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조(극동대 교수, 전 통일부 차관)남북대화가 어렵사리 이어지고 있다. 개성공단 가동을 위한 남북 당국간 실무회담이 네 차례 진행되었지만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늘 5차 실무회담을 열기로 했다. 이런 기싸움은 대화 자체에 대한 무기력증을 유발하고 스스로 대화의 지속을 어렵게 한다.모처럼 열린 남북대화가 이렇게 지지부진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남북이
유영재(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미군문제팀장)이성의 빛으로 우상의 어둠을 거둬내고자 평생 고군분투했던 고 리영희 선생은 1999년 연평해전 직후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 : 1999년 6월 15일의 서해상 남북 해군 충돌 배경의 종합적 연구”(통일시론 제3호(1999. 7))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북방한계선’은 남한(한국)의 ‘영해’가 아
김근식(경남대 교수, 정치학)2013년 한반도의 봄은 긴장고조와 전쟁위협으로 지속되었다. 말로는 전면전 상황과 다를 게 없었다. 정전협정 백지화와 남북 불가침 합의 파기를 내세워 핵타격과 워싱턴 불바다 그리고 벌초론까지 내세운 북한, 도발시 원점뿐 아니라 지원세력과 지휘세력까지 섬멸한다는 한국의 단호한 응징의지는 이미 말로는 전쟁상태였다.2013년 한반도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북한의 전략적 선회일본 계열의 민영 방송사인 은 북한군 관계자에게서 취재했다면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지난달 10일자로 북한군 전체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0만 명의 병력을 줄이라는 명령을 인민무력부 총참모부에 내렸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으로는 올해 8월말까지 장교 5만 명, 병사 25만 명 등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통일의 주체는 전체 민족이라고 말한다. 전체 민족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민족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운동은 전체 민족을 주체로 나서게 하는 대중화와 전체 민족의 삶속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일상화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통일운동의 대중화와 일상화가 이뤄지면 통일의 주체가 튼튼해지기 때문에 통일방안에 대한 논쟁을 소모적
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재미 통일연구가) 6.25 전쟁이 일어난 지 63년이나 되니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전쟁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 모르며 또 절반 이상이 남한의 북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의 조사에서 밝혀져 기성세대가 매우 걱정하고 있다 한다. 그런데 그런 기성세대는 과연 6.25의 참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 김정은 정권이 출범한 지 1년 3개월이 다되고 있다. 1년 3개월은 김정은 당 제1비서가 2012년 4월 11일 개최된 제4차 당대표자회를 통해 북한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수위인 ‘조선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된 이후부터 산정한 것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 내외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 몇 년이
백학순(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북한이 어제 국방위대변인의 ‘중대담화’를 통해 미국에 대해 고위급회담을 제안했다. 국방위대변인은 “위임에 따라” ‘중대입장’을 국내외에 밝혔는데, 그 핵심은 미국에게 ‘고위급 비핵화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현재 한반도 및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시작된 ‘대화 다이나믹스’의 맥락에서 볼 때, 앞으로 한미양국이 하기에 따라서는 ‘
김종수 (민주통합당 통일전문위원)남북관계가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남북당국회담을 내실 있게 준비해서 남북관계 정상화라는 결실을 맺길 기대한다. 작년 12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악화일로를 걷다가, 지난 6월 6일 북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전격적으로 남북 당국회담을 제안하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고, 우리정부가 이에 호응하면서 전격적으로 ‘대화’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공기의 소중함은 없어봐야 안다고 했던가요. 남북이 이른바 ‘6.15시대’로 들어선 이래 어제처럼 온 국민이 간절한 마음으로 남북대화 결과를 기다려본 적이 있을까요? 개성공단 잠정폐쇄로 짧게나마 남북관계 ‘단절의 시대’를 겪어보니 남북대화의 소중함을 알겠습니다. 비록 최종합의는 못했지만 9일 오전에 시작해 10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6월이 중요하다. 6월 8일 미중정상회담, 6월 15일 615 공동선언 13주년, 6월말 한중 정상회담이 줄지어 있다. 올 상반기에 전개된 한반도 위기는 분단체제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폭발하였다. 북한은 장거리로켓 발사를 제재하는 유엔에 맞서서 미국과 한국을 강력히 비난하며 2월 초에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후 말폭탄이라고 불리워진
노중선 / 통일뉴스 상임고문전쟁과 냉전의 쌍생아적 산물올해는 정전 60년이고 한미동맹 60년이다. 그것은 곧 8.15에서부터 정전까지의 8년이 분단 설정 과정이었다면 그 이후 정전 및 한미동맹 60년은 내외적 한반도 분단 세력에 의한 분단 고착화 기간이었다. 한편 한반도 분단세력과 평화적 자주통일세력의 대립 갈등으로 이어진 남북 및 북미간 대결의 60년이기
유영재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미군문제팀장)한미 양국이 5월말이나 6월초에 9차 미군주둔비부담(방위비분담) 특별협정 체결을 위한 1차 협상을 벌일 것이라고 한다.연방예산 자동삭감(시퀘스터)에 따라 국방비를 대폭 삭감해야 하는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 비인적주둔비(NPSC : 미군과 군속 등의 인건비를 제외한 주한미군의 운영유지비)의 40~45% 밖
이재봉 (원광대학교 평화연구소장 겸 한중정치외교연구소장)요즘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왜곡과 망언이 기승을 떨치고 있다.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문제를 넘어 주변국들에 대한 침략 자체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일본이 과거 한반도를 ‘침략’한 게 아니라 동아시아에 ‘진출’했다는 억지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왜곡과 망언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하다.여기서 두 가지 모순을
김근식 (경남대 교수, 정치학)개성공단의 목숨이 경각에 이르고 있는데도 남북 양측은 기싸움에 밀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막다른 길로 가고 있다. 한미정상회담에서도 국면전환을 이끌만한 대북 메시지는 제시되지 못했다. 북의 도발 응징을 강조하면서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고만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을 뿐, 우리가 먼저 대화의 문을 열고 나가거나 대화의 손을 내밀만한
이승환(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한미정상회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 하는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른바 윤창중 성추행 사건으로 한미정상회담은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런저런 사건의 논란을 언급하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이 사건은 국민들을 자괴감에 빠트리고 있다. 일국의 대통령의 말을 대신하는 인물이 정상회담이 끝나기도 전에 미 당국의 수사를
이활웅 (본사 상임고문, 재미 통일연구가) 1961년 5월 16일 한국에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반란군의 소위 “혁명공약”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는다고 했지만, 그 수괴인 박정희 소장의 공산당 전력에 비추어 반란정권에 대한 지지를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최고회의 의장자격으로 방미한 박으로부터 반북친미의 충성확약을 받은 미국은, 그
한미연합사령부는 1978년 11월에 생긴 조직이다. 이 사령부가 창설되기 두 달 전인 9월 9일에 ‘제2회 MBC 대학가요제’가 열렸는데, 단국대 2학년이던 만 21살의 노사연이 ‘돌고 돌아가는 길’로 금상을 받았고 명지대생 23살의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이 입선작으로 선정됐다. 그 노사연
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지낸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갑니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게 마음과 몸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도 절감했습니다. 덕분에 북한 주민들의 심정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군사 위협을 생생히 느끼며 지내온 그들의 마음과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 원장) ‘제2의 6.25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분위기는 4월 11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남북대화 의지 표명’으로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간 느낌이다. 물론 류 장관의 대화의지 표명 이후에도 대화의 진정성 여부, 대화 이전 전제조건 문제 등을 두고 남북한 간과 북미 간에 치열한 &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