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革命) 한 해가 지났는데... 노다지의 맥(脈)을 더듬어서오늘도 삶을 위(爲)해 「레일」로 10리(哩) 샛길로 10리(哩)인간(人間)에서 격하(格下)된 두더지 생활(生活) 하루 여섯 번 - 마을의 변두리를 병풍처럼 둘러친 뫼와 뫼뿌리에 숨은 들 고양이 울음처럼 「사이렌」의 앙칼지고 구슬픈 여음이 긴 꼬리를 끌며 마을을 칭칭 휘감는다.정오와 밤의 통금 예비 및 통금시간 말고도 여덟 시간의 간격을 두고 울리는 그 소리들은 수천 명의 광부들을 존엄한 「인간」의 위치로부터 「두더지」로 격하시키기 위해 육중한 암층(岩層)밑 검고 누른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북측의 허준 유적필자는 통일뉴스의 ‘국혼의 재발견’ (11)회 연재 “국제적 베스트셀러 허준의 『동의보감』과 도가의학”에서 허준에 대한 필자의 관점을 일부 언급한 바 있다.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 (14)회 연재에서도 “허준의 고향은‥‥‥, 옛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의 양천허씨 집성촌이다. 그곳은 현재 북측의 ‘황해북도 장풍군 국화리’이다. 허준의 귀양지는‥‥‥, ‘평안북도 의주’이며, 허준은 여기에서 『동의보감』을 탈고하였다”라고 하였다.또한 필자는
1501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조광조는 1515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였다.파격적인 상소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정6품에 불과한 관직으로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다.조광조는 현령과(천거제도)를 실시해 젊은 선비들을 대거 발탁하여 고위직에 앉혔다.조광조는 철저한 성리학자였으며 사림세력과 함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다.도학정치란 유학, 성리학을 중심으로 펼치는 정치이며,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본보기로 삼았다.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騎馬民族)이다. 고구려의 건국자 주몽은 북부여에서 말을 키웠다는 신화적 기록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말이 등장하며 가야토기에서도 말 모양의 토기가 있다. 철령에서 고구려시대 지층에서 무쇠로 만든 말 모습이 출토된 바 있다.말은 고대의 무사에게는 전차(戰車)를 끄는 동력이었으며, 20세기 전반기까지만 노동력이었으니, 1960년대 후반까지도 서울에서 마차가 운용되었다. 말은 소만큼이나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이었다.1. 마을이 세운 리립 박물관박물관을 나라(國)
1451년 늦여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무계정사에 모여 들었다.초정을 받은 사람도 있고,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은 사람도 있었다.무계정사 주변에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하인, 가마꾼들은 복숭아를 따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여기 무계정사 주변의 복숭아나무는 여러 곳에서 옮겨 심었다는 말을 들었네.한양의 권세 있는 집에서는 복숭아나무를 심는다고 난리가 아닐세.”“안평대군의 뜻이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지. 우리야 그 뜻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면
‘서사를 담은 삶들’은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삶을 듣고자 기획되었습니다. 혹자는 박정희식 산업화의 신화가 깨진 것처럼 과거 민주화 ‘운동’의 신화도 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운동’적 삶을 살아가는 많은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에는 역사적 서사가 담겨 있습니다. 친구가 때로는 열사가 되고 일상적인 활동이 역사에 큰 사건으로 남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인 ‘서사’를 안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순간들을 담고자 합니다. 수수의 ‘서사를 담은 삶들’ 연재는 격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수수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이순신의 함경도 근무남에서나 북에서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지금의 함경북도 라선특별시에 한동안 배치되어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국토(國土)를 지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나도 30대 초반까지는 그 사실을 몰랐다.1980년대 중반에 충무공 이순신 연구가로 활동하였던 애서가 이종학(1927~2002, 독도박물관 설립자) 선생으로부터 배운 사실이다. 이종학 선생은 강단에는 서지 않았으나 역사정
무계정사에 복숭아나무를 심다1450년 2월 세종이 붕어했다.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했다.안평대군은 국상과 즉위식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문종이 즉위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궁궐에서는 더 이상 안평대군을 찾지 않았다.안평대군은 비애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간간히 부왕인 세종대왕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아바마마의 뜻을 따라 조선을 태평성대의 나라로 만들겠습니다.”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의 모습이 백성이 꿈꾸는 태평성대와 같다고 믿었다.‘중국이 아닌 조선 땅에서 무릉도원을 찾아야 한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나의 첫 시도2016년 5월이다. 당시 나는 제주의 백광익 화백과 경북 울진의 황재종 화백 두 분과 함께 ‘북경아트페어’와 ‘북경보리박매유한공사’의 춘계박매회를 갔다가 왔다. 3박 4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여행은 아트페어나 경매의 참여는 아니었지만, 중국의 현대미술과 미술시장을 보게 하여 두 분에게 충격을 주고자 한 이유에서였다. 두 분은 실제로 큰 충격을 받았다.북경의 ‘중국농업전람관’ 전체를 빌려 진행 중인 보리의 춘계박매는 1만 점이 넘게 출품되어 있었으니, 한국 전체
비애당 정원에는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이른 아침, 안견은 초본을 들고 안평대군을 찾았다.처소에는 이미 박팽년과 성삼문이 와 있었다.“어제 밤늦게까지 그렸다고 들었소. 어찌 몸은 괜찮은 것이오?”“육신은 조금 피곤하오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사옵니다.”“어디 초본을 봅시다.”130cm 크기의 종이에 그린 초본이 방바닥에 펼쳐졌다.안평대군은 앉았다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그림을 살펴본다.“박팽년, 성삼문 두 분께서 초본 양쪽을 잡고 일어나 보시겠소?”“초본이 한 눈에 보이니 훨씬 좋습니다.”그렇게 한참이나 초본을 살펴본 후 자리에 앉았다
