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전쟁이 빨리 끝나게 되자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을 방도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것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하는 것이었습니다. 8월 13일 급하게 마련한 미국의 제안을 소련이 이의 없이 받아들이자 미국은 8월 15일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태평양지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일반명령 제1호`로 전달했습니다. 맥아더는 9월 2일 일본의 항복 공식서명과 함께 포고했습니다. 38도선 이북의 일본군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군은 9월 8일 서울에 진주하게 됩니다. 이로써 미소에 의한 남북의 분할 점령은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소련군이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미군보다는 훨씬 빨랐습니다. 그것은 소련군이 8월 8일 대일전에 참전한 순간 한반도 북단이 이미 소련군의 군사작전 반경에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8월 9일 오백룡이 지휘하는 항일빨치산 부대도 함께 참전한 가운데 소련군은 한반도 최북단 웅기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만주와 북한 지역을 석권했습니다.

8월 13일에는 함경북도 도청 소재지인 청진을 공략했고, 8월 20일에는 원산에 상륙했으며 8월 24일에는 첫 선발대가 평양에 들어왔습니다. 8월 26일에는 소련군 본대가 평양에 들어와 사령부를 설치했으며, 8월 25일에는 해주, 8월 29일에는 신의주를 소련군이 장악함으로써 8월말까지 38선 이북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물리적으로 장악한다는 소련군의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됩니다.

그런데 소련군의 목표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에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스탈린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스탈린은 소련군의 북한 점령 목적과 임무를 "일본군을 섬멸하여 일본 침략주의자들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키고, 조선 민족에게 민족 독립을 회복해 독자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련군의 목표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군사적 목적만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는 정치적 목적까지 갖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런 점은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포고문 [조선 인민에게]에서도 어느 정도는 드러납니다.
포고문은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인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마련해 놓았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붉은 군대 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인 작업을 보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38선 이남에 주둔하게 되는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맥아더의 포고문은 "일본 천황의 명령으로 그를 대표해 일본군 정부와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 내용에 의해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미국)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태평양 방면 미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해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여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라고 해서 `점령군`으로서의 위엄을 한껏 과시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련군의 포고문은 조선인민의 창조적인 노력과 붉은 군대의 우호적인 지원을 말함으로써 소련군이 `해방군`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셈입니다. 그러나 포고문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지요.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소련군이 사령부를 설치한 8월 27일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일본 현지 간부들을 모아놓고 "일본 정부의 소멸, 모든 일본인 관의 퇴직, 일본군의 포로 대우, 그리고 모든 민간인 총기의 몰수"를 선언했습니다. 이어 정권을 조만식이 위원장으로 있던 평남 인민정치위원회에 이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에는 조선 인민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인민위원회, 치안대, 자위대 등이 조직되는데 소련군은 이들 민중조직을 인정하고 지원하면서 개편하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이점은 남한에서 미군의 정책과는 상당히 판이합니다. 소련군보다 늦게 남한 지역에 진주한 미군은 당시 여운형이 이끌고 있던 인민공화국(약칭 인공,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전된 조직)을 전면 부정합니다. 나아가 지방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 각종 지역 민중조직들을 파괴하면서 미군이 직접 장악 통치하는 군정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고 다시 등용했습니다. 특히 일제 시대 민중의 원성 대상이었던 악질 친일 경찰과 일본군, 만주군 출신의 친일 군인들을 주축으로 경찰조직과 군대를 강화합니다. 이는 인민위원회와 공산당, 인민당 등의 좌익들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남한에서는 친일파가 `반공 애국자`로 부활하고 식민지 시대 항일전선에 섰던 좌익들은 `빨갱이`로 매도되어 탄압받게 됩니다.

물론 북한에서 소련군이라고 인민위원회를 간접 지원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북의 경우 함경도 지방은 일제시대 항일빨치산과 좌익노조·농조 운동의 영향으로 좌익세력이 강세였던 반면, 평안도 지방은 조만식 등 기독교세력과 우익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황해도는 좌우세력이 비등했고요. 그러다 보니 해방직후 만들어진 민중조직들도 지역에 따라 주도세력이 달랐습니다. 물론 좌우익간에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이때 소련군은 좌익이 강한 곳에서는 그 상태를 방조하고, 우익이 강한 곳에서는 개입해 좌우의 힘이 균등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분쟁이 일어난 곳에서는 소련군이 사태를 조정한다는 구실 아래 개입해 좌익이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결국 소련군도 모든 정치세력에 대해 공평했던 것은 아닙니다. 친일파에게 저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결코 나쁘게 볼 일이 아니지만, 우익 민족주의 세력은 누르고 좌익세력을 지원한 것은 반드시 옳은 처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련군도, 남한에서 미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북한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정치질서를 재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소련군도 순수한 의미에서 `해방군`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친일파 청산이라든가 인민위원회에 대한 정책 등에서 미국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소련군도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물리적 보루였던 셈이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는 미·소 양군의 분할 점령으로 해방과 함께 분단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리고 미·소 양군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남북의 정치질서를 새롭게 재편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강대국 패권주의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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