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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조국(祖國) - 신동엽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3.01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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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 프로스트 이 숲 주인을 알듯하다. 그의 집은 마을에 있지만. 내가 여기 멈추어 자기 숲에 눈 가득 쌓이는 모습 지켜보는 걸 그는 모르리라. 일 년 중 제일 어두운 저녁 근처에 농가 한 채 없는 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에 멈춘 걸 내 조랑말은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뭔가 잘못된 게 없느냐고 그는 마구(馬具)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2.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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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절망(絶望) - 김수영 풍경(風景)이 풍경(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速度)가 속도(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拙劣)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救援)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絶望)은 끝까지 그 자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2.15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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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바기날 플라워 -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이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2.0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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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백낙천 한 해에 세 벌의 옷만 있으면 되고 두 끼 밥에 솥 밑만 녹슬지 않으면 되리다. 밭에 가 아욱 따서 반찬하고 숲 속의 가랑잎 거두어 땔감으로 족하다. 그저 없어서 안되는 것은 잔 속의 미주라. 그대들 내 살림 걱정들 하지만 술에서 깨는 것이 걱정이지 가난을 걱정하진 않으니. 우리는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산 지 오래되었다. 우리 가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2.0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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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1.25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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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유혹당하지 말 것 - 브레히트 I 유혹당하지 말아라! 삶의 윤회라는 것은 없다. 낮은 문안에 있다. 너희들은 벌써 밤바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II 기만당하지 말아라! 삶이란 얼마 되지 않는다. 재빠른 속도로 훌쩍훌쩍 삶을 들이마셔라! 너희들이 삶을 내놓아야 할 때가 되면 너희에게 삶은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I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1.18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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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1.1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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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똥지게 - 심호택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 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내 어린 시절은 공부가 최고인 시대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는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전교 석차대로 교실의 자리가 재배치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땐 복도 벽에 전교 50등까지의 성적표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7.01.04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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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2.2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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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감꽃 -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 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나도 어릴 적엔 감꽃을 셌다. 아침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오면 감나무 아래에 감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감꽃을 주워 먹었다. 떫은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항상 배가 고팠지만 가장 행복했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2.21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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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아, 얼마나 밑이 빠진 토요일이냐! - 파블로 네루다 아, 얼마나 밑이 빠진 토요일이냐! 하구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 매력적인 유성, 호텔마다의 물결치는 발들, 성급한 오토바이 주자들, 바다로 달리는 철로들, 폭주하는 차륜을 타고 달리는 엄청난 부동자세의 여자들. 매주일은 남자들과, 여자들과 모래에서 끝난다, 무엇 하나 아쉬워하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2.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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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2.0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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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후세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브레히트우리친절함이 가능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코자 했던 우리는스스로 친절할 수 없었다하지만 너희,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도움을 줄 수 있는 세상이 되거든우리를 기억해다오너그러움을 갖고서 요즘은 이사를 가도 떡을 돌리는 풍습이 사라진 것 같다.그래서 이웃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하다.대문호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1.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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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솔직히 말해서 나는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1.2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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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님의 침묵(沈黙)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1.1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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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낫 - 김남주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의사는 왜 '이 시대의 최고의 직업'으로 인정을 받을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 조선 시대는 왜 의사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나? 조선 시대 의사는 공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1.09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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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에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1.02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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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이방인 - 보들레르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수수께끼 같은 사람아, 응? 아버지냐, 어머니냐, 또는 누이냐, 아우냐? ____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아우도 없다. ____친구들은? ____당신이 지금 한 말은 나는 오늘날까지 그 뜻조차도 모른다. ____조국은? ____그게 무슨 위도 아래 자리 잡고 있는지도 나는 몰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0.26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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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6.10.19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