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 밤 나에게 이번 여행은 '방북기행'이 아닌 '통일기행'이었다. 금강산 관광을 갔을 때, 북측안내원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남에 가시면, 금강산 구경 좀 많이 오라 하십시오. 금강산 구경은 그냥 구경이 아닙니다. 통일 구경입니다. 통일을 몰랐던 사람도 이곳을 다녀가고 나면 다 통일하고 싶어 합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평양냉면 백두산을 내려오니 온 몸에 기운이 다 빠진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역시 개마고원을 지나 평양으로 돌아왔다. 누가 이제 뭘 좀 더하자면 ‘아 못하겠소. 나는 빠지겠소’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내 몸에 또 다시 힘을 불어 넣어 준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점심시간이지만 휴일도 아닌 월요일인데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천지에서의 아쉬움을 삼지연에서 달래다 '삼지연'을 '천지연'이라 잘 못 들었는가?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서 비탈길을 내려가 천지연못 바로 앞에 선듯하다. 천지에서 못 만져본 천지 호숫물을 여기에서 만져본다. 맑다. 팔소매를 걷고 차가운 물속에 손을 넣어 바닥 모래를 떠 얼굴 가까이 가져와 본다. 지저분한 찌꺼기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C’est Si Bon 천지!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천지에서 한발 두발 내려온다. 떠나려니... 아니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현실! 길바닥에 나 뒹구는 저 돌 하나도 예사롭지가 않다. 가만 보니 현무암 돌 틈으로 이끼류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하찮아 보이는 저 이끼조차 부럽다. 여기서 다시 천지의 물을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모닝콜이 울린다. '어서 일어나시라우요' 이랬을까? 하여간 벨은 울렸고, 나와 주동욱 선배는 일어났다. 7시까지 호텔정문 앞에 집합!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 양각도 호텔 1층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아직 어제의 전장(?) 탓에 나의 속은 아주 불편하다. 어제의 용사들도 하나 둘씩 보인다. 김 대표, 김 기자와 인사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만(萬)가지 경치 아래 감춰진 슬픔 다시 우리가 탄 버스는 평양시가지를 달린다. 오후가 되니 평양시민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 느낌이다. '남새상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우리네 '채소가게'라는 말이지만 '채소'는 한자말이고, '남새'는 우리말이니 정겨움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문병란 시인의 '대처승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가슴으로 찾아가는 평양” “내가 밟고 가는 눈 덮인 들판 길, 조심하여 헛밟지 말지어다. 오늘 가는 나의 발자취에 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1949년 4월 김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남긴 말이고, 이후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찾는 심경을 김구 선생의 심경과 같노라고 인용한 문구이다.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명박 정권에서 마지막 대규모 민간방북 딱 삼일이었다. 겨우내 쌓여있던 집 앞 마당의 눈이 다 치워졌다. 마당 시멘트위에 달라붙어 도저히 떼어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얼음덩어리들이 영상의 날씨가 삼일동안 이어지자 삽으로 이리 저리 쳐대니 ‘똑’하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얼어붙은 남북관계에서도 민족화해 기류만 형성돼도,
이창훈 (전 경희총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출장이 다 뭐냐?” 우리 집 앞마당에는 아직 다 쓸지 못한 눈이 그득하다. 첫 눈이 왔을 때, 반가운 마음에 다 쓸지 않고 놔뒀는데, 그 위에 다시 몇 번이고 새로운 눈이 쌓였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처음에 놔둔 눈이 녹아 시멘트 바닥에 딱 달라붙어 눈을 치우기가 불가능해졌다. 이제는 하루빨리 날이 따뜻해져 스스로
