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대동강 새벽 풍경10월 5일(맑음), 북한 체류 이틀째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5시 좀 넘은 시간이다. 평양 시내에 왠 닭울음소리? 잠결에 잘못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양 첫 밤이라 너무 긴장했을까. 6시 15분 기상. 아직 어둑어둑 하다. 안내원이 벌써 나와 몸을 풀고 있다. 앞으로 3주간 나를 안내해 줄 김광현 참사를
정찬열 / 재미동포 시인 왜, 어떻게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는가 미국에 건너온 지 30년이 넘었다. 시집간 딸이 친정집 걱정하듯 밖에 나와 살다보면 고국에 관심이 많아진다. 안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밖에서 보면 잘 보이기도 한다. 고국에서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들 중 상당부분이 분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북분단은 한반도
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평양엔 왜 가려고 하냐?” “왜 거기로 가야 되나?”“뭣 하러 가느냐?”“꼭 가야 하는 거니?”“가서 못 돌아 오면 어쩌려고.”내가 평양으로 가겠다 하니 주변 일본인들의 입에선 이런 말들이 튀어 나왔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러시아로 한국으로 또 다른 나라들에 떠날 적엔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 잘 다녀오라 한 말들이 돌아왔
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원산행에 앞서 ‘오빠’, ‘동생’을 만들다 가족, 친척방문을 다닐 때 북에서 많은 경우 자동차를 쓰게 된다. 택시를 쓰는 줄 알았더니 대표단 단원들은 해외교포총국 차를 쓴다는 것을 첫 방문지를 찾았을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개인 일정은 같은 안내원, 운전수가 동행한다는 것이었다.북에서는 보통 누구를 부를 때 이름
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오늘 점심부터는 우리 집에서 먹어야 돼” 평양에서 가고 싶은 곳, 그리운 사람들은 끝없이 많았다.이번 방문의 목적의 하나는 오래 못 봤던 친척, 친지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면회, 방문을 예정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내가 잘 알거나 어릴 적 함께 지낸 사람들이라 오랫동안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역사가 있었
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다시 찾은 평양호텔 비 오는 만수대언덕을 뒤로 하고 버스가 다시 떠났다.“평양에 요새 비가 잘 오지를 않았던데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시자마자 비가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을 가져다 오신 셈입니다”고 안내원 한 사람이 웃으며 말한다.사실 비가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았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호텔 식당에서 야채를 구경하기 어
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33년 만에 찾는 북쪽 땅은 어떤 모습으로 날 맞아줄까? 대학 졸업한지 3년째 겨울 석 달 동안을 머문 그 땅은 이제 내겐 아득히 먼 낯 설은 땅이 되고 말았다.만경봉92가 북과 일본을 맺어주고 많은 동포들이 그곳을 다닐 적에도 조일 간엔 숱한 문제와 과제들이 가로 놓여져 있긴 했지만 재일동포들은 조국의 북쪽 땅에 가족
엄주현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사무국장, 운영위원) 대북지원 단체 상근자로 활동하면서, 이명박 정부 이전에는 1년에 평균 3-4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2010년 천안함 사태로 취해진 5.24조치로 대북 물자 반출 및 방문이 불허되면서, 2010년 5.24조치 이전 5월 5일 평양을 방문한지, 16개월 만인 2011년 9월 17일부터 3박 4일
공장건설(工場建設) 공장을 건설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장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고,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제때 공급하거나 받을 수 없는 개성공단 밖에 건설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겨우 용접공 3년의 경험밖에는 없고 10여년을 이쑤시개 하나 만들어낼 줄 모르는 업종에 몸담았던 내게는 특히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돌
민속여관(民俗旅館) 협력사업 승인을 받은 후 해가 바뀐 1월, 석재공장의 설계도면을 들고 전기와 철구조물, 기계설비 기술진과 함께 개성을 찾았다. 개선도 룡강의 장철수 사장 등을 동석시켰다. 직전 공화국에서 손꼽힌다는 석재 전문가를 동석시켰었는데 이 전문가는 경험이 풍부하고 해외시찰도 자주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추었다. 나아가 체계적인 연구 자료가 많았는데
