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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동상과 통일동산
유영호의 '민통선-DMZ' 통일맞이 나들이 ⑤
2007년 12월 17일 (월) 12:02:51 유영호 tongil@tongilnews.com
유영호('통일맞이 나들이 - 하나를 위하여' 대표)


최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북미관계는 종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 통일정세가 무척 긍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통일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지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기행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큰 통일기행은 상호 자유로운 방문일 것이지만 아직은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기에 일단 남쪽 땅에서 통일기행으로 가장 많이 찾는 파주 일대의 민통선-DMZ 권역을 이번 기행지로 선택하였다.

출발지로는 이러한 통일환경 조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2000년 6.15공동선언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김대중도서관>을 선택하였고, 이렇게 시작되는 통일기행은 자유로를 이용하여 통일동산과 임진각을 둘러보고 민통선 내부로 들어가 도라산역, 제3땅굴, 캠프보니파스 등 여러 장소들을 보며 그 의미와 현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또 유엔사 관할지역인 남측 비무장지대로 들어가 판문점과 대성동마을을 둘러본다. 그리고 민통선을 빠져 나오면서는 통일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돌아오며 적군묘지, 장준하 묘, 보광사 구 비전향장기수 묘역 등을 살펴보며 돌아오는 것으로 기획하였다.

아직까지 분단의 흔적이 가장 짙게 남아있는 이곳 민통선-DMZ 일대에서 최근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통일의 역사를 직접 몸으로 느끼며 남아있는 분단의 흔적들을 지우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연재는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싣는다. /필자 주


민족주의자 <고당 조만식>의 자리

자유로의 작명 배경을 알아보면서 우리는 통일동산 역시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라는 통일정책의 구체화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평화시-자유로-통일동산 이 모두가 국가연합을 전제로 한 통일방안과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이는 당시 소련 및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고립된 북에 대하여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공격적으로 전개된 북방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방안은 역사발전의 주체세력인 '민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생산력을 배경으로 한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앞세운 통일정책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북에 대한 고려보다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앞세운 일방적 통일정책이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로 이한 고립된 북과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한 남측의 국가연합제 통일방안 속에서 기획된 또 하나의 상징적 장치가 통일전망대 앞마당에 우뚝 서있는 고당 조만식의 동상이다.

즉 이곳에 고당 조만식의 동상이 서있는 것은 이곳에 오기 위해 필자가 달려온 자유로의 이념설정과 무관하지 않다. 북쪽 반탁운동의 선봉에 선 민족주의자, 그로 인한 그의 연금생활, 전쟁의 한가운데 평양에서 사망(1950.10),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신자 등 이러한 몇몇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월남한 반공주의자들에 의한 조만식의 이미지는 지극히 간단하게 조합되어 철저한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다시금 채색되어 대중에게 다가서게 만들어진다.

'평민출신의 조만식→숭실학교에 입학하여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변신→물산장려운동 및 일제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민족주의자→해방 후 반탁운동의 선봉으로 김일성과 대립→이로 인한 공산당에 의한 연금생활→전쟁 중 공산당에 의하여 처형→반공자유투사의 전형'이 바로 조만식에 대한 남쪽 사람들의 인식의 대부분이다.

   
  ▲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마당에 서있는 고당 조만식 동상. 생전에 반공을 외친 적이 없지만, 단지 '반탁'을 주장했고 북에서 전쟁 중 사망했다는 이유로 민족주의자 조만식은 철저하게 반공주의자로 채색되어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마당에 동상으로 서있는 것이다.( [사진 - 유영호]  
 
그럼 여기서 반공주의자로 채색된 조만식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조만식은 부친이 물산객주였던 상인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15세에 서당을 그만두고 22세에 평양 종로거리에서 포목점과 지물포를 경영하면서 말술에 난봉꾼으로 유명했다.

그러던 조만식이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만학에 접어든다. 그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단이 세운 숭실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기독교도가 되고 이후 일본으로의 유학을 통해 법학을 공부했고, 귀국 후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3.1운동 직후 중국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조선물산장려회(1921)를 주도함으로써 강력한 민족주의자로서 우뚝 서게 된다. 여기까지는 반공주의자들의 논리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반공주의자들은 이후 몇 가지 사실들을 생략하고 바로 조만식과 김일성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를 반공주의의 선봉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실 조만식은 정작 월남자들의 논리처럼 반공을 목놓아 외친 적이 없다.

