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의 무지개』, 책 제목만 보아서는 언뜻 떠올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책의 주제와 내용은 매우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을 펼쳐들기 전에 먼저 저자에 대해 알고 가는 것이 좋을 듯싶다.“이 사건에서 내 자신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버겁고, 부담스럽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KAL기 사건은 내 존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저자인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는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사라진 KAL858기 사건과 씨름하며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북한공산집단의 적화통일 책략수행을 위한 인간도구로 개조되어 이 사건 범행에 투입된 한낮 꼭둑각시에 불과할 뿐”(2017060009, 60쪽). 1988년 4월 12일, 정부가 김현희에 대한 특별사면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KAL858기 “사건의 실질적인 주범은 김일성 부자라는” 이야기다.그리하여 정부는 김현희가 “사건의 진상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유일한 생존자로서 … 북한공산집단의 폭력성과 침략적 근성을 생생하게 입증할 역사의 산 증인이라는 점 등에 비추어 … 대한민국 품안으로 과감히 수용하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앞선 글에서 밝혔듯, 1990년 11월의 재수색은 목적과 원칙에 문제가 있었고, 11월 16일 성과 없이 끝난다. 수색 종료를 알려온 문서에는 다음 내용도 있다. “주재국[버마] 당국이 최근 TAVOY 인근 해역에서 비행기 파편 일부를 수거, 보관하고 있다고 알려옴에 따라, 11.20(화)” 수색단으로 와 있던 대한항공 안전담당 책임자 “김상광 상무” 등이 물체를 살펴봤다(2016070044, 237쪽). 이는 같은 해 9월 27일 “미얀마 수산청 소속” 어선이 발견한 것이었고, “파편 3점으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이번 문서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1990년에 있었던 버마(미얀마) 현지 수색이다. 왜냐하면 이는 2021년의 상황을 어느 정도 떠올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2월 현지 조사를 하려 했다(그런데 버마의 쿠데타로 계획을 연기했다고 한다).1990년 3월 그 유명한 올림픽 표식이 있는 KAL기 잔해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2개월 뒤 서울로 옮겨진다(진위 논란에 대해서는 박강성주, 『눈 오는 날의 무지개: 김현희-KAL858기 사건과 비밀문서』, 218∼219쪽). 그 후속조치로 대한항공은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편안한 자세로 선다. 두 손을 머리에 댄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시간이 되돌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가 나온다. 기억을 더듬으려 애쓴다. 집중하느라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 또 집중한다. 이윽고 떠오른 단서. 이제, 눈을 뜬다…핀란드 드라마 이다. 이 범죄수사물에는 주인공이 기억을 더듬어 단서를 찾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단서는 어떤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숨어 있다. 결국 얼마나 집중해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일 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진정을 만장일치로 ‘각하’ 결정했다. 이에 따라 현 정부에서 천안함 사건 재조사는 어려워졌다.천안함 사건은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인근에서 천안함이 반파 침몰돼 해군 장병 40명이 사망하고 6명이 실종된 사건으로, 정부의 민군합동조사단이 북한의 ‘1번 어뢰’에 의해 격침됐다고 발표했지만 끊임없이 의혹이 제기돼 왔다.위원회는 2일 보도자료를 통해 “진정인 적격여부에 대한 위원회 회의결과, 진정인이 천안함 사고를 목격하였거나 목격
안기부 ‘경미한 형량’, 외교부 등 ‘응분의 형량’ 주장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KAL858기 사건의 폭파범으로 체포된 김현희를 한 번도 감옥에 수감하지 않았고, 오히려 ‘신문과정시 자백한 북한의 사주 사실 번복 가능성’ 등을 이유로 경미한 형량을 주자고 주장한 것으로 확인됐다.이 같은 사실은 외교부가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를 29일 공개하면서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올해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1987-90년 김현희의 사법처리와 1989-90년 KAL기 수색 및 잔해 인수 관련 공문이 포함됐다.‘KAL기 폭파사건 관련범인 처벌문제
“우리 KAL858기 가족들은 정부가 가족의 이런 아픔을 이해하고 이번에 시작되는 수색 인양을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닌 오직 가족의 아픔을 풀어준다는 마음으로 임해주길 바란다.”‘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강대길 천주교 예수회센터 214호에서 개최한 ‘제33주기 KAL858기 사건 희생자 추모식’은 “33년의 기다림, 지금 곧 찾으러 갑니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부의 미얀마 현지 수색에 대한 기대감 속에 진행됐다.가족회와 진상규명위는 임옥순 가족회 회장이 낭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대한항공(KAL) 858기 잔해 수색이 33년 만에 한국과 미얀마 정부의 공조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외교부는 27일 김건 외교부 차관보가 25,26일 미얀마를 방문해 찬 에(Chan Aye) 미얀마 외교부 사무차관과 한-미얀마 정책협의회를 개최했다면서 관련 소식을 전했다.외교부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김 차관보는 KAL858기 동체 추정 물체가 미얀마 인근 해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한 사실 관계 확인 노력에 대해 미얀마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대해
