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포 소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일본, 중국 동포로서 한국 혹은 거주국에서의 일상과 그 삶 속에서 느끼는 문제의식, 울림, 바람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통일뉴스>는 KIN의 ‘동포 소식’을 공동 게재해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3월 세 번째 일요일에 막내딸이 다니는 히가시오사까(東大阪)조선초급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큰딸도 아들도 이 학교를 졸업했다.

조선학교에는 대개 ‘어머니회’라는 엄마들의 단체가 있어서 학교 재정을 돕기 위한 바자회, 아이들을 위한 급식 그리고 학교 미화를 위한 일 등 무슨 일이든 다 맡아한다. 우리학교에서는 아이 하나에 유치원 때 한 번, 초급학교에서 한 번꼴로 임원을 맡는다.

나는 아이가 셋이니까 모두 6번 임원을 맡아야 한다. 막내딸이 4학년 때 내가 맡아야 할 횟수를 다 채웠는데 나름 고참이라 어쩌다가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부회장이 되니까 학교를 찾아가는 일이 부쩍 늘고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지내는 일상도 곁에서 지켜보는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바쁜 1년이 후딱 지나갔고 부회장으로서 맡은 마지막 일은 소식지의 발행과 졸업식이 끝난 뒤 열리는 졸업생과 선생님, 부모님들이 함께 하는 축하모임의 사회를 보는 일이었다.

1년을 매듭짓는 마지막 소식지에는 엄마들의 글을 많이 싣는다. 이번에 졸업하는 엄마들의 글 몇 개를 타자 작업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한 엄마는 12년간의 학부모생활을 보냈는데 본인은 일본사람이다. 지금 재일동포의 80%이상이 일본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조선학교에도 적지 않은 일본인 엄마들이 학부모로서 또 어머니회 회원으로서 함께 하고 있다.

글을 써준 엄마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며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 과거를 알고 미래에 그 경험을 살리는 일, 자신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를 터득하는 일, 소수자가 서로 돕고 힘을 모으는 일, 하루하루 웃고 즐겁게 사는 일, 그리고 가족. 이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이를 조선학교에 보내면서 배웠다고 썼다.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자는 말에 정말 깊이 공감했다.

또 다른 엄마는 일본학교를 나온 엄마였다. 선배 어머니들, 같은 지역에 사는 어머니들이 마음 써주고 말을 걸어주고 이끌어주어서 12년간의 학부모 생활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조선학교 출신자가 대부분인 조선학교 학부모들 속에서 조선학교의 어쩌면 독특한 문화가 낯설고 우리말도 배운 적이 없어서 고생했던 첫 시기의 불안한 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고마웠고 늘 열린 우리학교로 있고 싶다는 바람을 새삼 가지게 되었다.

우리학교는 전교생과 학부모들이 같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강당이 없어서 졸업식은 졸업하는 6학년생과 그 학부모들, 그리고 졸업생들을 보내기 위해 5학년생들만이 참가한다. 부회장이 아니었더라면 참가하지 못하는 졸업식이었다. 아이들 둘을 졸업시켰지만 올해 졸업생들처럼 많이 운 아이들은 보지 못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증서를 수여하시고 옆에 계신 담임선생님이 꽃 한 송이씩을 주면서 또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잡아주었다.

이어서 졸업생들이 차례로 마이크 앞에 서서 1,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한 마디씩 인사를 드렸다. 1,2학년 담임을 맡으신 분은 홍금순 선생님이었고,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선생님이셨다. 날씬한 몸매에 연세를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 피부도 고운 분이셨다. 우리 아이들이 저학년 시절 학교 버스를 타고 다닐 때, 학교에서 제일 먼 우리 집에 제일 먼저 아이들을 태우러 와주는 버스에 한 번쯤 타셨다.

우리 막내는 아침마다 울다가도 마음에 든 그림책을 들고 가자고 달래주면 울음을 그치고 버스를 탔다. 홍 선생님은 자연스럽게 “무슨 책 가져왔니?” 하시면서 달리는 버스 칸에서 책을 읽어주셨다. 1학년이나 2학년 어린 학생들을 늘 맡으셨고 처음으로 우리말을 배우는 아이들이 발음을 정확하게 익힐 수 있도록 지나칠 정도로 입 모양을 의식시키셨다. 고학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면서 놀려대기도 했었다.

