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10월 21일 여수, 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토벌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이승만 정부는 초기 진압작전에서 봉기군에게 밀리자 여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군대는 물론 박격포·장갑차·경비정 등 모든 수단까지 동원해 해당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후 14연대는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 산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12회에서 현진건의 “단군릉과 『단군성적순례』”를 다루며 “13회 연재에서는 상(商)나라와 기자(箕子)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라고 언급하였다. 상나라는 은(殷)나라라고도 한다. 중국은 황제(黃帝) 이후 하은주(夏殷周, 夏商周) 세 왕조가 연이어 건국하고 멸망하였다고 한다. 이들 세 왕조는 우리의 고조선 시기이다.이 세 나라의 존속 연대에 대해서는 약간의 오차가 있다.이 책 『증보역대총목』은 『동국역대총목』과는 달리 중국을 대상으로 한 역사
제주 4.3의 진상에 대해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2회에 걸쳐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300여 명 희생된 북촌 학살사건 진상 폭로한 『순이삼촌』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서쪽 들과 밭에서,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300여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시신들은 이곳에 임시매장 되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어린
제주 4.3의 진상에 대해 미군 비밀자료 등에서 확인된 미국의 개입, 친일경찰과 군인들의 양민학살 등에 대해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공개한 관련 자료 등을 2회에 걸쳐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미 군정 조사단 제주도에 파견제주도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은 사건에 항의해 3월 10일부터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민‧관 합동총파업이 시작되자 미군정은 카스티어(Casteel)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미군 보고서는 파업원인을 ‘경찰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
1674년 숙종이 14세의 나이로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숙종은 부왕인 헌종의 죽음을 무척 슬퍼하였다.약방에서 관례에 따라 보약을 지어 올리면서 드시기를 권유하자,임금이 통곡하면서 말한다.“내가 밥을 잘 먹고 있는데, 경들은 어찌 보약을 먹으라 하는가?아버님을 생각하면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그저 목이 메어 울 뿐이다. 내가 없던 병이 더 생기게 되었으니, 경들은 다시는 이러한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영의정을 비롯한 고관 대신들이 모였다.“빨리 정사를 돌봐야 하는데 저리 슬퍼하니 옥체가 상할까 염려되오.분위기를 쇄신할 방안이
미국은 중국에서 장개석 군을 지원해 모택동 군을 압박하면서 소련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북아 전략을 성공키기 위해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동일한 목적의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45년 12월 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제안해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됐다.모스크바3상회의 가짜뉴스 보도사태는 미군정의 공작?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 27일 ‘워싱턴 25일발 지급보(至急報)’ 형식으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제10회 연재에서 다룬 김재원 박사의 『단군신화의 신연구』(1947년, 정음사 발행)에서 다룬 「무씨사 화상석」의 주인공 4인에 대하여 보충 언급하고자 한다. 즉 무량(武梁)과 동생 무개명(武開明) 형제, 그리고 무량의 조카이자 무개명의 아들 무반(武斑)과 무영(武榮) 형제이다.이들 무씨 일족은 상(商, BC 1600~BC 1046, 殷)나라의 제22대 왕 무정(武丁, 재위 BC 1250~BC 1192)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상나라는 제29
북한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메세지」한국교수협회는 25일 하오 「북한 지식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4.19혁명 당시 젊은 학생들의 총궐기에 뒤이어 이독재정권을 결정적으로 퇴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던 혁명적 대학교수들의 모임인 동교수협회는 4.19 1주(년)를 맞아 「또 하나의 독재자마저 타도하여 참다운 민족자주세력에 의한 통일을 이룩하자」고 북한 지식인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한국교수협회는 동「메시지」를 만장일치로 결의 채택하고 의장 조윤제, 부의장 정석해, 이상설 교수 이름으로 공표한 것인데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한국교수
미국 등 연합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일본에 대한 점령 정책에 대해 수 차례 협의할 때 한반도는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시킨다는 원칙 수준의 합의만을 했을 뿐이다.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 초기 발표해 실시한 맥아더 포고령도 일본 점령 정책과 큰 틀에서 유사했다.맥아더가 일본 점령기간 동안 미국 정보기관이 맹활약했고 이는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에서 항복한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점령정책과 막후 공작정치를 살펴보기로 한다.맥아더의 일본 통치, 전범처벌과 토지개혁 등 실시맥아더는 1945년 10월 미 정부의 전후 일본 대책에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우리 민족이 남긴 전적(典籍)에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철학 및 종교, 과학과 문화, 예술, 그리고 생활상 등이 들어가 있다. 현대에 있어 과학은 특별히 중요하여 강조되고 있는데, 우리 민족에게도 전래의 과학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과학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거의 모두 그 계승이 단절되었고, 지금은 대체적으로 과학사(科學史)의 대상으로만 남아있다.