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6, 9일 두 번의 미군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리자 8월 14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미국과 영국에 통보했다. 8월 15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자기네 국민에게 알렸으며 일본 정부는 8월 16일 일본군에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맥아더는 미군이 서울에 진입해서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필자는 우리 민족이 본연의 정신적 정체성을 잃으면 소멸한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 민족은 외래 사상과 유사 종교에 의하여, 그리고 이른바 자칭 민족사학자들의 황당사관에 의하여 소멸의 길에 들어선 듯하다. 민족의 정체를 흐트러트리는 것은 주체의 완성이 아니라 민족을 소멸시키려는 시도이다. 이에 필자는 민족사학자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고서와 고문헌을 지난 47년간이나 수집하며 뒤져 온 애서가로서, 이제는 스스로 ‘애서운동가(愛
미국은 태평양 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해 연합국과 협의해 식탁통치를 실시한 뒤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하게 만든다는 원칙을 세우고 포츠담, 카이로 회담 등에서 영국, 중국, 소련 등과 그런 식의 합의를 했다.미국은 일본이 붕괴 또는 항복한 이후의 한반도 점령정책을 1942년부터 미 국무부 등 연방정부 차원에서 논의 결정되고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면서 그것이 ‘미 대통령 – 미 전쟁부 – 미 합동참모본부 – 맥아더’라는 지휘계통을 통해 미군에게 통고되어 집행되었다.미국이 일본에 원폭 두 발을 터뜨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오키
사월혁명의 만가 (하)박윤희기상대외의 압민전술구정권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다둘째로, 사월혁명이후의 정국을 담당한 과도정부나 현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었을 뿐만아니라 본질적으로 구정권과 별차가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야겠다.여기서 새삼스럽게 역사상의 예를 들 필요도 없겠지만 혁명에는 반드시 지배계급과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교체가 있어야 한다. 불란서의 대혁명이 그랬고, 일본의 명치유신이 그랬고, 「러시아」의 대혁명이 그랬다.그러나 「4.19」이후의 정국담당자들은 비단 이정권의 연장또는 계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하게
미 합동참모본부는 태평양전쟁 종전 1년 전인 1944년 8월 합동전쟁준비위원회에 일본군 철수나 일본 정부의 붕괴나 항복에 대비해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전략 요충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었다.1)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규슈와 혼슈에 대략적인 침공계획이 완성된 시점에서도 아무 것도 추진된 것이 없었다.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일본의 항복에 대비한 비상계획의 문제점에 관심을 가진 시점은 1945년 5월이었다. 합동전쟁준비위원회는 미국이 점령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 일본 열도 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 1945년 6월 미국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나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역사서로 단정하지 않는다. 역사서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종교서로 보고자 한다. 종교는 뭐를 믿던 자유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는 황당성을 상당히 인정하기 때문이다.종교서가 사실에 바탕하고 있더라도 종교서는 역사서와 구분되어야 한다. 세계의 종교서 『성경(聖經)』에도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등의 역사서가 있지만, 『성경』의 역사서는 유태인과 관련된 것이라는 지엽적 한계성이 있다. 그러
맥아더는 미조우리 함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맥아더에게 남한 점령은 일본 본토 점령에 비해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은 남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다는 목적이었지만 결국 한반도가 냉전기간 동안 미소가 정면 격돌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1)한반도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미국에게는 언제나 지엽적인 문제여서 미국 정부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이동화 씨(동국대 교수=통사당 정치위원장) 하숙방 감방⋅병실을 전전홀가분하지만 몸 상하기엔 마침 「독신생활이나 하숙생활에 오래 젖어 놓으면 좋지 못한 습성이 생기게 되죠. 보통이면 가정을 갖고 평범하게 생활하는데 행복을 느끼잖겠어요? 나는 항시 마음과 몸이 바쁘게 살아왔으며 또 성격으로도 별로 고독이란 걸 모르는 터인데 그래도 때로는 호젓할 때가 있지요.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더욱 그러하더군요」반백이 되도록 거의 하숙방과 감방 그리고 병실로 전전해왔다는 이 교수는 노경에 들면서는 그러한 생활이 견디기 어려워졌
미국 정부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에 종전 이후의 한반도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했으며 그에 관한 외교문서나 정부 비밀자료는 아래와 같다. 미국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반도 인접국인 소련, 중국이나 영국 등 연합국이 전후 한반도 정책에 미칠 영향에 대해 치밀하게 검토한 것으로 이들 비밀 자료에서 드러났다.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침략, 반인도주의적 행위 등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국인을 비하하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가쓰라-데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했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우리 말과 어순(語順)은 단군 조선 이전부터 변화하며 내려왔지만 한글은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부터 나왔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은 우리 민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이다.(6) 『세종어제 훈민정음』과 『신지비사(神誌祕詞)우리는 우리 말과 우리 글로 생각을 한다. 말과 글은 생각이고 정신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생각과 정신을 자주적으로 표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제가 우리 말과 글을 금지한 것은 우리의 생
