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글로 말미암아 누군가 깊은 울림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니, 깊은 울림까지는 감히 바라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 어떤 작은 이야기나마 전해주고자 한다. 글쓰기는 너와 나 사이의 진중한 대화가 아닌가.하지만 대부분 겁쟁이이자 소심한 글쟁이들은 정작 자신의 마음을 ‘쿵’하고 울리는 글을 만날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겁쟁이이자,
내게는 『슬립』이후 두 번째 만나는 챈들러의 작품. 원래 그의 두 번째 작품은 『안녕 내 사랑』이지만, 국내엔 『하이 윈도』가 먼저 소개되었고, 나 역시 이 작품부터 만날 수 있었다.하드보일드 장르를 뛰어넘어 일반 문학으로의 작품성까지 인정받고 있는 챈들러는 그야말로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려왔다. 그리고 그가 창조해낸 불멸의 캐
뭇 생명의 계급이란 것이 존재할까? 누구의 생명은 한없이 소중하고, 또 다른 이들의 생명은 하찮은 것일까? 과연 그러한 기준이 있다면 그딴 것은 어느 잡놈이 만들었고, 또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따르고 있을까. 누군가를 잃은 슬픔에도 등급이 있을까. 확실히 독특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이 작품은 2001년 9․
어느 소설가의 글에서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온 이들에겐 그 어떤 첨단 기술과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도 갈음할 수 없는 지혜와 경험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슬프게도, 그러한 지혜와 경륜 그리고 거기에
변변한 취미 하나 없는 이들이 꼭 취미가 뭐냐 물으면 ‘독서’라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취미는 독서다. 물론 변변한 여타 취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취미가 반드시 1인당 하나일 이유는 없다. 난 독서 외에도 나름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변변치 못한 녀석이 아니다!사실 요즘처럼 취미 생활에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시대에,
“세상에 진정한 천재가 나타났음은 바보들이 모조리 결탁하여 그에게 맞서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 조너선 스위프트1976년,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1969년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들이 남긴 소설 한 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 어떤 고난이라도 겪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던 중 뉴올리언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씩, 아니 제법 자주, 무참한 장면을 목격해야만 한다. ‘로드 킬’이다. 덩치가 작은 짐승부터 제법 큰 것들까지 길 위에 만신창이가 되어 죽어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인간인 것이, 자동차라는 괴물을 타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지곤 한다.본래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심성이 있는 것인지, 나는 사람보다
“나는 위기로 인한 고통에 대한 대답이 민주적 가치를 지키는 개혁적 민주주의의 힘을 결집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20세기 동안에 많은 유럽인들은… 이데올로기를 떠받들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전지전능한 안내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반공산
“자신을 향한 과거로의 회귀는 퇴행이며, 이상적 자아에 대한 과잉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이고 진정성의 상실은 분노로 표출된다. 이것들은 IMF 이후 진정성의 토대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확장되면서 부상했다. 우리는 지금 허기사회에서 살고 있다.”지금 한국사회의 모습에 대한 저자의 진단에 이의를 제기할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스스로 절실히 느끼고 있는 ‘
굳이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참 어설픈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며 산다. 어설프게 감정적이고, 또 감히 무엇을 동정하고 동경하기도 한다. 눈물이 많지만, 그 눈물 속의 무엇이 온전히 담겨 있는지 스스로 못 느낄 때가 더 많을 만큼 아둔하다.현 시대를 살아가며 옛 시대를 동경하고, 그 속에서 어떠한 낭만마저 찾아내려 하는 것은 그 어설픈 치기 중 하나다. 지금
이른 바 ‘새내기’라 불리던 시절. 나름 파란만장한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심히 부끄러운 짓을, 당시에는 거침없이 저지르고 다녔고, 그야말로 철이 없다는 것과 무지하다는 것의 엄중한 차이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이켜보자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이 남아있다. 박완서 선생님의 말씀처럼 시간이 결국 신(神)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
역시 쉬운 일은 한 개도 없다. 이제야 아주 조금 살아보니 알겠다. 특히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역시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다. 한 개인을 ‘이러저러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꽤나 어렵고 또 위험한 일이다. 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우주를 품고 사는데, 어떻게 한 개인을 무 자르듯 딱 잘라 평가하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그럼에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업무와 관련하여 충무로에 갈 일이 종종 생긴다. 예전 충무로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의 1번지였지만, 지금은 옛 정취를 찾기 쉽지 않다. 기껏 충무로역 내부 통로 벽에 전시되어 있는 대종상 시상식 사진들 정도랄까.충무로는 또한 인쇄 및 출판 거리이기도 했다. 지금도 과거에 비할 순 없지만, 묵직한 인쇄물을, 개조한 오토바이 뒤에 싣고 열심히 달리는 노동자들을
부끄럽지만, 고백해야겠다. 적당한 삶이란, 저자의 말마따나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시간이 갈수록 그렇게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그리고 파스칼의 말처럼 ‘이해하기도 전에 동의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은 없’음에도, 짐짓 이해하는 척, 건방지고 무책임하게 동의해버렸다.이 세상을, 우리네 삶을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 말라는 말들에 어느 새 주저앉아버렸고, 문득
지난 해 말부터 이른 바 크라임 스릴러에 묻혀 지냈다. 죄송하다. 범죄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를 읽어왔는데, 어느 새 남은 작품은 두 권 뿐이다. 드라마로도 챙겨 봤으니, 본의 아니게 해리 보슈의 열성팬이 된 듯하다.이미 세상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데, 굳이 인간의 잔혹함과 나약함, 비열함이 순도 높게 표현되고 있는 범죄 소설을 읽
인간은 나약한 딱 그만큼 오만하다. 논리, 정의, 상식, 진리라는 모래성을 쌓아두고, 그것이 언제라도 무너질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정확히, 스스로 말하는, 스스로 외치는, 진리, 논리, 상식은 도대체 무엇인가.세상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다. 인간을 의식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세상을 해석하려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런 인간의 노력으로
“전 세계에서 1년에 출간되는 책이 100만 종. 한국에서 출간되는 책은 4만 종 이상. 하루에는 1,000종 이상. 부수로는 1억 부 이상. 그 대부분은 국가자격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을 위한 문제집, 수험서, 참고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서적은 130만종. 한편 보통 사람이 일하고 공부하고 밥 먹고 잠자고 남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 매일 다섯 권씩 책을
“노동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인간은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협력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일을 하고 있어도, 일을 하지 않아도 불안한 시대다. 취업준비생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탄생한지 이미 오래고, 과연 내가 무엇 때문에, 왜 일을 하
나의 크고 많은 단점 중엔 치명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개중엔 과연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그런 것들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평상시엔 누구 못지않게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한다고 자부하다가도 어느 순간 특수한(!) 계기나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내 좀비가 되고 만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참말로.사람은
여전히 행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물질과 권력으로 이 세상 모든 행복을 온전히 설명하려 하는 이들이 이 사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행복은 그들에게 점령되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지만.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저마다 행복의 기준과 크기와 실체가 다르기에, 일방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난 불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