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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북한의 노력은 외교관계, 경제건설, 지방 주권기관 정비, 교육문화 사업의 확충 등으로 숨가쁘게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은 이런 노력과 더불어 남북 정치역량을 통합하기 위한 작업에도 착수했습니다. 남북으로 나뉘어 있던 노동당과 민전을 통합하는 일이었습니다.이런 정치역량의 통합은 유일 주권국가임을 내세웠던 북한 정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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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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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정부 수립과 더불어 사회주의 체제를 정비하고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움직입니다. 먼저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인민공화국 정강을 통해 북한의 정책 방향을 발표합니다. 그 주요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첫째, 전체 조선 인민을 단결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원할 것이며,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인 소·미 양군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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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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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 지도자협의회가 끝나자 북한의 행보가 빨라집니다. 지도자협의회가 끝난 지 나흘 뒤인 7월 9일∼10일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가 열려 인민공화국 수립 일정과 방법을 논의하였는데, 회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8월 25일에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원 선거 규정과 중앙선거위원회 조직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통일 입법기구를 내세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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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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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남북연석회의는 우리 민족은 분단을 원치 않으며, 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연석회의가 분단을 현실적으로 저지할 힘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점이 남북연석회의의 한계였지만,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발전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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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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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19일 경교장에는 새벽부터 군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행길에 오르려는 김구를 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은 "기어코 가시려거든 저희들을 죽이고 가십시오" 하면서 끝내 만류했고, 김구는 이들에게 "나는 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70여 년이 되었다. 더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느냐. 여러분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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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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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던 47년 후반부터 48년 남북연석회의까지 북한은 어떤 방침을 갖고 있었으며,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을까? 수수방관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어떤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을까?북한은 1947년 11월 16∼17에 열린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에서 `유엔 감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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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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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후반, 홍명희와 김규식이 중도파를 중심으로 단선반대 세력을 결집하고 있을 때, 남한 우익 진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균열의 조짐은 이미 1947년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확고히 방향을 굳힌 반면, 김구는 여전히 `임정법통론`에 의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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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2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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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의 죽음 이후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끝났습니다. 동시에 중도파의 입지도 그만큼 좁아집니다. 미소공동위원회 마저 사실상 끝장나면서 이승만의 단선노선이 득세하게 되자 중도파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47년 후반부터 중도파를 중심으로 단정에 반대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홍명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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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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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여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가시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두 개의 분단정부가 각기 들어섭니다. 분단이 현실화되는 1년 동안의 한반도 정치상황은 매우 긴박하기만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분단과 통일 사이의 치열한 대결로 압축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매우 복잡합니다.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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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5.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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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마오쩌둥의 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이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분명한 사실은 군대만큼 권력을 확실히 보장해주는 힘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당, 인민위원회, 대중동원…. 이것으로 북한의 국가 건설 기반은 잘 정비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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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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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지 불과 2년 정도밖에 안된 시점에서 북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권력기관에서 친일파를 철저히 청산하고,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했으며 `합법적` 선거를 통해 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로써 제도적으로는 식민지반봉건사회와 완전히 결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는 아직도 일제시대의 사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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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0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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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후반기에 들어서 북한 임시인민위원회는 정권을 강화하고 합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보통선거를 준비하게 되는데, 이것은 `정통성`있는 정권기관을 만들기 위한 절차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 이 시기에 선거를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점에서 제반 민주개혁의 성과가 일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사회에서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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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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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에 따라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소와 좌·우간의 의견대립으로 무기휴회에 들어가는 1946년 5월은 해방 후 우리 나라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과 소련은 각기 남과 북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는 방향으로 틀을 잡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미국과 소련의 그런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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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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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장례식 여운형은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나 지나친 좌경화에 반대하여 이를 탈피하고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정치활동을 하던 중 1947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하였다.3당 합동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진 좌익정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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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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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운형(오른쪽)과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왼쪽).잠복돼 있는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좌익정치세력은 3당 합당을 추진하게 됩니다. 3당이 합당을 추진해 광범위한 대중적 기초 위에서 강력한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합법적 대중정당을 결성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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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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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헌영의 이런 노선은 여운형이 주장한 좌우합작노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운형의 생각은 좌익의 결집체인 민전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복잡한 남한 정세를 풀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운형은 온건우익세력 및 중간파와 합작을 추진함으로써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노선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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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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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북한 지역에서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해 북로당을 출범시키면서 남한에서도 좌익 정당의 합당 문제가 제기됩니다. 남한의 3당 합동은 기본적으로는 남한 내부의 정치사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북한의 양당 합동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남조선신민당이 합동 작업을 진행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남로당이 출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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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2.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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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조선노동당의 권력구조와 그 의미1946년 8월 30일 창립대회 마지막 날 13개 항으로 이루어진 당 강령과 41개조로 이루어진 당 규약을 채택하고, 당 기관지로 정로(북조선공산당 기관지)와 전진(조선신민당 기관지)을 통합해 로동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로써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동에 의한 북조선노동당의 창립대회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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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26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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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민·공산 양당의 합동 추진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 문제는 이미 1946년 6월 28일의 신민당 제1차 대표대회가 개최되기 이전부터 물밑에서 깊숙히 논의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수면 위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7월이었습니다. 오랜 물밑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7월 22일까지 양당 지도부는 합당을 결정했고, 이를 신민당이 먼저 제안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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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2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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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여러 민주법령 제정 작업이 진행됨으로써 친일잔재와 봉건유제를 청산하기 위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북한은 민주개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역별로 분산돼 있던 인민위원회를 통합하여 중앙조직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그러나 임시인민위원회의 역량만으로는 민주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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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1.12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