그는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하면서도 1927년 좌우합작이었던 신간회 발기인에 참여하고 평양지회장을 역임했다. 또 그의 직계 제자라 할 수 있는 배민수, 유재기 등이 1929년 평양에서 조직한 기독교 농촌연구회가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사상경향을 띠었던 것도 그와 관련 있다. 또 해방 후 평남건준위원장으로 추대되고, 소련군이 진주한 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을 때도 좌우를 망라한 위원회를 구성하는 모범을 보였던 것이었다.

한편 그가 창당한 기독교계의 조선민주당은 소련군정의 허락을 얻어 창당을 준비하였고, 김일성에게도 입당을 권유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내부분열에 휩싸인 북조선분국을 장악해야 한다는 내부방침으로 김일성은 자신이 조선민주당에 참가 못하며, 대신 최용건이 참여해 조선민주당의 부당수가 되고, 김책도 서기장 및 편집부장으로 선출된다. 하지만 이후 신의주사건과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대립으로 그들은 결국 갈라선 것이다.

만일 그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면 이처럼 사회주의자들을 조선민주당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바로 월남했을 것이지만 그는 최후까지 북에서 완전한 통일조국의 건설을 꿈꿨던 것이다.

사상적 측면에서 조만식은 중도우파에 가까웠다. 당시 평안도 기독교 세력은 미국 북장로회에 의해 주도된 기독교사상, 성서무오설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 신학의 성향이 강했던 탓에 조만식은 맑시즘의 유물론과 무신론에는 반대하였다.

하지만 자립적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평안도가 정치적으로 차별 받아온 역사적 풍토 등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사회정책에는 호의적이었다. 평남 인민위 정치위원회에서 시정대강을 작정할 때도 토지개혁 자체를 반대한 보수우파와 달린 그는 전향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임시민주정부를 먼저 구성한다고 한 데 주목하여 일단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신탁통치 제안서를 작성하는 과정에 '최고 5년'으로 정해진 기간을 없애거나 안되면 최소한으로 줄여보자는 절충안을 내놓은 남측 중도우파 인사들과 달리, 그에 완강한 반대입장을 고수한 것은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아마 신탁문제를 일제 하에 제기된 자치론과 비슷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치론이 그랬던 것처럼 신탁=독립을 유보하자는 주장으로 받아들이고, 신간회 당시와 마찬가지로 비타협 무저항의 시민불복종 노선을 걸은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가 월남을 거부한 것은 북녘 땅의 민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이북 최고 지도자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반쪽 짜리 분단 정부에 대한 거부였다.

이렇듯 고당 조만식의 여러 행적가운데 일부만을 왜곡적으로 편집하여 그를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만들고 그를 이곳 통일전망대 앞마당에 반공의 상징으로 우뚝 세워놓은 것이다. 이로써 그를 바라보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반북 정서를 확산시키고자 함이 목적인 듯해 보인다.

통일전망대에서 반북 정서를 고양시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필자의 단견으로는 고당 조만식의 동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어 반공주의자로서의 조만식이 아니라, 민족주의자로서의 조만식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해야 옳다고 본다.

   
  ▲ 48년 백범 김구가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38선을 넘는 모습. 좌로부터 선우진, 김구, 김신. [사진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홈페이지]  
 
그리고 이곳에는 고당 조만식의 동상 대신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의 동상을 옮기어, 분단에 결연히 반대하며 남북이 함께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려 자신을 버린 그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것이 통일전망대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본다.

