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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이불을 꿰매면서 - 박노해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1.13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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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사랑의 거처 - 김선우 말하지 마라.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 나무도 생각이 있어 여기 이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인간세편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페허예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1.0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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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0.30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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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제대로 된 혁명 - D.H.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쫓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0.23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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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0.1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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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먼 곳에서부터 -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에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 교장 선생님에 대한 요구 사항을 정리해 연판장을 만들어 교사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0.0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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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푸른 하늘을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강의 시간에 가끔 수강생들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10.0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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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청춘 2 - 진은영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읍내에 있었다. 읍내에서 한참 먼 농촌 마을에서 자라난 나는 책보자기를 어깨에 메고, 마을 동무돌과 함께 걸어 다녔다. 읍내 아이들은 가방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9.2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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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9.18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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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꿈 - 랭스턴 휴즈 꿈을 꽉 붙들어, 꿈이 사라지면 산다는 게 날개 부러진 새와 같아 날 수가 없거든. 꿈을 꽉 붙들어, 꿈이 사라지면 산다는 게 눈으로 꽁꽁 얼어붙은 메마른 들판 같거든. 우리 사회의 귀족은 누구일까? ‘강남 좌파’ ‘강남 귀족’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그들이 정말 우리 사회의 귀족일까? 귀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위해 그리도 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9.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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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아버지 자랑 - 임길택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잡수신 다음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9.0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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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러나 나는 - 김남주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한다는 금(金)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8.28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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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철새 - 이시카와 다쿠보쿠 가을 저녁의 조용함을 휘저어놓고 하늘 저 멀리 구슬픈 소리가 건너간다. 대장간의 백치 아이가 재빨리 그 소리를 알아듣고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쳐다보며 새가 나는 흉내를 하면서 그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까악- 까악- 외쳐대면서. 나는 어릴 적 ‘왕따’를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 초등학교 4, 5학년쯤이었을 것이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8.21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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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담배 연기처럼 - 신동엽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 말았네. 아, 못 다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두레박질이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8.0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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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눈 온 아침- 임길택밤사이 내린 눈이몽실몽실강가의 돌멩이를덮고 있었다.어두운 밤이었을 텐데어느 돌멩이도 똑같이나누어 덮고 있었다.해가 뜨는 쪽의 것도해가 지는 쪽의 것도넓은 돌멩이 넓은 만큼좁은 돌멩이 좁은 만큼어울려 머리에 인 채파도를 이루고 있었다.돌멩이들이 나직이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10여 년 전에 크게 아프고 나서 추위에 엄청 약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7.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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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바람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 자락의 상쾌! 황인숙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이면 ‘사건’을 만난다.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스커트 자락의 상쾌!’ 남자인 나도 이런 ‘상쾌’를 만난 적이 있다. 아주 오랜 전에 오지에 갔다가 옷을 다 벗은 상태로 ‘원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7.24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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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젊음 - 사무엘 울먼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장미빛 뺨도 빨간 입술도 아니며 나긋나긋한 무릎도 아니다. 그것은 의지와 상상력이며 활력이 넘치는 감성이다. 그것은 삶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버릴 때 우리는 늙는 것이다. 나이는 피부에 주름살을 만들지만,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7.1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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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밤비 - 백거이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 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 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이에게 질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질투하지 마! 알았지? 질투하면 안 돼!’ 엄마가 동생과 함께 운동을 하니 언니가 왜 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7.1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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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직박구리 - 고진화 어떤 시인이 꽃과 나무들을 가꾸며 노니는 농원엘 갔었어요. 때마침 천지를 환하게 물들이는 살구나무 꽃가지에 덩치 큰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 속의 꿀을 쪽 쪽 빨아먹고 있었지요. 곁에 있던 누군가 그것을 바라보다가, 꽃가지를 짓누르며 꿀을 빨아먹는 새가 잔인해 보인다며 훠어이 훠어이 쫓아버렸지요. 아니 그렇다면 꿀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7.0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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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개망초 - 오선홍 깎아지른 벼랑 돌 틈을 비집고 저도 위험한 하나의 풍경이 된다. 홀로 피었다 당당하게 사라지는 개망초. 아주 오래 전에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말했다. ‘사회 운동하는 사람은 도덕성이 가장 중요하다.’ 그때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도덕성’ ‘옳기에 가는 길’은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6.26 0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