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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거대한 거울 - 황지우 보따리 장사 시절, 강사 휴게실도 없는 학교의 벤치에 누워 한 점 콤플렉스 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 나는 거울,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 양쪽을 들고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1.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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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 방을 생각하며 - 김수영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렷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1.2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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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처음 애를 - 센게 모토마로 처음 애를 풀밭 위에 내려놓고 서게 했을 때 애는 땅만 바라보고, 서거나 쪼그려 앉거나 하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웃고 또 웃고 웃을 뿐이었다, 무서운 듯 서서는 즐거워하고, 살짝 쪼그려 앉아 웃고 그 우스운 모습이란, 나와 애는 얼굴을 쳐다보고 웃었다. 이상한 녀석이라고 주변을 살피며 웃었더니 애는 살짝 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1.1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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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 희고 둥근 세계 - 고재종 나 힐긋 보았네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1.09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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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 유하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진짜가 찾아옵니다. 그때, 아주 잠깐, 다른 세상, 다른 나를 보는 겁니다. 나는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됩니다. 아주 잠깐.- 김영하의 ‘피뢰침’ 중에서 비바람 몰아치고 들판의 느티나무 뇌우 속에서 낮은 소리로 혼자 울고 있다 그 느티나무 아래 서 있는 나 비를 긋기 위해서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9.01.0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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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그들은 나를 - 하이네 그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가 곧 이해했던 것은 다만 수렁 속에 같이 있을 때 뿐이었다. 존 로날드 톨킨은 그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엘론드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한 자나 지혜로운 자는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은 강한 자 만큼의 희망을 가진 약한 자가 가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2.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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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민들레와 개나리 - 서홍관 어떤 엄마가 영재교육 그림책을 펴놓고 아이를 가르치고 있다. “이건 민들레!” “이건 개나리!” 의자 바로 밑에는 민들레가 피어 있는데. 저기 담장 옆에는 개나리가 피어 있는데. 아카시아 향기를 맡으며 아카시아껌 냄새가 난다고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되었던가? 루소는 ‘에밀’에서 첫 독서 교재로 다니엘 디포의 ‘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2.1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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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자유 - 김남주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을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2.1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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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다.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2.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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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칠보시 - 조식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학교 교사로 있을 적에 아이들이 막 발령받아 온 ‘도덕 선생님’을 보고 ‘도둑 선생님’이라고 놀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한 눈에 임금님을 벌거숭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1.28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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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 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1.2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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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수라(修羅)- 백석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차디찬 밤이다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나는 가슴이 짜릿한다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이렇게 해서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1.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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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한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1.07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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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세월의 강물 - 장 루슬로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0.3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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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솔연(率然) - 김남주 대가리를 치면 꼬리로 일어서고 꼬리를 치면 대가리로 일어서고 가운데를 한 가운데를 치면 대가리와 꼬리가 한꺼번에 일어서고 뭐 이 따위 것이 있어 그래 나는 이 따위 것이다 만만해야 죽는 시늉하고 살아야 밥술이라도 뜨고 사는 세상에서 나는 그래 이 따위 것이다. ‘초한지’의 명장 한신은 젊은 시절 동네 양아치들의 가랑이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0.24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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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0.1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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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밤비 - 백거이 철 이른 귀뚜라미 우는가 했더니 뚝 그치고 기름 적은 등잔불도 꺼질듯 다시 밝아져 창밖엔 밤비가 내리고 있구나 그러니까 파초닢이 소리를 내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은 노년이 되어 혼자 중얼거린다. ‘다 끝났어.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지.’ 그녀는 처녀 시절 사랑과 열정을 지닌 피터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0.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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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화사(花蛇)- 서정주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아름다운 배암…….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꽃대님 같다.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달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10.0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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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가족 - 진은영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고대 인도의 서사시 ‘바가바드기타’에는 크샤트리아(무사 계급)의 해탈에 대한 지혜가 나온다. 왕위를 찬탈한 삼촌과 그의 친족들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는 왕자 아르주나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차라리 그들의 칼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09.26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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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근 / 시인 행복 - 김종삼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 옷이나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보자 안양행도 타보자 나는 행복해도 혼자가 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한 할머니가 푸념을
고석근의 시시(詩視)한 세상
고석근
2018.09.19 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