미국 정부는 태평양 전쟁 종전 이전에 종전 이후의 한반도 문제를 다각도로 검토했으며 그에 관한 외교문서나 정부 비밀자료는 아래와 같다. 미국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한반도 상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반도 인접국인 소련, 중국이나 영국 등 연합국이 전후 한반도 정책에 미칠 영향에 대해 치밀하게 검토한 것으로 이들 비밀자료에서 드러났다.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침략, 반인도주의적 행위 등으로 평가하지 않고 한국인을 비하하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가쓰라-데프트 밀약'에 의해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
미국 전쟁부1)는 일본이 예상보다 일찍 항복하면서 최종적으로 일본에 대한 간접통치 정책을 채택하고 ‘태평양군 사령관이 천황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기구를 통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며 연합군간의 이견이 있을 경우 미국이 결정권을 행사한다. 미국은 천황제를 포함한 일본 정부 형태의 지속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했다.이에 따라 미국은 천왕을 포함한 일본 정부의 지배력을 중단시키고 맥아더 미군 최고사령관이 천왕과 일본 정부 기구를 총괄하는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동시에 연합군 사이에 이견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필자는 우리나라의 옛 천문학 문헌에 관심이 많았기에 여러 점의 천문학 관련 자료를 수집한 바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숙종조 석각본 탁본을 1점 소장하고 있다가 필요로 하는 곳에 양여하였고, 조선후기 정조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 『혼천전도(渾天全圖)』 목판본을 1점 입수하였으나 도난(盜難)되었다. 현재는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의 『천문류초(天文類抄)』 2권1책과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낙질 1책 등등의 6~
미국이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이전 서울에 공관을 최초로 설치한 1882년 이후 20여 년간 조선과 일본 간에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건 사고에서 미국이 취했던 소극적이고 방관적인 태도가 확인된다.이런 사실은 미국의 역사학자 John Edward Wilz가 1992년 미 공군사관학교 ‘HARMON MEMORIAL LECTURES’ 프로그램에서 ‘1850-1950년까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미국 역대 정부 비밀문서를 공개하면서 밝혀졌다.미국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에 소재하는 공군사관학교
단층소매치기 정치론언론계의 중진이요. 이름난 「유모리스트」인 C씨는 어느 날 만원 전차 안에서 천만뜻밖의 봉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여인이 소중히 간직했던 돈주머니를 도둑맞았다고 소동을 벌여 마침내 경관들에 의시하여 전 승객의 소지품 조사가 시작되었다. C씨도 물론 조사를 받았다.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승객중에서도 가장 점잖고 풍채가 으젓한 신사 C씨의 호주머니에서 그 여인이 도둑맞은 돈뭉치가 나왔으니 모든 사람이 눈을 호둥그렇게 뜨고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C씨는 경관에게 극구 변병했으나, 별 수 없이 소매치
미국은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가 조선과의 통상에 관심을 둔 것은 1854년 페리호 등 미군 함대를 일본에 보내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선진적 문물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일 두 나라의 조약 체결은 쉽게 이뤄졌다.조선 조정은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개항을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개항하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잃어버릴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청
- ‘신미양요’ 이후 미 정부의 비밀 외교 및 공식 문서를 중심으로 지금으로부터 151년 전인 1871년 ‘신미양요’로 미국과 조선이 최초의 전쟁을 벌인 뒤 2022년 3월 중순 현재까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역사를 어떻게 살피느냐 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것은 눈앞의 현실인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미국은 남한에서 고마운 존재, 혈맹관계로 일컬어진다. 미국이 6.25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 이후 미군 주둔에 의해 한반도 안보가 보장이 되면서 한국이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우리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를 복원하는데 중국의 옛 사서(史書)라든가 몇몇 고문헌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민족주의자로서는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중국 사서와 고문헌들을 신뢰한다는 문화사대주의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민족의 상고사를 복원해 내야 한다는 자조적 괴리감을 갖게 한다.그런데 일부 자칭 민족사학자들은 도저히 비하해서는 안 되는 『삼국사기』의 가치를 비하하고 중국 이십오사(二十五史)나 『환단고기(
사설남북교류 주장에 대한 장총리의 패배주의지난 21일 장총리는 기자회견석상에서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두 강력입법 즉 국가보안법 강화와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는 것은 민주당 정부의 신념이며, 만일 야당과의 타협이 안 되는 경우에는 수자로 강행할 의사를 표시하여 전국 각지에 요원의 불꽃처럼 퍼진 2대악법제정반대의 절규는 이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실로 독선적이고도 비민주적인 태도를 거침없이 표시하였거니와, 나아가서 장총리는 각 정당 사회단체 및 사회각계각층에서 주장하고 있는 남북간의 경제문화교류문제에 언급하여 그 불온부당함을 역설하는 한편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나는 “고려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제왕운기』 이후에, 고려까지의 사료를 총정리한 조선초기의 저술로서 조선시대를 관통하면서 각 당대(當代)의 사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준 고대사를 다룬 사서(史書)가 없을까?”하는 의문을 20대 초반에 한동안 가진 적이 있다.이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인데, 필자는 그 대답은 “있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권람(權擥, 1416~1465)이 1462년에 편찬한 『어제응제시주(御製應製詩註)』가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