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몇 차례 큰 눈이 내렸다.근 3달에 걸친 세화작업이 끝났다.도화서 화원 20여 명이 각각 20점을 그려 400여 점, 자비대령화원 10명이 각각 30점을 그려 300점, 총 700점의 세화를 그렸다.팔도의 지방화원의 작품까지 합한다면 1,000여 점이 훌쩍 넘는 방대한 양이다.몇 달간 야근을 밥 먹듯이 했지만,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다.세화 제작은 도화서의 주된 업무이자 가장 공을 들이는 일이다. 무엇보다 화원들의 근무를 평가하는 주요 자료로 사용되었다.세화제작 평가회가 열렸다.이번 평가회에 참여한 사람은 예조판서와 도
정조가 1776년에 재위했다.“아,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지만 불령한 무리들이 사도세자를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 유언에 따라 형률로 논죄하겠다.”- 정조실록, 1776년 3월 10일추숭(追崇)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다’는 뜻이다.만약 추숭이 이루어지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자들은 모조리 처벌하는 정치 보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하지만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 죽음을 둘러싼 의혹에 대해 개입하거나 논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780년(정조 4), 연암 박지원은 종형인 박명원(
도화서에서 조회를 한다.“이번 십장생도 세화는 총 4좌를 제작할 것입니다. 초본은 진경산수화를 가장 잘 그리는 종 7품인 선회(善繪)가 주도해 주시오.종 9품인 회사(繪史) 1명, 정화원 5명이 참여할 것이오. 특별히 경험이 많은 체아직 화원 2명이 함께 할 것이오.”종 6품인 선화(線畵)는 도화서의 수장인 별제이므로, 선회는 별제 다음의 서열이다.선회 화원이 묻는다.“별제께서 특별히 부탁할 것은 없습니까?”“조선이 꿈꾸고 만백성이 좋아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태평성대를 표현해야 합니다.뭇 생명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고 풍경은 아름다
겸재 정선에게 묻고 답을 얻다 ② 별제가 묻는다.“소나무는 변치 않는 절조, 대나무는 화목, 태양과 학이나 사슴은 양심을 뜻한다고 했습니다.그렇다면 십장생도는 양심이 만드는 이상향, 태평성대이겠군요.”겸재가 단호하게 대답한다.“아닙니다. 그냥 좋은 세상일 뿐입니다.”“예?”화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아니라니요? 양심을 가진 군자가 없다면 결코 태평성대는 오지 않습니다.”“수신을 통해 군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 올바른 정치의 바탕이 됩니다.하지만 이는 태평성대, 이상향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
겸재 정선에게 묻고 답을 얻다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년)은 36세 되던 1711년 경 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치며 혜성처럼 등장한다.특히 독특한 구도와 화법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는 세간의 관심사였다.예조판서는 좌의정 김창집에게 연락해 겸재 정선과의 모임을 주선했다.별제와 몇몇 화원들이 겸재의 화실을 찾았다.아직 관직이 없었던 겸재의 집은 소박했다.작은 사랑방을 화실 겸 서재로 사용하고 있었다.진한 먹 냄새가 풍겼다. 벽장문 쪽에는 백 여 권이 넘는 서책과 붓과 벼루가 놓여 있고, 창가에는 사생한 그림들을 걸어 놓았다.책상
십장생도의 연원을 말하다별제가 화원들을 모두 모아 조회를 한다.“오늘은 특별히 홍문관 응교 나리를 모시고 십장생도의 연혁에 대해 듣고자 하오.”홍문관(弘文館)은 조선시대 학술과 언론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었으므로 출세가 보장되었다. 정승, 판서 중에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응교(應敎)는 정4품 관직이다.“[십장생도]의 연원에 대해 강독을 해 달라는 예조판서 대감과 별제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습니다.문헌을 찾고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더군요. 하지
1714년 숙종대왕이 재위한 지 40여년이 되었다.그 해 봄, 영남에서 기근이 들었다. 한성 진율청에서는 쌀을 보냈다.날이 오랫동안 가물어 임금이 몸소 향을 피우며 묵도했다.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자 팔도의 환곡을 고루 탕감하도록 하고, 전라도 충청도의 고을에는 세금을 줄어서 내도록 했다.9월, 대신과 당상관, 종친의 70세 이상 부인에게 쌀과 고기, 면포를 하사했다.팔도 벼슬아치의 80세 이상 부인과 평민 90세 이상 여인 모두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고 교지를 내렸다.다음 날 아침, 조회에 참석했다.이조판서가 보고한다.