최근 새롭게 만들어질 10만원권 지폐인물로 백범 김구의 초상을 넣어 통일시대에 맞게 국민들로 하여금 통일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듯이 이제는 여기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상징물 역시 민족대단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재조정해 나가야 올바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동상 아래 다음과 같은 백범 김구의 명언이 새겨져 이곳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된 조국의 중요성과 그를 위해 자신을 던진 백범 김구를 되새기게 하기를 기대해 본다.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백범 김구)

건립 목적과 현실의 괴리, <통일동산>

이곳 통일전망대에 오를 때는 북녘 땅을 보고자 하는 설레는 마음에 바로 전망대 건물로 들어섰기 때문에 올라오면서 필자의 눈은 조금씩 펼쳐지는 북녘 땅을 향하였고 남쪽의 통일동산은 시야에 안 들어왔다. 하지만 전망대를 빠져 나와 입구로 다시 나오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통일동산으로 불리는 이곳의 전경이었다. 서울의 빽빽한 빌딩숲과 달리 확 트인 전경에 시야가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필자의 얄팍한 지식 때문인가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 2007년 11월 현재 통일동산의 모습. 통일과 관련된 시설은 이 전경을 찍은 위치인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유일하다. [사진 - 유영호]  
 
분명 이곳을 우리는 '통일'동산이라고 지칭하는데 도대체 눈에 보이는 것 가운데 제일 많이 보이는 것은 러브호텔과 음식점들이다. 그리고 지금 필자가 서있는 통일동산을 빼고는 통일과 관련된 시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영어마을, 헤이리 예술마을 그리고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러브호텔들 등. 도대체 왜 이런 것일까? 설마 이곳을 기획할 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에 이곳 통일동산의 목적과 기획 의도 등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통일동산은 전두환 대통령 집권 말기에 기획되었던 것이 폐기되었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제43차 유엔총회 특별연설(1988.10.18)에서 밝힌 비무장지대 내 '평화시' 건설 제안,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를 구체화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등과 연동되어 그 후속조치로써 자유로와 함께 기획된 것이었다.

주요목적은 1천만 이산가족의 망향의 한을 달래는 만남의 장소이자 각계각층의 통일의지를 일깨우는 통일교육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본래의 의도는 현실로 되돌아 와볼 때 또 다시 전시행정이 되고 말았다.

지난 2000년 바로 옆 일산신도시에서 시민들의 러브호텔 반대운동이 시작되면서 러브호텔들이 이곳 통일동산으로 대거 옮겨왔고, 본래 계획상 통일전망대 앞 만남의 광장으로 기획된 부지는 현재 축구 국가대표팀 트레닝센터로 사용되고 있으며. 만남의 광장 옆 대형주차장은 자동차극장으로 바뀌었다.

남북의 상품 판매 구역에는 상품을 파는 곳은 단 한 곳도 없고 식당들만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통일관련 서적과 사진 그림을 전시하기로 했던 서화촌 부지는 현재 용도가 바뀌어 헤이리 예술인 마을로 둔갑되어 있다. 또 관광 휴양 및 연수시설 부지는 경기 영어마을로 쓰이고 있다.

현재 여의도 면적의 절반이 넘는 규모의 통일동산에 통일관련 시설은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유일하다. 하지만 유일한 통일관련 시설인 오두산 통일전망대 조차도 그 내부를 돌아보면 전시물과 안내자의 설명 등은 관성적으로 여전히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반공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헤이리 예술마을에서도 그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한 어린이 놀이시설 및 상점 앞에는 20세기 냉전의 유물인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이 그 입구에 서서 21세기 탈냉전 시대의 어린이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동산, 그 목적과 현실이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통일정책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변하여 따스한 햇살이 내비치고 들녘에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봄을 알리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두꺼운 외투에 장갑을 끼고 지난 시절 냉혹했던 찬바람을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통일동산 헤이리 예술인마을 5번 출입구 앞에 서있는 반공소년 이승복 어린이 동상. [사진 - 유영호]  
 
이제까지 자유로와 통일동산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연동된 하나의 기획 작품이라는 것과 그것이 갖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과오와 실수가 없이 모든 일이 잘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통일역사도 이러한 과오와 실수를 범하며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듯이 이제는 지난 날의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도록 기대해 본다. 그리고 우리가 삼아야 할 사상적 지표는 우리 통일기행의 출발지였던 김대중도서관에서 되새겼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원칙'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끝으로 한강변을 달려오던 자유로는 이제부터 분단의 강, 통곡의 강으로 불려지는 임진강을 따라 늘어서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는 우리 통일맞이 나들이의 본격적인 기행을 위해 임진각으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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