우리 민족에게 지금 남아있는 대표적인 과학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의학, 즉 남측에서는 한의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되는 시점이 가까워진 1945년 8월 미국은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면서 독일 심장부로 진격한 소련의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에 두 번에 걸쳐 원폭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1)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해 전리품을 챙기는 작전을 시작했다. 소련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여만 명을 무장해제시키는 한편 한반도와 일본 본토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숨결 ②혁명(革命) 한 해가 지났는데... 밥상엔 풀과 나무껍질이꽃철에 진눈깨비만 흩날리는「천형(天刑)의 수역(囚役)」에 우는 화전지대(火田地帶) 쑥잎에서도 꿀맛을, 나무껍질에서도 그윽한 불란서 요리(佛蘭西料理)의 고급향료를 찜 쪄 먹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그들의 미각(味覺)은 천혜(天惠)의 「초특산품(超特産品)」들인 것이다. 참으로 공변된 하늘이 아닌가! 「1961년 봄의 한국 농촌적 미각」을 우리 농민들에게 베풀어 준 하늘은 스스로 헝클어 놓은 우리 농촌의 참혹한 광경에 속죄하기 위해 그 경이적인 미각을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 6, 9일 두 번의 미군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궁지에 몰리자 8월 14일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겠다고 미국과 영국에 통보했다. 8월 15일 일본 천왕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자기네 국민에게 알렸으며 일본 정부는 8월 16일 일본군에 교전 중지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맥아더는 미군이 서울에 진입해서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3. 우리 민족의 중요 사료 및 역사서필자는 우리 민족이 본연의 정신적 정체성을 잃으면 소멸한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 민족은 외래 사상과 유사 종교에 의하여, 그리고 이른바 자칭 민족사학자들의 황당사관에 의하여 소멸의 길에 들어선 듯하다. 민족의 정체를 흐트러트리는 것은 주체의 완성이 아니라 민족을 소멸시키려는 시도이다. 이에 필자는 민족사학자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고서와 고문헌을 지난 47년간이나 수집하며 뒤져 온 애서가로서, 이제는 스스로 ‘애서운동가(愛
미국은 태평양 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해 연합국과 협의해 식탁통치를 실시한 뒤 적절한 절차를 거쳐 독립하게 만든다는 원칙을 세우고 포츠담, 카이로 회담 등에서 영국, 중국, 소련 등과 그런 식의 합의를 했다.미국은 일본이 붕괴 또는 항복한 이후의 한반도 점령정책을 1942년부터 미 국무부 등 연방정부 차원에서 논의 결정되고 태평양전쟁 종전이 임박하면서 그것이 ‘미 대통령 – 미 전쟁부 – 미 합동참모본부 – 맥아더’라는 지휘계통을 통해 미군에게 통고되어 집행되었다.미국이 일본에 원폭 두 발을 터뜨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오키
사월혁명의 만가 (하)박윤희기상대외의 압민전술구정권보다 훨씬 더 지능적이다둘째로, 사월혁명이후의 정국을 담당한 과도정부나 현 민주당 정권이 혁명의 주체세력이 아니었을 뿐만아니라 본질적으로 구정권과 별차가 없었다는 사실을 들어야겠다.여기서 새삼스럽게 역사상의 예를 들 필요도 없겠지만 혁명에는 반드시 지배계급과 근본적인 사회구조의 교체가 있어야 한다. 불란서의 대혁명이 그랬고, 일본의 명치유신이 그랬고, 「러시아」의 대혁명이 그랬다.그러나 「4.19」이후의 정국담당자들은 비단 이정권의 연장또는 계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하게
미 합동참모본부는 태평양전쟁 종전 1년 전인 1944년 8월 합동전쟁준비위원회에 일본군 철수나 일본 정부의 붕괴나 항복에 대비해 일본이 점거하고 있는 전략 요충지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었다.1)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 지나 규슈와 혼슈에 대략적인 침공계획이 완성된 시점에서도 아무 것도 추진된 것이 없었다.합동전쟁계획위원회가 일본의 항복에 대비한 비상계획의 문제점에 관심을 가진 시점은 1945년 5월이었다. 합동전쟁준비위원회는 미국이 점령할 필요가 있는 지역이 일본 열도 외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 1945년 6월 미국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7) 『삼국유사』나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역사서로 단정하지 않는다. 역사서라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의 종교서로 보고자 한다. 종교는 뭐를 믿던 자유이고, 모든 종교의 교리는 황당성을 상당히 인정하기 때문이다.종교서가 사실에 바탕하고 있더라도 종교서는 역사서와 구분되어야 한다. 세계의 종교서 『성경(聖經)』에도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등등의 역사서가 있지만, 『성경』의 역사서는 유태인과 관련된 것이라는 지엽적 한계성이 있다. 그러
맥아더는 미조우리 함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본국 정부의 명령을 받아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맥아더에게 남한 점령은 일본 본토 점령에 비해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미군은 남한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다는 목적이었지만 결국 한반도가 냉전기간 동안 미소가 정면 격돌하는 현장이 되고 말았다.1)한반도는 태평양전쟁 종전 이전 미국에게는 언제나 지엽적인 문제여서 미국 정부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에 불과했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달팽이도 내 집 가졌건만이동화 씨(동국대 교수=통사당 정치위원장) 하숙방 감방⋅병실을 전전홀가분하지만 몸 상하기엔 마침 「독신생활이나 하숙생활에 오래 젖어 놓으면 좋지 못한 습성이 생기게 되죠. 보통이면 가정을 갖고 평범하게 생활하는데 행복을 느끼잖겠어요? 나는 항시 마음과 몸이 바쁘게 살아왔으며 또 성격으로도 별로 고독이란 걸 모르는 터인데 그래도 때로는 호젓할 때가 있지요.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더욱 그러하더군요」반백이 되도록 거의 하숙방과 감방 그리고 병실로 전전해왔다는 이 교수는 노경에 들면서는 그러한 생활이 견디기 어려워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