1501년 중종반정이 일어난다.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조광조는 1515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그의 나이 34세였다.파격적인 상소를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으며 정6품에 불과한 관직으로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다.조광조는 현령과(천거제도)를 실시해 젊은 선비들을 대거 발탁하여 고위직에 앉혔다.조광조는 철저한 성리학자였으며 사림세력과 함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다.도학정치란 유학, 성리학을 중심으로 펼치는 정치이며, 요순시대의 태평성대를 본보기로 삼았다.새롭게 조정에 들어온 조광조를
1451년 늦여름,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무계정사에 모여 들었다.초정을 받은 사람도 있고,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은 사람도 있었다.무계정사 주변에 심어 놓은 복숭아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하인, 가마꾼들은 복숭아를 따먹으며 잡담을 나누었다.“여기 무계정사 주변의 복숭아나무는 여러 곳에서 옮겨 심었다는 말을 들었네.한양의 권세 있는 집에서는 복숭아나무를 심는다고 난리가 아닐세.”“안평대군의 뜻이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지. 우리야 그 뜻을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맛있는 복숭아를 먹을 수 있다면
무계정사에 복숭아나무를 심다1450년 2월 세종이 붕어했다.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했다.안평대군은 국상과 즉위식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문종이 즉위하고 몇 개월이 지나자 궁궐에서는 더 이상 안평대군을 찾지 않았다.안평대군은 비애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간간히 부왕인 세종대왕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아바마마의 뜻을 따라 조선을 태평성대의 나라로 만들겠습니다.”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의 모습이 백성이 꿈꾸는 태평성대와 같다고 믿었다.‘중국이 아닌 조선 땅에서 무릉도원을 찾아야 한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비애당 정원에는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이른 아침, 안견은 초본을 들고 안평대군을 찾았다.처소에는 이미 박팽년과 성삼문이 와 있었다.“어제 밤늦게까지 그렸다고 들었소. 어찌 몸은 괜찮은 것이오?”“육신은 조금 피곤하오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맑사옵니다.”“어디 초본을 봅시다.”130cm 크기의 종이에 그린 초본이 방바닥에 펼쳐졌다.안평대군은 앉았다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그림을 살펴본다.“박팽년, 성삼문 두 분께서 초본 양쪽을 잡고 일어나 보시겠소?”“초본이 한 눈에 보이니 훨씬 좋습니다.”그렇게 한참이나 초본을 살펴본 후 자리에 앉았다
안견(安堅)의 생몰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하지만 대략 1400년 전후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안평대군의 꿈 이야기인 [몽유도원도]를 그릴 때는 미술적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45세 전후였을 것이다.고려시대 국가미술기관인 도화원(圖畵院)이 있었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지만 도화원은 그대로 존속했다. 이후 1470년(성종1년)에 도화서로 개칭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격하되었다. 별제(도화서 수장)는 종6품으로 화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다.안견은 세종 때,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체아직(遞兒職, 일종의 임시직
1447년 음력 4월 20일, 봄이 절정에 이르렀다.화사하게 핀 꽃은 나비를 유혹하고 새들은 짝을 찾아 지저귄다.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이용(李瑢)이다.사랑방에서 늦게 까지 책을 읽던 안평대군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그날 밤, 안평대군은 황홀한 꿈을 꾸었다.자리에 일어나 앉았지만 꿈이 너무 생생했는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밖에 아무도 없느냐. 얼른 사람을 보내 박팽년을 모셔 오너라.”“이른 아침부터 찾으시니 무슨 큰 일인가하여 부리나케 달려왔습니다.”박팽년은
[진경화법]은 겸재 정선에 의해 창안된 진경산수화의 조형원리이다.진경산수화의 정수로 평가하는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실제 사생을 바탕으로 암산과 토산을 태극 형태로 배치하고 부감법을 이용해 금강산 전체를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실제를 바탕으로 했지만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관념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현실과 관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 낸다.[진경화법]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보이지 않는 사물과 철학적 본질을 드러내는 조형방법이다.이러한 진경화법의 전통은 김홍도, 신윤복으로 이어졌다.진경화법은 결