변학문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톺아보기 10에서 북이 기후 위기를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로 인식하고 환경보호 사업 강화, 재생에너지 개발 및 이용 확대, 유기농법 도입, 절약형 생산방식 확산 등을 추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북의 재생에너지(북에서는 ‘자연에네르기’라고 함) 개발 및 이용 현황을 살펴본다. 생활 전력 확보에 적극적 먼저 북은 살림집, 학교, 공공기관 등에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절약 기술을 도입해서 생활 전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아래 왼쪽 사진은 북의 과학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김진우벌써 30년이 좀 못 되었다. 1993년이나 4년쯤 일 것이다. 나는 서울에 자주 나오던 김 모 씨가 골동 전문 갤러리를 운영하던 미국 동부 뉴저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일주 김진우(金振宇)의 증손자라고 하기에 미국에서 그의 활동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전 일이고, 그때 이후로는 그를 만난 적이 없어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를 않는다.당시 나는 그로부터 김진우에 대하여 약간의 단편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
안견(安堅)의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하지만 대략 1400년 전후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안평대군의 꿈 이야기인 [몽유도원도]를 그릴 때는 미술적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45세 전후였을 것이다.고려시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원(圖畵院)이 있었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도화원은 그대로 존속했다. 이후 1470년(성종1년)에 도화서로 개칭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격하되었다. 별제(도화서 수장)는 종6품으로 화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안견은 세종 때,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 일종의 임시직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제주도의 여섯 권역2006년 6월까지는 제주도(濟州道)의 행정단위가 2개 시 2개 군, 즉 제주시, 서귀포시, 북제주군, 남제주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러던 것이 제주시가 북제주군을, 서귀포시가 남제주군을 흡수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제주도의 산북(한라산 북쪽)은 중앙에 제주시가 있고 북제주군이 동과 서로 양분되어 있었고, 산남(한라산 남쪽)은 중앙애 서귀포시가 있고 남제주군이 동과 서로 양분되어 있었다. 북제주군이나 남제주군의 동과 서는 말만 같은 군이지 생활 영역은 분리
1447년 음력 4월 20일, 봄이 절정에 이르렀다.화사하게 핀 꽃은 나비를 유혹하고 새들은 짝을 찾아 지저귄다.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이용(李瑢)이다.사랑방에서 늦게 까지 책을 읽던 안평대군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그날 밤, 안평대군은 황홀한 꿈을 꾸었다.자리에 일어나 앉았지만 꿈이 너무 생생했는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밖에 아무도 없느냐. 얼른 사람을 보내 박팽년을 모셔 오너라.”“이른 아침부터 찾으시니 무슨 큰 일인가하여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박팽년은
원진욱 /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당면한 정세에서 한반도 군축으로 민생과 복지, 평화를 해결하자는 것은반제자주화에 앞장서야 할 민중운동의 역할을 왜곡하고,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대단결 운동을 가로 막는 잘못된 주장이다.반미자주 없이는 민생도, 평화도, 통일도 없다. 들어가며역사적인 사회운동은 올바른 좌표와 이정표가 있을 때 우여곡절을 최소화하고 편향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핵보유의 불균등성으로 인해 한반도에 일방적인 핵전쟁위협이 강요되던 시기에는 반핵이 곧 반전평화였으며, 반미반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70년 넘
사설/ 「메이 데이」에 노동자는 각성하라우리나라 노동운동, 특히 대한민국 수립 이후의 노동대중을 중심한 노동운동은 4.19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고찰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것이 본격적인 노동운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와야 할 제3의 단계에 까지 문제의 중점을 바로잡아 놓을 필요가 있다.그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이 「메이데이」야 말로 이 독재식 관제노동운동에서 장면 정권 현재의 실속없는 현단계로, 그것이 다시 만국의 노동자들과 직결된 국내노동운동의 앞날을 약속하는 실로 의미심장한 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한국 노동운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1. 인물사에 관심을 갖던 시기에1978년경부터 1980년 초에 나는 우리 역사상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당시 컴퓨터 검색도 안 되고 자료 공유도 어렵던 시절, 우리 역사상의 어느 특정 인물의 자료를 조사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몇 안 되는 참고 서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국조명신록』(17C, 17책)이나 『동국문헌』(1808, 3권3책), 일본 강점기에 나온 『조선명신록』(1925, 2권2책)과 『동국역대명신록』(1932
변학문 / 겨레하나 평화연구센터 소장 북, 유엔에 VNR 제출2021년 7월 북이 ‘지속 가능 발전 목표’ 이행 상황을 담은 자발적 국가보고서(Voluntary National Review, VNR)를 유엔에 제출했다. 잘 알려진 대로 지속 가능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는 2015년 9월 제70차 유엔 총회에서 유엔 회원국들이 2016년 시작해서 2030년까지 달성하기로 결정한 의제이다. 빈곤 종식, 기아 퇴치, 양질의 교육, 성 평등, 청정에너지, 지속 가능한 소비와 생산, 기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