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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 서정춘 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루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집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 발린 연필 글씨로 씌어 있었다 오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6.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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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노란 꽃에 바치는 노래 - 파블로 네루다 우리들은 먼지, 먼지가 되리. 공기도, 불도, 물도 아닌 땅, 단지 땅이 될 뿐 그리고 몇 송이 노란 꽃이 될 뿐. 가끔 악몽을 꿀 때가 있다. 대개 궁지에 몰려 쩔쩔매고 있을 때 깬다. 깨고 나서도 잠깐 동안 착각한다. 꿈속이라고. ‘어떡하나?’ 그러다 화들짝 깨닫는다. ‘아, 꿈이었구나!’ ‘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6.1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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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한 식구에 관한 추억 - 박철 댓돌 아래 할짝이던 개가 있었다 오뉴월 염천, 아버지 개 끌고 산으로 올라간다 삐삐선 엮어 개의 목에 두르고 가지 위로 걸었다 소나무 조금 휘청거렸다 개는 뭔 일인지 몰랐다 개, 하늘 보며 뒤룽거린다 삐삐선이 풀렸다 땅에 떨어진 개 달려나간다 아부지 개 달아나요 냅도라 집으로 돌아올 겨 댓돌 아래 돌아와 서성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6.0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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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호수2 -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SBS ‘궁금한 이야기Y’에서는 ‘신(神)’이 되어 있는 ‘허경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산골짜기에 대궐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중심에는 ‘하늘궁’이 있다고 한다. 그의 손이 몸을 쓰다듬기만 해도 불치병도 낫는단다. 사람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서 그를 찬양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5.2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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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복종 - 한용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5.2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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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술꾼 봉도 - 이동순 흰 눈은 나려 고죽 마을을 덮었는데 새알산도 하얗고 밭엔 못 뽑은 배추가 그대로 눈 뒤집어썼는데 이런 날 봉도는 술 생각이 나서 땅 속에 어찌 누워 있나 속알못 쪽 봉도 무덤으로 가는 길도 이미 눈이 파묻혔다. 오늘 같은 날 봉도는 필시 누웠던 땅에서 일어나 머리에 눈을 맞으며 주막집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으리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5.1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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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싸움 뒤 - 가네코 미스즈 외톨이가 되었다 외톨이가 되었다 멍석 위는 쓸쓸해 난 몰라 그 애가 먼저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쓸쓸해 인형도 외톨이가 되었다 인형을 끌어안아도 쓸쓸해 살구꽃이 폴폴 포르르 멍석 위는 쓸쓸해 정년퇴직을 한 학기 앞 둔 초등학교 교사가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생의 무례한 행동과 그 학생 부모의 항의와 끈질긴 민원에 끝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5.0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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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태양의 유혹 - 황인숙 내가 태양을 향해 똑바로 얼굴을 치켜들자 그는 찡긋 너! 라고 속삭인다 북적이는 행인들 속에서 나는 오,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나만의 햇님 나의, 라고 더듬거린다 그 누가 알리 태양이 굶주린 거머리처럼 내 자신을 빨고 이 많은 행인들 속에서 나, 감쪽같이 환락의 떪을 나, 잠시 영원히 추위를 벗고 내 몸에 너무나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5.0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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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주문진 - 나해철 아아 거기 푸른 물 곁에 사람들이 모여 산다. 맑고 깨끗한 풍광 속에 모두 가난하고 가난하여 욕되지 않다 살고 죽는 빈손이 한줌 동해물처럼 말갛게 들여다보여 흰 조약돌 같다. 오늘 새벽에 경남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입주민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흉기를 무차별적으로 휘둘러 5명이 숨지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4.2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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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네게로 - 최승자 흐르는 물처럼 네게로 가리 물에 풀리는 알코올처럼 알코올에 엉기는 니코틴처럼 니코틴에 달라붙는 카페인처럼 네게로 가리.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매독처럼 삶을 거머잡는 죽음처럼. 대학 때 함께 스터디를 하며 꿈을 꾸었던 옛 벗에게서 문자가 왔다. 만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죽기 전에 한번 봐야지!’로 시작하던 글이 ‘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4.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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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랑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4.10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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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화내고 있다 - 이성미 꽃에게 화내고 있다. 풀에게 화내고 있다. 깃털을 집어 던지며 지푸라기를 집어 던지며 발을 구르면서. 화가 수시로 활활 타오르는 중년 여인이 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너무나 크단다. 그래서 일찍이 이혼을 했다. 그녀는 심리 상담을 공부하며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단다. 학창 시절에 남들에게는 항상 아버지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4.03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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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오늘밤은 106호에서 시작되었다- 김행숙못된 아이들은 이렇게 항상 머리 위에서 논다. 106호 고독한 남자는 갑자기 참을 수 없었다. 천장이 아니라 천둥 같잖아. 오늘밤은 조용해야 해.오늘밤은 쉬어야 해. 106호 고독한 남자는 206호 고독한 여자가 된다. 우리 집엔 애들이 없어요. 그리고 난 쭉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어요. 306호는 살인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3.2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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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노인들 - 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지난해 초겨울 새벽에 서울 마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3.2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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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안개 - 기형도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3.1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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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야채사(野菜史) -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꽃 수북 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3.0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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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김남주 당신이 걷다 넘어지고 마는 미팔군 병사의 군화에도 있고 당신이 가다 부닥치고야 마는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도 있다 가까이는 수상하면 다시 보고 의심나면 짖어대는 네 이웃집 강아지의 주둥이에도 있고 멀리는 그 입에 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 안 짓고 혼줄 나는 억울한 넋들에도 있다 삼팔선은 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2.2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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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학살 2 - 김남주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대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2.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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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시 - 옥따비오 빠스 뒤집어 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 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꺼내버려, 투우처럼, 수소처럼, 질질 끌고 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2.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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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삶- 릴케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그때면 삶은 축제처럼 될 것이다.어린이가 길을 가며바람결 하나하나에서많은 꽃들을 선사받듯나날을 지나가게 버려두라.그 꽃을 모아 아껴둔다는 것은그 어린이의 생각에는 떠오르지 않는다.그 어린이는 즐겨 머무르려는꽃을 머리카락에서 가만히 뽑아사랑스러운 젊은 해들을 향해또 다시 손을 벌리고 있다.한 모임에 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2.06 08: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