신윤복은 화실에 앉아 벽면에 붙여 놓은 사생 그림을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앉은 모습을 그려야 하나, 아니면 서 있는 입상을 그려야 하나...’여성은 체구가 작다.이 때문에 자칫 트레머리나 풍성한 치마에 얼굴이 묻혀버릴 수도 있다.또한, 앉은 자세는 긴장감이 떨어진다.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허리를 세우면 경직되고, 허리를 굽히면 나약하게 보인다.‘여성 좌상은 의녀나 열녀에게 걸맞은 자세일 뿐이다. 나는 봄기운이 가득한 여성의 모습을 그릴 것이다.’무엇보다 신윤복은 성적 매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싶었다.성적 매력은 가슴을 요동
신윤복은 사생 도구를 싸 들고 길을 나섰다.중년의 여인이 길을 안내한다면 동행한다.강부자가 귓속말로 뭔가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을 것이다.도화가 머무는 곳은 인왕산이 올려다보이는 소박한 기와집이었다.1여 년 만에 보는 도화는 훨씬 성숙해 있었다.도톰한 입술과 볼에는 봄기운이 가득했고, 검은 머리칼은 윤기가 돌았다.무엇보다 그윽한 눈빛 속에는 아련함과 그리움, 야속함 따위가 뒤섞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무거운 화구를 들고 누추한 곳까지 찾아주셨군요.저는 원치 않으나 강부자 님의 간곡한 의지를 뿌리치지 못했습
강부자는 역관 출신의 중인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무역을 하여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소금과 인삼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하고, 중국이나 일본에서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를 수입해 막대한 중개료를 챙겼다는 소문도 있다.강부자는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부자여서 강부자라고 불렸다.재물만 많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통역 일을 하면서 중국이나 조선 정부의 관료들과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어쨌든 강부자의 위세는 대단했다.강부자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뒷말을 하던 사람 중에는 왈짜패에게 몰매를 맞아 병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이리 오너라
봄은 속절없이 갔다.여름에는 매미가 세차게 울더니만 태풍이 세차게 불고 많은 비가 내렸다.남쪽에서는 역병이 돌아 많은 백성이 죽었고 북쪽에서는 큰불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겨울은 길고 추웠다.신윤복은 도화가 있는 기방(妓房)을 찾았다.퇴기로 보이는 늙은 여자가 할 일 없이 생황을 불고 있었다.“화원께서 발길이 뜸한 사이 강부자라는 사람이 도화를 자주 찾아왔지요.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더이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단장을 해도 수척해 보였지요.그렇게 몇 달을 보낸 후, 다른 곳으로 갔소.더 큰 기생집으로 갔다는 말, 강부자의 첩살이를
신윤복은 평소 친분이 있던 선비, 문인, 상인, 화원들에게 연락을 보냈다.“매화가 떨어진 후, 봄비가 내리고 아지랑이가 피어납니다.얼마 전에는 바람을 따라온 꽃내음에 마음이 설레어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인왕산 자락 후원에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하니 부디 오셔서 풍류를 즐김이 어떠하오리까.“대략 20여 명의 지인이 연락을 받고 모였다.신윤복은 춘화를 그린 대가로 받은 돈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빌렸다. 술과 쇠고기를 비롯해 많은 음식을 주문하고 6인조 풍각쟁이들을 불렀다.동네 사람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소리꾼, 사당패, 무희는 기본이
조선 후기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물밀 듯이 수입되었다.철학이나 학문, 정치제도의 경우는 조선이 세계적 수준이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수용할 것이 없었다.대부분은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대중문화였다.[고금소총]과 같은 음담과 해학, 풍자가 담긴 서적이 출간되고,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한 사설 시조, 춘향가, 심청가, 변강쇠가와 같은 판소리가 유행했다.특히 패관잡기(稗官雜記), 패관소설의 유행은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정조는 패관소설이라 하여 ‘삼국지’도 읽지 않았다고 하며 수입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