“김 기자 오바 하지 마시오” 평양순안공항으로 가는 길, 언제 또 만날지 모르는 박용호 안내원과 즉석사진을 찍어 나눠가졌다. 북녘 안내원들은 매번 사진을 찍으면 모델은 되어주지만 함께 찍은 사진을 받을 수 없기에 이미 즉석사진기를 가져간 터였다. 무엇보다 며칠간이지만 함께한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일행의 대부분이 감기 몸살과 전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청천강 (1) 2008년 9월 30일(화) 아침 7시 15분 양각도 호텔을 출발해서 15분간 평양 시내를 빠져나왔다. 이른 아침인데 시민들 출근 모습이 분주하다. 정류장마다 차를 기다리는 줄이 질서정연하게 길다. 공중전화 앞에는 서너 사람이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다. 순안공항과 신의주, 묘향산 갈림길에서 우리 차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묘향산 공부 (6) 보현사를 뛰어다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벌서 많은 참배객들이 빼곡할 정도였다. 북측 교육제도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내 짐작으로 중3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로 경내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만세루에서는 남녀 학생들이 장기 자랑을 하는 듯했다. 선생님이 사회를 보고 학생은 노래를 하고 끝나면 환
북측 인사, “이거 통일뉴스에 나만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거 아니냐?” “국제친선전람관이 보물창고라고 하는데 진귀한 선물도 있지만 전시관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 허름한 선물들도 있던데요.” 몇 번 와본 경험이 있다고 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김철웅 부회장에게 무심코 던진 질문에 아주 혼쭐이 났다. 김철웅 부회장은 “선물의 값은 따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묘향산 공부 (1) 개요 묘향산(妙香山)은 우리나라 서북쪽 묘향산 줄기의 주봉이다. 실제 주봉은 비로봉이다. 명산이며 조선8경 중 하나이다. 생전에 히말라야나 알프스는 볼 수 있어도 백두산이나 금강산 또는 묘향산은 꿈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왔다. 세월과 정세도 함께 흘렀다. 나는 백두산을 중국 쪽으로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백두산(8) 여기는 압록강 상류 개울을 건너면 동네가 달라지고 고개를 넘으면 군(郡)이나 도(道)가 갈린다. 말도 달라져 사투리가 생기고 풍습이 달라진다. 나는 지금 백두산 정상에 서 있다. 나침판도 없어 동서남북을 헤아릴 수 없다. 감(感)으로만은 참으로 허전했다. ‘아마도 여기서 이쪽으로 우묵한 것을 보니
북녘에서 무상의료를 받다 저녁에는 양각도호텔에서 북녘의 환송만찬이 이어졌다. 환영만찬과 마찬가지로 자리 잡은 일행은 3박 4일이라는 일정이 너무 빨리 지나감을 안타까워하며 만찬을 즐겼다. 일부는 잠은 남녘에 가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으니 오늘은 밤새도록 점도 자지 말고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함께 자리하고 있는 이들과 친구를 삼기로 하기도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백두산(4) 백두산을 오르면서 나는 백두산(장백산)을 중국 쪽으로 열 번은 넘고 스무 번은 안될 만큼 올랐다. 열 번까지는 헤아렸지만 그 이후는 그냥 다닌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서 좋았다. 지금 중국은 장백산 관광특수를 누리고 있다. 거기는 중국 거대 인민적 인구 때문에 이어지겠지만 한계가 있다고 본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백두산(1) 비행기에서 비행기에 금연석과 흡연석이 있을 때 나는 담배를 피면서도 금연석에 앉았다. 좌석을 배치 받으려고 줄을 섰다가 내 차례가 되면 못하는 영어지만 꼭 먼저 하는 말이 있었다. “No smoking. Window side please.” 이 말 한 마디로 나는 비행기 날개를 비껴 앉으면 내 하늘
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평양(1) 주체사상탑 2008년 9월 29일. 이른 아침 베개봉호텔을 떠나 삼지연공항을 이륙, 평양순안공항에 내렸다. 양각도호텔에 잠시 들려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다. 두 번째 먹는 평양 옥류관 냉면이었지만 맛이 처음 같지 않았다. 5년 전에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때 먹던 그 맛이 아닌 것은 내 입맛이 변해서인
주체사상탑 다음으로는 주체사상탑을 방문했다. 동대원구역 신리동에 위치한 주체사상탑은 198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을 맞아 주체사상을 창시한 김 주석의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2년여에 걸쳐 건립한 탑이다. 탑신의 높이는 150m이며 봉화의 높이는 20m로 세계적으로 석탑 중에서 가장 높은 탑이라고 한다. 탑신의 앞, 뒤, 양옆에는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