개선총회사 추석을 며칠 앞두고 단동대표부에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우리의 상대회사는 민경련 산하 5개 회사 중 광물을 취급하는 명지총회사였다. 그런데 단동대표부에서 보내온 초청장은 개선총회사 명의였다. 민경련에는 명지, 개선, 새별, 삼천리, 광명성총회사 등 5개 회사가 있는데 취급분야가 각각 달랐다. 개선총회사는 원래 농수산물이 전문이었다. 명지총회사가 광
숭양서원(崇亮書院) 숭양서원은 포은 정몽주가 살았던 곳으로, 1573년에 양반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는 사립교육기관으로 복구하였다. 서원을 향한 골목길 앞엔 깨지고 부서진 공덕비(功德碑)가 무수하다. 선정을 베풀고 간 관리를 기리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세웠다는 공덕비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현직에 있는 관리들이 세운 공덕비가 훨씬 더 많다고
박연폭포(朴淵瀑布) 자남산 언덕길은 주석상 앞에서 좌우로 갈라진다. 좌로 가면 천마산, 우로가면 선죽교와 고려박물관으로 간다. 우리 일행은 차량 다섯 대씩 두 개 조로 나뉘었는데, 우리 조는 오전에 박연폭포를 갔다. 좌로 꺾은 북안동길, 남대문이 고즈넉하다. 남대문은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5년 뒤에 복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루
도라산출입사무소 자유로가 끝나는 곳, 임진강을 가로지른 통일대교엔 완전무장한 군인과 쇠꼬챙이를 사정없이 박은 바리케이트가 살벌하다. 다리를 건너면 민간인 통제선 구역이다. 다리 건너 보이는 도로표지판 화살끝은 둘로 갈라져 있다. 바로가면 판문점이고 왼쪽은 도라산 출입사무소(CIQ)다. 새로 칠해 선명한 노란색 화살표가 눈을 찌른다. 여기서부터 어머니 고향땅
개성(開城)가는 길 처음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단동대표부를 찾은 때는 한여름의 태양이 대지를 발가벗기던 2005년 7월말이었다. 부시정권의 집요한 반북정책으로 6자회담은 표류하며 조미관계는 파열음을 냈지만, 남북관계는 개성공단 조성과 함께 교류협력이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었다. 심양에서 단동까지는 자동차로 세 시간여 걸렸는데, 만주 벌판은 가도 가도 끝
9월 17일, 개성에 있는 왕건릉을 찾아갔다. 왕건은 아직 드라마를 못 봤다. 사극은 은근히 역사공부가 된다. 우리 재일동포들은 어쩌면 사극을 보면서 민족의 자부심을 키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왕건릉을 뒤로 하고 고려박물관에 갔다. 고려박물관 건물은 11세기 초에 대명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별궁이며 다른 나라에서 온 사자가 머무는 시설로 쓰였고 순천관이라고
8월 28일은 축제날이었다. 청년절 5돐 기념공연이 있어서 김일성광장에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여자들은 화려하고 예쁜 치마저고리를 입고 남자들은 멋있게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다. 그 속에 키가 크고 엄청 잘생긴 사람이 혼자 서 있었다. 원빈과 닮았지만 더 잘생긴 달콤한 얼굴이었다. 배우 같았다. 그러나 군복을 입고 있다. 낯선 군복이다.
조국에서 보낸 나날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 경험이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을까. 내 인생은 조선대학 편입과 조국방문, 그리고 남쪽 고향땅 체류를 통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조국방문은 내가 통일일꾼의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남쪽에서 살 수 있게 되면서 우리 땅에서 직접 통일을 위해 이바지하고 싶다는 내
내가 통일운동을 알기 훨씬 전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나는 꿈속에서 평양 대동강 위를 달리고 있었다. 대동강 주변으로는 푸른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더욱 푸르게 빛나고 있었고, 단정하게 정리된 건물들이 나무와 어우러져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때 내가 무엇 때문에 평양 대동강 위를 달리고 있었는지, 왜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양 거리가 꿈에 나왔는지 지금도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방북을 마치고 한 달 뒤, 할머님은 86세의 긴 세월을 마감하셨다. 마치 당신이 가보기를 그토록 염원하였던 북녘 땅을 손자라도 다녀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 나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찾아들어갔다. 아내가 나대신 이틀 동안 할머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먼 여행을 다녀온 남편을 맞이한 아내의 표정에서 반가움을 읽을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