졸업생들이 2학년이었던 해 2월 학예회 당일이었다. 버스 당번이셨던 선생님께 “잘 부탁합니다”라고 드린 인사가 마지막이 되었다. 홍 선생님은 그날 학예회 예행연습 중에 아이들 옆에서 쓰러지시고 의식을 되찾지 못하신 채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거미막하출혈이었다고 들었다. 의식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선생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들은 편지를 쓰고 종이학을 접었다. 장례식에서도 아이들은 울었고 화장장으로 가는 운구차가 학교 앞을 지나갈 때에도 눈물 바다였다.

그리고는 오래 교원을 하고 교장까지 경험한 다음 퇴직해서 학교 운영을 책임지시는 교육회장으로 계셨던 선생님께서 급하게 임시 담임을 맡으셨다. 손자 돌보듯이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계셨다.

유가족분들이 조의금으로 학교의 모든 책걸상을 새로 해주셨다. 졸업생들은 선생님께 “우리말을 가르쳐주셔서 고맙다”고, “책걸상 새로 주셔서 고맙다”고 “힘들 때 격려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선생님 계속 지켜봐 주십시오”라고 말하던 아이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선생님의 눈길과 손길을 자주 느낄 것이다.

졸업식이 끝난 뒤 내가 사회를 맡은 축하모임은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한테 직접 만든 표창장을 주었고 아이들이 부모님께 쓴 편지를 읽었다. 워낙에 야무지고 패기만만하고 그러면서 감수성도 풍부한 아이들이 모인 학년이었던 것 같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크게 벌여놓은 인상이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사고 치기도 한 이야기는 내게도 들려왔었다. 그러나 많은 아이가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속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엄마 우리학교에 저를 보내주시고 사랑하는 동무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나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큰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졸업반 담임은 큰딸이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다. 옛날에는 팔팔한 새신랑이었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꽃을 주고 악수하면서부터 얼마나 울었지 모른다고 했더니 큰딸은 신기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여태까지 몰랐던 당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큰딸이 초급학교 시절에도 사고뭉치에 말썽꾸러기고 어리광도 나름 피우면서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크게 벌여 놓고서는 선생님께 고생을 끼쳐드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학생 Y가 무슨 일로 선생님 앞에 서서 꾸지람을 듣고 있는데 그 아이가 영 딴 데를 쳐다보면서 살짝 발을 떨기 시작했고 그래도 모자라서 혀를 찰 것 같았다. 처음에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 선생님도 Y도 서로 물러설 수가 없어서 긴장이 더해갔다. 모두 조마조마했고 여학생들은 눈물이 글썽하기까지 했는데 급기야는 선생님께서 주먹을 불끈 쥐셨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Y가 맞을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고 교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Y와 반대편 칠판을 탁 치신 것이다. 선생님 주먹 끝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모두 철렁했다. 평소 장난만 치고 다니는 남학생 둘이 교원실에 뛰어가서 반창고를 가지고 와서 선생님께 드렸고 선생님은 흠칫 놀라시고 그렇게 어느새 모두 풀렸다고 했다.

세월은 선생님에게도 어김없이 흘러갔다. 큰딸이 그날 청소시간에 칠판을 살펴보니까 분필 가루가 다 떨어져서 새 칠판처럼 깨끗해져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학교 칠판은 분필이 잘 먹게 표면이 거슬거슬해서 칠판지우개로 지워도 가루가 엷게 남는다. 그런데 그날 선생님의 피의 대가로 칠판이 거듭났다고 박장대소한다.

그날 눈물 글썽이던 내 딸도 이 봄에 고3이 되고, 나는 조선학교 학부모 경력 15년째를 맞이한다.

# [필자 소개]
리명옥(李明玉)
재일조선인 3세. 1968년생.
현재 오사카 거주.
삼남매를 초,중,고 조선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직업은 조선어(한국어)와 일본어 프리랜스 번역과 통역.
[번역서] 재일3세 스포츠기자가 쓴『祖國と母國とフットボ?ル』의 한글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2010.6.15 왓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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