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7)불경기 “자고새면 또 발문 오십평생 이 꼴은 처음”쌀밖에 모르는 수요자뜨내기장수조차 허탕질한 달 동안 봇짐 싼 점포만 천사백 〇... 절량의 숨 가쁜 고비에 서울은 불경기 때문에 몸서리 치고 있다.거래가 드물고 돈이 회전하는 구실을 잃었다.번화가의 백화점은 물론 시장 전반에 걸쳐 한산하고 매상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서울시내에는 지난 2월달 현재 38개소의 시장이 있었다.혁명 전인 92년도에는 이보다 하나 더한 39개 시장에 상점 수는 1만1천59개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새 정부가 들어선 작년에 시장 두 개가 폐쇄되고 점
아버지가 돌아온 뒤 우리 가족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가장의 부재로 울적했던 집에도 웃음이 퍼졌다. 10년 동안 4남매를 키우며 구명과 석방에 매달렸던 어머니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처음 아버지가 구속됐을 때 받았던 소외와 외로움도 석방의 감격 속에 모두 씻겨 내려갔다. 어머니는 다시 찾은 행복에 감사하고 안도했다.하지만 어머니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90년 3월이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내가 그만 경찰에 잡혀 구속되고 말았다. 아버지가 석방된 지 겨우 1년 3개월이 지난 때였다.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졌다. 잊었다고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북으로 간 우리 민족의 현대 유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 한마디로 그는 전설적인 천재화가였다. 그런데 그가 1988년 해금 작가가 된 이후 남쪽에서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는 몇몇 미술평론가와 근·현대미술사가(近·現代美術史家)에 의하여 시도되어 왔다.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시”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연구는 이쾌대의 남쪽 활동에 국한된 면이 있다. 이쾌대가 북으로 간 이후의 활동과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는
한⋅일회담 양측대표의 좌담회 석상에서 언제나 일본대표 택전렴삼씨는 「일청⋅일로양전쟁은 일본을 위협하는 세력이 한반도로 진출했기 때문에 그것을 압록강 저편으로 몰아내는 싸움이었다. 우리는 세 번째 일어서서 삼팔선을 압록강 바깥까지 밀어 올리지 않으면 조상에 대해서 면목이 없다. 이것이 일본외교의 임무다. 그렇다고 해서 군비가 약한 일본으로써 총칼로써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외교와 정치의 힘으로 삼팔선이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만들어야겠다.」고 말했다. 옛날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식민지로 해서 침략했을 당시에 취한 정
시대는 여전히 암울했다. 전두환의 폭정에 맞서 대학생들의 투쟁은 갈수록 고조됐다. 감옥은 잡혀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재야에서도 구속자 석방투쟁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특히 19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이 손잡고 만든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전두환 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이다. 총선 결과 민주화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구속자 석방 요구도 높아갔다.어머니도 마음이 급했다. 그동안은 기약 없는 무기수 신세라 석방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민주화의 기운이 고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요즘 리승만(李承晩, 1875~1965)을 다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되어 유행하고 있다. 이 영화는 리승만을 미화하고만 있다. 리승만의 과(過)를 무시하고 그의 모든 것을 공(功)으로 분장하고 있다. 독자분들은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 진상(眞相)과 진상(進上)우리 말에 ‘진상(眞相)’이란 단어가 있다. ‘진상’이란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잘못 알려지거나 감추어진 사물의 참된 내용이나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또 ‘진상(進上)’이란 단어도 있다. 이 ‘진상’은 “조선시대
한국의 휴전선은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 통한의 비원이 당파성에 의해 은폐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민족통일의욕의 사회심리학적 기초어느 때인가 분단된 서독의 삼대신문의 하나인 「디⋅벨트」지의 기자가 판문점을 시찰하고 난 뒤 휴전선을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무의미한 경계선」이라고 지적한 것은 양단된 독일의 경계선에 대한 간접적인 항의였기도 하겠지마는 우리들로서 생각해 보면 해 볼수록 우리들의 의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만들어진 것이 이 경계선이다. 역사적으로 힘에 의해서 한 민족이나 국토를 부자연스럽게 갈라 놓은 일은 없는
아버지가 구속된 뒤 우리 4남매에게 방학은 특별한 의미가 됐다. 방학이 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1년에 두 번씩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에게 가는 날은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다.1981년 7월 말, 우리는 전주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전라선 통일호 첫차에 올랐다. 4시간여가 지나 전주역에 내린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가 한참을 달려 평화동에 있는 전주교도소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높다란 담장으로 세상과 벽을 쳐놓은 하
껍질을 벗겨 「삶」을 잇는다... 〇... 산 에는 나무가 없다. 마구 베어내는 「파괴」의 힘 앞에 쥐꼬리만한 조림사업이 무색할 노릇이다.〇... 무실방면으로부터 해일아름드리 통나무가 십여 트럭씩 들어온다고 한다. 그러나 작년에 비하면 반입량은 절반도 못 된다는 현장감독의 말이다.〇... 이른 새벽부터 나무껍질을 벗기기 위해 아낙네들이 모여든다. 삶의 방도가 막연해진 아낙네들은 나무껍질이라도 벗겨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〇... 한사람이 삼십환을 내면 힘자라는 대로 벗겨갈 수 있다. 돈 몇 십환도 대견하지만 「몇 십리 둘레 산에는 나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 초기에 활동한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신소설가(新小說家)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민족 지조를 지킨 첫 근대 소설가이다. 계몽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회유에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반면에 같은 신소설가로서 이완용의 비서를 지낸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일제의 조선 강점에 앞장서 협력한 철저한 친일파였다. 이해조의 신소설이 이인직의 신소설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가 작품의 우수성에도 있지만, 민족의 지조를 지킨 그의 애국 애
