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는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포 소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일본, 중국 동포로서 한국 혹은 거주국에서의 일상과 그 삶 속에서 느끼는 문제의식, 울림, 바람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통일뉴스>는 KIN의 ‘동포 소식’을 공동 게재해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일제 식민지 시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대가 일본으로 건너오셨다. 어쩌다가 이곳에 정착했고 결과적으로 내가 재일 3세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나의 기억이 시작하는 곳은 도쿄에 인접한 사이타마라는 지역에 있는 조선유치원이다. 내가 만으로 3살, 언니가 5살이 되는 해였고 남동생은 돌도 맞기 전이었다.

사이타마에 사는 동포들은 우리 유치원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40년 전의 일이다. 어떤 동포 할아버지가 땅을 사셨다. 재일동포의 삶을 담은 작품을 쓰시는 소설가의 사모님이 원장을 맡으셨다. 과거에 "선생님"이란 일을 해본 사람들을 찾았다. 유치원 경영을 해본 사람도 없고 유치원 선생님을 해본 사람도 없었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교토에서 사이타마에 옮겨 살게 되었지만 우리 어머니도 교토에서는 조선학교 교사를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히 사이타마 유치원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빨간 지붕을 이고 기다랗게 자리한 건물 한쪽 끝에 교원실과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냉장고가 은빛을 발하면서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공간을 사람들은 "정지깐"이라고 불렀다. 유치원 실무를 거의 책임지다시피 일하시던 우리 어머니 때문이었으리라. 외할머니의 울산말은 특히 부엌세간에 대해서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개원준비를 하는 동안부터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매일 유치원에 출근하셨다. 자전거 앞에 걸어놓은 의자에 내가 타고 동생을 업은 어머니가 페달을 밟는 뒷자리에 앉은 언니가 뒤에서 동생 등짝에 볼을 대는 자세로 앉았다. 서커스같은 같은 출근길은 1년쯤 계속되었다. 다음 해 개원을 앞두고 어른들은 누구나 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처럼 어린 아이를 데리고 출근하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고 아이들끼리는 긴 시간을 같이 놀았다.

뿌리를 새끼로 감싸놓은 어린 나무들이 심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쁜 색깔의 철 기둥만 보면 그네가 달리는 날이 기대되어 마음이 부풀었다.

유치원에는 조그만 살림집이 붙어있었고 그 집에 사시는 내외분이 유치원 시설 관리와 수위를 겸한 일을 맡으셨다. 아저씨 성함은 김대중이었다. 나중에 한국 대통령이 되시는 동명이인이 일본에서 납치된 사건을 뉴스로 봤을 때에도 "우리 유치원 아저씨랑 이름 똑같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주머니는 일본분이셨는데 매운 음식도 아저씨 식성에 맞게 잘 만드셨고 우리를 친손자들처럼 아껴주셨다.

아주머니가 일본사람이란 것을 안 것은 다 크고 난 다음이었다. 일본에서는 재일동포들은 소수자이고 나처럼 조선학교나 또 다른 민족교육을 받은 사람 또한 소수자속의 소수자이고 유치원부터 다녔던 사람은 또 그 속의 소수자이다.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고 거기가 내가 사는 세상의 전부였다.

유치원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운영도 하는 일에 30대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 아버지도 늘 바쁘게 일을 하셔서 안 계실 때가 많았고 어머니는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밤늦도록 들어오지 못하셨다. 그래도 많이 굶지 않고 외롭지도 않고 초라하지도 않았던 것은 형제가 함께 있었고 주변에서 늘 도와주는 분들이 계셨고 부모님께서 무슨 일을 그리도 열심히 하시는지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일까 싶다.

어머니는 그때를 생각하면 어린 우리들이 고생 많이 했다고 가슴 아파하시곤 한다. 그리고 유치원 김대중아저씨가 기르던 개에 대한 고마움을 자주 말씀하신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머니를 따라 꼬박 6년간을 유치원에서 지낸 남동생 곁에는 늘 그 개가 있었다. 기저귀만 갈아주고 모유병만 들게 해놓고선 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를 대신해서 남동생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니고 이제 막 걸음마를 뗄 때에도 곁을 지켜줬던 그 착한 개 이름은 희한하게도 "에미"였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돌아보니까 남동생이 모유병으로 "에미"와 우유를 나누어 마시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어머니 표정에는 고마움과 그리움만이 묻어난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남동생도 인정하지만 아기와 개가 우유를 나누어 마시는걸 그냥 두는 것은 완전히 우리 어머니답지 않은 행동이다. 오죽하면 칠순 넘으신 오늘까지 개한테 고마워하실까. 일본 여러 곳에 있는 조선학교 주변에는 우리학교를 지켜왔던 숱한 사람들의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 재일 2세들은 식민지시기를 겪었거나 그와 연속되는 시간을 사신 경험 때문에 아이들 키울 때에 걱정을 많이 하셨다. 학교 다닐 때에 어머니가 자주 하신 말씀이 " 네가 뭔가 잘못해도 일본사람들은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시 조선사람 못됐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늘 행동 조심해야 돼." 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들이 만들어주시고 우리가 다닌 유치원에서는 "내 잘못"은 순수 "내 잘못"일 뿐이었다. 지금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 또 일본에 배타적인 분위기가 점점 짙어지는 가운데 그런 환경의 고마움을 새삼스레 느끼는 중이다.

[필자 소개]

리명옥(李明玉)
재일조선인 3세. 1968년생.
현재 오사카 거주.
삼남매를 초,중,고 조선학교에 보내는 학부모.
직업은 조선어(한국어)와 일본어 프리랜스 번역과 통역.
[번역서] 재일3세 스포츠기자가 쓴『祖国と母国とフットボール』의 한글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2010.6.15 왓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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