2000년 6월 평양에서 만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남북관계 해빙 기류를 타고 그해 10월 31일 인터넷신문 [통일뉴스]가 첫발을 떼었다. 민족화해의 소식을 전한지 20년, 스무 살이 된 [통일뉴스]가 20대 청년 4명과 좌담회를 열었다.화두는 ‘6.15공동선언’에서 가져왔다. 이 선언 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밝혔다. 핵심어인 ‘북한’, ‘통일’, ‘민족’에 대한 20대의 생각을 들어봤
천안함 사건에 의혹을 제기해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10년째 재판을 받아온 신상철 전 천안함 민군합동조사위원이 6일 2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윤강열 부장판사)는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학문의 자유’와 ‘중요한 공익적 관심사’라는 이유 등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천안함 사건에 대한 민군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원심(1심) 재판부는 2016년 1월 25일 검찰의 공소사실 34건 중 32건을 무죄로 선고했지만 ‘고의 구조 지연’과 ‘고의 증거 인멸’을 주장한 두 건의 게
손병선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나와 국가보안법의 첫 악연은 4월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이 일어났다.나는 부산대학 정치학과 3학년으로 부학생회장을 맡아 “지금 이 정권에서 이러고만 있을 것이냐, 우리가 나서야하지 않겠느냐, 다 같이 나서자!”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을 나와 서면으로 갔다.당시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박홍섭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전 마포구청장 1960년 2월말로 기억한다.한성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동조 형이 학교로 찾아왔다. 나는 다음 달이면 고3으로 진급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어서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교정 뒤에 있는 노고산으로 올라갔다.당시 노고산(지금의 서강대학교 후문 방향)은 동기생끼리 싸움 아니면 담배를 피우는 곳이었다
조회환 / 사월혁명회 회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부정부패와 장기독재에 반대하여 일어난 4월혁명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위대한 혁명이었다. 20대의 대학생이 80대가 되었지만 그때의 거국적 함성과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잘못 꿴 민족사의 첫 단추1945년 8‧15 해방 직후 이승
김동선 / 사월혁명회 회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1960년 3월 15일, 그날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재학 중이라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투표를 위해 그 전날 인천 소래에 있는 본가에 가 있었다.투표일에 동네 반장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셋이 같이 투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하일민 / 전 사월혁명연구소 소장,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1- 4월혁명은 역사적 변혁운동이다. 물론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권력의 유지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원조경제의 감소와 산업재편성을 위한 계급·계층간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한 실업자, 빈민의 양산, 국제정세의 데탕트 흐름
10년 전,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일 시작돼 5월 2일까지 진행된다.청원인은 ‘정부는 국제적으로 가해자가 인정되지 않은 ‘천안함 폭침’을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겨서는 안 된다’(1407번) 제목의 청원글에서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정권이 두 번 더
김승균 / 사월혁명회 조국통일위원장, 민주평화노인회 이사장 우리나라에서 민중저항 역사는 천년을 거스른다. 고려시대의 망이‧망소이의 난, 또는 사노 만적의 난을 시초로 하여 빈발한 봉건지배층의 억압과 학정에 궐기한 민중의거를 손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조선왕조 봉건사회에 들어와서는 민중폭동은 더욱 확대되고 빈발하여 봉건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1987년 11월 29일, 115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운 채 사라진 KAL858기 사건에 대해 당시 외무부는 ICAO(국제민간항공기구) 이사회에서 북한 규탄 결의를 도출하기 위해 외교력을 집중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른바 ‘무지개 공작’의 대외홍보지침을 충실히 수행한 셈이다.결국 ICAO 이사회에서 규탄 결의가 채택됐지만 '북한'은 명시되지
“천안함은 북한에서 제조한 감응어뢰의 강력한 수중폭발에 의해 선체가 절단되어 침몰한 것으로 판단하였다.”10년 전, 민·군 합동조사단은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인근에서 반파·침몰해 46명의 해군 승조원이 사망한 ‘천안함 사건’의 조사결과를 이같이 발표했다. 이른바 북한의 ‘1번 어뢰’가 천안함 아래 수중에서 폭발해 버블제트의 위력으로 배가 두 동강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