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23일, 1987년 115명의 승객을 태운 채 사라진 대한항공(KAL) 858편의 동체로 추정되는 물체를 미얀마 안다만 50미터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단독보도했다.대구MBC 심병철 기자 등 MBC 특별취재팀은 이날 보도에서 “MBC 특별 취재 팀은 1년 가까운 추적 끝에 미얀마 안다 만의 50미터 해저에서 KAL 858기로 추정되는 동
“우리 큰애가 세 살, 작은애가 6개월 돼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둘 다 아빠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고, 아빠를 잘 모른다.”(고 최만구 부인 연제원)“주위에서 말렸다고 한다. 여태까지 쉬지 못하고 허리가 안 좋으니까 비행기는 무리다. 월요일날 가라. 부득부득 가겠다는 거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보니까 11월 29일이 결혼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날 늦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수 김광석은 그렇게 노래했다. 과거청산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너무 늦은 정의도 정의인 걸까?’이명박 정부 때 중단된 과거청산을 새로 이어가기 위한 노력이 빛을 못 보고 있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를 되살리기 위한 법
국정원, 대법원 판결에 따라 에 ‘무지개 공작’ 문건 추가 공개 국가정보원이 추가 공개한 ‘무지개 공작’ 문건에는 일본 여권을 가진 ‘하치야 신이치’(김승일)과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를 “북괴와 연계된 인물로 추정”했고, 사건 전후 9일에 걸친 이들의 동선이 이미 파악된 것으로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당시
1987년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편 사건을 대통령선거 등에 활용한 공작이 담긴 이른바 ‘무지개공작 문건’을 추가 공개하라는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국가정보원(원장 서훈)이 항소했지만 대법원은 8월 30일 이를 기각했다.이에 따라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 음모 폭로 공작’, 이른바 ‘무지개 공작’ 문건 중 그동안 비공개된 하치야 신이치(김승일),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KAL機[기] 실종事故[사고] 報告[보고]”(2016070046, 2쪽). 1987년 11월 29-30일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외무부 청와대 보고서 제목이다. “실종”이라는 말이 주목된다. 정확한 장소, 원인, 생존자 여부 등을 모르지만 비행기가 사라진 것만은 분명한 상황. 이 점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실종이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정보공개 청구로 외교부 문서를 포함한 KAL858기 자료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올해 공개된 비슷한 자료를 다시 보며 분명해진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1983년 아웅산 사건과 1987년 대한항공기 사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아웅산 사건은 북쪽이 전두환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버마/미얀마 아웅산 묘역에 폭탄을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지금도 그렇지만 1980년대 한국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었다. 정부는 이 교민들을 KAL858기 관련 대북규탄 활동에 적극 동원했다. 1988년 1월 14일 당시 외무부 국제기구조약국은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대책 보고” 문건을 작성한다. 여기에는 “미.일 등 지역에서 교민들에 의한 자발적 북한 규탄 데모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흔히 언론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보도를 생명으로 한다고 이야기된다. 물론 (공정성과 객관성의 개념 자체에 대한 논의를 떠나) 이 원칙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예컨대 KAL858기 사건 관련해 국내 언론이 ‘받아쓰기’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곧, 언론이 적극적인 취재나 검증 없이 정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전 세계를 대상으로 펼쳐진 KAL858기 대북규탄 작업에는 1988년 2월 9~24일까지 열린 ‘항공법에 관한 국제회의’도 포함됐다. 이 회의는 유엔 아래에 있는 전문기구로 캐나다 몬트리올에 본부를 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주최했다.노재원 당시 캐나다 주재 대사(전두환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외무위원장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한국의 이른바 우방국을 중심으로 많은 나라들이 KAL858기 사건 관련해 (북쪽을 지칭하거나 그러지 않는 형태로) 규탄성명을 발표한다. 대북제재 조치가 발표되기도 했는데, 정부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었다.일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88년 1월 18일 박쌍용 당시 외무부 차관은 오타 히로시 한국 주재 일본대사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한국 정부는 KAL858기 사건 관련해 대북규탄 활동을 국내외에서 적극 펼쳤다. 국제무대를 기준으로 정부가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논의다.1987년 12월 외무부의 국제연합과가 작성한 “KAL 858기 폭파사건의 유엔 제기 문제” 문건에서 이에 대한 계획과 고민을 엿볼 수 있다.기본적인 문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1988년 1월 15일, 안기부가 KAL858기 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하자 북쪽이 바로 반박성명을 낸다. 북은 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내용이었다(비슷한 맥락의 성명이 1987년 1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박강성주,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비행기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정부는 사건이 북의 테러라고 거의 확신했고, 수사결과를 1988년 1월 15일 공개한다. 발표 하루 전, 최광수 당시 외무부 장관은 김현희가 1987년 “12.23. 17:00경 심경 변화를 일으켜 한국말로 범행을 인정하고 자백”했다는 내용을 재외공관장 모두에게 알린다.이에 따르면 북
박강성주 (KAL858기 사건 연구자) “왜냐하면 어제보다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을 잡기 위한 노력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실수와 잘못이 뒤따른다. 이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그리고 날아온 따끔한 질문. “내가 왜 자네들에게 사건을 계속 맡겨야 하나?” 그러자 위와 같은 답이
서울고등법원은 1987년 발생한 대한항공(KAL) 858편 사건을 대통령선거 등에 활용한 공작이 담긴 이른바 ‘무지개공작 문건’ 전면 공개를 요구한 김치관 기자의 국가정보원장을 상대로 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서울고등법원 제4행정부(법관 이승영, 박선준, 한소영)는 28일 오후 2시 제1별관 제306호 법정에서 열린 ‘정
“죽을 때까지 꼭 밝히려고 노력할 것” “32년전 미얀마 바다에 내팽개친 KAL858기 탑승객 115명의 국민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그분들을 미얀마 안다만 해역에 결코 버려둘 수 없습니다.”KAL858기 가족회는 10일 오후 1시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외교부가 32년 만에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KAL858기 사건을 재구성해 볼 때 혐의자 체포는 기적에 가까웠고, 극적인 역할을 한 ‘수훈 갑’은 단연 유시야 주 UAE대사관 참사관이다. 또한 가장 큰 미스테리를 남기기도 했다.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 김포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KAL858기가 115명의 승객(한국국적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전두환 정권은 수색 보다는 범인 추적과 인도에 주력했음이 32년 만에 공개된 외교부 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이는 이 사건을 북괴 테러로 예단하고 대통령선거에 활용한 ‘무지개 공작’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으로 보인다.외교부가 이번에 공개한 30년이 지난 문서들 중 KAL858기 관련 문서는 1만 건이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후보자는 25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KAL858기 희생자 유해와 동체 잔해 수색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밝혔다. 1987년 11월 29일 KAL858기가 사라진지 32년 만이다.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25일 국회에서 진행된 최정호 국토부 장관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국토교통위 소속인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는 인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