아버지는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확정받고, 전주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기결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기결수에게는 면회도 편지도 한 달에 한 번만 허용됐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음의 늪에서 간신히 빼냈지만,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어머니에게 이별의 아픔보다 먼저 닥쳐온 게 있었다. 생활고였다. 혼자서 중고등학생 넷을 데리고 살아야 했다. 이웃과 친척의 발길이 끊긴 집은 사방이 적막강산이었다. 엄동설한에 허허벌판으로 내쫓긴 것만 같았다.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사한 집은 은행 대부를 끼고 어렵게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1. 제주 1608년판 『듕용언해(中庸諺解)』기존의 제주 판본(版本)과 책판(冊板) 연구에서 『듕용언해』 1책이 제주에서 1608년 12월에 목판본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연구자에 의하여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 제주판 『듕용언해』의 실물도 국립중앙도서관에 현전하고 있다.원래 『듕용언해』 1책의 초간본은 교정청(校正廳)에서 『중용(中庸)』에 한글 토를 달고 풀이하여 1590년에 활자본으로 간행한 책이다. 이 1590년 활자본을 1608년 제주에서 목판본으로 복각하였다. 초간본
원진욱 / 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거족적 통일운동연합체’인 범민련의 결성은 통일운동의 역사적 성과 민족과 민중의 자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운동을 하는 데는 노선과 정책, 조직과 대중적 기반이 있어야 성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더불어 모든 운동은 역사성과 정통성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운동이 해당 사회의 기본과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는지, 대중의 근본요구에 부합하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1988년 청년학생들의 헌신적 투쟁으로 통일운동의 포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대중운동으로 고양되면서
백범 김구 민족의 영원한 지표였다.... 위대한 유지는 겨레 가슴속에 길이 간직...“차라리 38선을 베고 죽으리라”▲ 편집자주=지금 우리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 해 있다. 정국의 불안과 사회의 혼란⋅불안정은 거의 극에 달해 있다. 통일만이 살길이라는 젊은 청년학생들의 울부짖음이 겨레의 귓전을 울린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잃어버린 거성... 위대한 영도력과 애국심을 가지고 구국광정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작고한 지도자들...을 애타게 추모하는 념 간절하다. 혹은 흉탄에 혹은 불의의 병액으로 민족의 거성을 잃어버린 우리는 지금
사형선고 다음 날, 어머니는 아침 일찍 서울구치소로 달려갔다. 밤새 잠을 설쳤지만 피곤할 새가 없었다. 무서운 악몽에서 얼른 빠져나오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아버지 손목에는 수갑이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사형수에게는 24시간 수갑을 채우는 게 규정이라고 했다. 그 상태로 밥도 먹고 용변도 보고 운동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우리 가족 앞에 닥친 현실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여보, 내가 열심히 구명운동을 할게요. 세계적인 수학자인 당신을 절대 함부로 못 할 겁니다. 우선 대구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 초기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판본들 가운데 권제3의 말미(末尾)에 “황진손서(黃振孫書)”라고 필서자(筆書者)를 밝히고 있는 고본(古本)이 있다. 그러나 황진손에 대한 인적 사항은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를 규명하는 일은 이 판본의 츨판 연대와 가치를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황진손에 대하여 탐색하고자 한다,1. 황진손에 관한 『세조실록』 기록황진손(黃振孫)은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곳 나온다. 『세조실록』 권2, 세조1년(1455년) 12월 27일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시민모임 독립’과 ‘지역사’(지도에 역사를 새기는 사람들)가 선정한 2월의 근현대사적지는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벌어진 2·8독립선언의 역사현장 (3-chōme-3-12 Nishikanda, Chiyoda City, Tokyo)입니다./ 필자주 올해는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반방에) 선언”한 3·1운동 105주년이 되는 해이며, 2월 8일은 그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2·8독립선언 105주년 기념일이다. 1919년 2월
아버지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수사를 받았고, 한 달쯤 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은 경기도경 대공분실에서 특별히 파견 나온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혹독하게 당했다. 특히 이재문 선생을 비롯해 초반에 체포된 사람들이 심하게 고문당했다. 아버지는 그나마 막판에 잡혀 덜 당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할까.구치소로 이송됐지만, 여전히 면회는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라고 했다. 면회는 물론 편지마저 불허됐다. 하지만 어디에도 따질 수가 없었다. 붉은 딱지가 붙은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1993년과 1994년에 우리나라의 초상화에 관하여 각 한 편의 글을 쓴 바 있다.①1993년 9월에는 「단원 김홍도의 초상화를 찾아서」를 탈고하여 월간 『미술세계』에 기고하였더니, 편집부에서 (1)과 (2)로 나누어 10월호 pp.160~163에 전반부를 게재하였고, 후반부는 두 달을 건너뛰고 이듬해 1월호 pp.138~143에 게재하였다.(그 사이의 11월호와 12월호에서는 필자의 다른 글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를 나누어 게재하였다.)②1994년 7월에는 월간 『서화정보
세상 (6)교통지옥 다시없는 지상저승기력없는 행정을 본 떠 걷자니 흙탕 튀겨 짜증차타자니 짐짝 신세 〇...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이지만 교통사정은 저승처럼 괴롭다.5백여 명의 교통순경이 길에 깔려서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도통 나아질 줄을 모른다.혁명후 질서는 더 엉망이어서 하루 평균 즉결재판부에 회부되는 수만 3백건, 많은 날에는 7백 건으로 상승한다.기력 없는 이 세상 바람을 타고 운전사들도 점점 고약해져만 가고 있다. 순경이 정차명령을 내려도 그대로 내빼기가 예사이고 걸리면 돈을 던져주면 그만이라는 배짱들이다.교통위반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