늘이 최-고-로 예쁘다!” 하며 로쟈 남편이 너스레를 떤다.

‘ㄷ’자 모양으로 놓아진 좌석의 중앙에 남편 왈레라와 따냐가 나란히 앉는다. 제일 먼저 사위 알료샤가 60송이의 붉은 장미 꽃다발을 장모의 가슴에 안긴다. 이 때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빠즈드라브랴-유!(축하합니다)”라고 소리친다.

이 때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됐다. 1시간에 200달러 주고 악사를 불렀단다. 한인들 잔치에서는 처음이다. 카프카스 지방 출신인지 피부가 좀 검은 거구의 중년 남자가 장난감 같은 전자바이올린을 목에 끼고선 신명나게 연주를 한다. 샤갈이 그린 러시아 유대인들의 결혼 잔치 풍경을 연상시킨다. 음악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는 것이 춤. 모두들 가운데로 나와 신나게 춤을 춘다. 어깨 춤을 추는 사람, 발을 차며 팔짝팔짝 뛰는 사람, 허리와 엉덩이를 형식 없이 마구 흔들어대는 사람. 이렇게 춤도 가지각색. 그저 흥이 나는 대로 몸을 흔들어댄다. 때때로 왈츠곡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 부부가 껴안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짓궂은 친구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서는 “고~르까! 고~르까!(쓰다! 쓰다!)” 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키스의 달콤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따냐는 ‘못말려!’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싫지 않은 듯 남편 볼에 입을 맞춘다.

▲ 하객 모두가 한데 어울리는 환갑잔치 모습. [사진제공 - 남혜경]

바이올린 연주자가 내려오자 한인 잔치에 빠지지 않는 디스코 타임이다. 젊은 남녀 한 쌍이 무대에 올라가 쉬지 않고 댄스곡을 부른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추고... 이를 밤새도록 반복한다.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흔들고 또 흔들고. 큰 음악 소리에 뒤지지 않으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목이 쉬고 몸은 파김치가 되도록 신나게 논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이 정도로 지치면 판을 접는다.

이렇게 놀아야 ‘좋은 잔치였다!’ 하는 소리를 듣는다. 차린 사람을 위해서, 와 준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잔치’가 되도록 서로가 무척 애를 쓴다. 친한 친구들은 보통 흥을 돋구는 역할을 맡는다. 사람들이 마음껏 마시고 취하도록 부지런히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잔에 술을 붓는다. 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질질 끌어서라도 춤 판으로 끌어들인다. 따냐의 잔치도 규모는 조촐하지만 여는 집 잔치 못지않게 흥겹고 떠들썩하게 치러졌다.

상 위에는 보통 한인들 잔치와는 달리 일식과 러시아식 요리가 올라와 있다. 스시류, 사시미, 샐러드, 훈제 연어 등. 앙꼬떡(팥이 들어간 찹살떡)과 과줄(쌀가구로 만든 전통 튀김 과자)이 한인 잔치 음식 대표로 올라와 있다. 술은 일본제 아이스 보드카와 코냑.X.O. 요즘 좀 산다는 사할린한인들 잔치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일본제 아니면 인천 면세점 술이다. 홋카이도를 오가는 배꾼들에게 부탁하거나 한국을 드나들며 준비해 둔 술들인데 비싼 술을 소주처럼 들이킨다. ‘잔치’를 가문의 명예를 건 대사로 치기 때문에 통 크게 쓴다. “역시 따냐는 따냐야. 이 요리 좀 봐. 전부 비싼 것들만 주문했잖아.” 친구들은 탄복해 하면서 이것저것 맛보기에 바쁘다.

그렇다. 따냐는 늘 주위로부터 ‘좀 다르다’라는 말을 듣고 산다.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식을 고집하는 사람이다. 조촐하지만 고급스러운 잔치가 그녀의 콘셉이었다. 치장도 않고 다니는 그녀를 보고 주위에서는 이렇게 쑤군쑤군거린다. “따냐는 왜 매일 저렇게 하고 다녀? 어떤 때는 내가 좀 부끄러워.”

남학생처럼 짧게 깎은 머리, 크림도 안 바른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 등에는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래 된 붉은색 배낭을 매고, 고개를 쭈욱~ 앞으로 빼고 어딘가를 서둘러 가는 모습. 따냐는 늘 이런 모습으로 병원, 유치원, 시장 등을 헤매며 물건을 판다. 1코페이카(러시아 통화 1루블=100코페이카)라도 이문이 있으면 열 걸음 마다 않고 뛰어가는 그녀. 이런 따냐가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톡, 멀리 불가리아 휴양지에, 여기저기에 부동산을 가진 알부자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질투 섞인 핀잔을 던지면서도 한편 존경스럽게 여긴다.

바로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데도 직장에 나가듯이 치장을 하는 러시아이들. 먹고 입고 치장하는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러시아인들. 이들과 수 십년을 함께 해 온 한인들 역시 외출시 옷차림에 무척 신경을 쓴다. 그런데 따냐는 전혀 이런 데 개의치 않는다.

“내 지갑만 두둑하면 기죽을 일 없다”고 딱잘라 말한다. 오히려 자신은 구차하게 차려입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란다. 잘 입고 물건 팔러 가면 심술 많은 러시아인들이 ‘이 까레얀까(코리안 여자)가 우리 덕에 돈을 벌어서 잘 차려 입고 다니는군’ 하고 질투를 한단다.

지금부터 이런 ‘사할린의 또순이, 사할린의 장돌뱅이’- 조쨔 따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녀와 그 가족들이 살아 온 세월은 사할린한인들의 과거와 다름이 없고, 그 안에는 슬픔과 기쁨, 웃음 그리고 그 저변에 흐르는 강한 생명력이 있다.


[필자 소개]
남혜경. 1964년생.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졸업.
오오사카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교육학)
최근 다년 간 구소련지역 한인사회 연구.
2006년 가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파견교수로 사할린국립대학 한국어과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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