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안녕, 안녕…” 어루만지는 손이 애처롭다.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놓아주고 싶지 않지만, 그래야만 한다. 그래서 작별인사를 한다. 슬픔이 중력보다 무거운 것일까. 눈동자가 쏟아질 듯 말듯 떨린다. 비록 대답은 없지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쓰다듬는다. 왜 대답이 없는가. 바로 작별을 하는 대상이 책상 같은
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 생가에서 시작한 기획취재가 서울과 도쿄, 화룡 등을 거쳐 중국 밀산에서 일단락됐다. 정작 홍암이 100년전 순명 조천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오는 9월 15일은 음력 팔월 보름 한가위, 홍암 나철이 조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남북관계가 원활하다면 대종교는 물론 홍암
서원(誓願), 자기 마음속에 맹세하여 소원을 세운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소망 몇 개쯤이야 지니고 있겠지만 큰 뜻을 품은 이들의 서원은 역사 속에 살아 흐른다.‘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의 기치 아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 홍암 나철이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부쳐 내건 대종교와 한배님, 천하를 위한다는
홍암 나철의 순명 조천(殉命 朝天)은 30만 대종교 교우는 물론 일제의 무단통치에 시달리던 2천만 조선 민중에게 큰 울림을 남겼다.홍암의 두 달이 넘는 구월산→경성→화룡 장례여정은 ‘올림픽 성화 봉송’을 방불케했다. 홍암 등 대종교 3종사 묘역이 있는 중국 화룡시 청호촌 주민들이 아직도 “울 할아버지가 말하는 게 라철 선생이랑 고래함(유골
망국과 맞물려 갓 출범한 대종교가 일제 무단통치의 등쌀에 베겨내지 못하고 1914년 5월 13일 총본사를 옮겨간 곳은 만주 백두산 북록(北麓)이다.1909년 음력 정월 대보름 단군교를 중광한 홍암 나철은 1910년 7월 30일 대종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평양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까지 순례하고 일찌감치 백두산 북록 청파호(청호촌)를 점찍어 두었다.홍암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기사를 연재하면서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 왜 거의 안 알려졌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대종교 때문”이라는 답 아닌 답을 내놓으면 다들 “글쎄 대종교는 처음 들어보는데 뭔가 이상한 종교 같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베드로, 야고보, 마태, 도마, 유다 등 예수의 열두 제자 이름을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홍암 나철
권중현을 사격하였으나 맞히지 못했고... “당일은 아침부터 각자 예정한 장소에 이르러 길바닥에 머무르며 그 통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전 10시경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은 그 기다리고 있던 광화문 앞에 왔으므로 오기호는 인솔하는 바의 장사(壯士)를 독촉하여 “하라, 하라”고 재촉했지만 장사 등이 우물쭈물 주저하던
“폐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었지만 공훈을 이룬 것을 경계하여 반드시 동아세아의 황인종을 생각하고 우리 한국을 독립시켜 서로 공존한다면 우리 한국만 행복할 뿐 아니라 귀국도 다행할 것이며, 귀국만 다행할 뿐 아니라 천하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상일황소 중)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인 1905년 6월, 일본으로 밀항한 홍암 나철 일행은 일본 황궁 앞에서 3일간
‘홍암 나철 선생 선양회’ 양현수 회장과 박형제 부회장의 안내로 홍암 나철의 생가를 찾은 6월 17일, 극성스런 올 여름 더위가 벌써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취재의 첫 출발점은 아무래도 그가 태어난 생가가 마땅할 터.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마을 입구 왼켠에는 ‘민족독립 지도자 홍암 나철 선생 유적비’와 ‘독립운동 선도
“만약에 뒤집어서 홍암 나철과 대종교라는 집단이 없었다면 과연 한글운동이 일어났을까? 과연 민족주의 역사운동이 일어났을까? 우리 민족 고유한 정체성의 다양한 분출이 과연 가능했겠나? 불가능한 것 아닌가?”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가진 인터뷰에서 김동환(60)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우리 국가정체성을 잉태시킨 장본인이 바로 홍암 나철이고, 홍암 나철 자체
“열네해동안 네 얼굴을 못 보고 오날 천고영별은 네 마암에 매친 한이 잇슬듯 하고 내눈에 항상 걸일듯 하나 이 길은 곳 영생하는 한울길이니 부대 애회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커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밋고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잇지 말라. 친부 자필”스스로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앞서 딸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가운데, 지난 19~20 중국 선양(심양)에서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남북해외 위원장회의’가 열려 주목을 받았다. 정부는 남측 대표단의 북한주민접촉 신청을 수리하지 않았지만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 등 대표단은 회의 참가를 강행했다. 선양 6.15민족공동위 공동위원장회 결과, 올해 6.15민족공동행사는 개성에서,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이번에 도착한 문서 가운데 보관/인쇄 상태가 좋지 않아 호주 외무부에 또 연락을 해 받아낸 자료가 있다(다시 보내온 문서 역시 상태가 좋지 않다). 뉴질랜드 정부의 비밀문서로 1987년 12월 3일 서울에 있는 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작성된 듯하다.이에 따르면 사건에 대한 북쪽의 개입이 확인될 경우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시간이란 많이, 또는 적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네가 존재하고 있는 그 순간, 그것이 시간이다.”네덜란드 드라마 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인 에바가 큰 병에 걸린 자신의 가족을 방문했을 때 들은 말이다. 시간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그렇다. 시간은 양의
"이데올로기는 활엽수처럼 계절에 따라 무성하고 착색되고 낙엽지지만, 민족은 창공처럼 영원하다"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 20세기 백 년간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 중 한 사람.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에 대한 수식어다. 그의 앞에 붙는 화려하고 웅장한 표현은 '창공처럼 영원한 민족'이라는 그의 믿음에서 출발한다.윤이상. 우리에
“북한 사람들을 대할 때나 회의할 때 쓸데없이 아무데서나 웃지 말고 단정하고 정중한 태도로 진지할 것과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지 말 것.”1989년 1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첫 방북을 하면서 동행한 박재면 당시 현대건설 사장, 김윤규 전무 등 일행에게 내린 주의사항이다.당시 일행이던 김윤규 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 회장은 한참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여러분, 모두 축하해 주십시오. 우리 두 사람이 남북 공동선언에 완전히 합의했습니다."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김 위원장의 손을 잡아 올렸다.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다시 연출해야 했다. 마침 장
“...(전략)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나부끼는 일이라고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열린 ‘김정은 시대’는 2012년 4월 제4차 당대표자회를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이 회의를 통해 김정은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됐고, 당 조직을 정비했으며, 당규약도 개정해 조선노동당을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당’으로 규정했다.김정은 1비서는 이듬해 3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채
북한 조선노동당이 10일 창건 70년을 맞는다. 북한은 당 우위 국가라는 점에서 당이 결정한 정책은 국가의 방향을 좌우한다.초기 조선노동당은 당과 국가건설이라는 목표가 최우선이었기에 정책도 일제잔재 청산와 함께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틀을 잡는데 집중됐다. 그리고 오랜 고립과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군사력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마련하는데 주력했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