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 한국문학을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이다.”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김남주를 1980년대 시대의 상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하에서 핍박받은 전사이자 시인인 김남주. 하지만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 시인 김남주는 생소하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지창수 상사가 외쳤다. “지금 여수 경찰이 쳐들어 왔다!”여수에서 군인의 봉기가 시작됐다. 제주도에서 발발한 ‘4.3사건’. 양민토벌을 반대한 14연대 군인들의 저항 성격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처음으로 대규모 양민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국가가 70년째 빨갱이를 구분하는 잣대를 들이밀기
1945년 8월 일제 식민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한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었다. 남북은 각기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 남쪽에서는 좌우합작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다. 1948년 북쪽에서 남북연석회의가 열렸지만,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길을 막지 못했다.그렇게 1948년 8월 15일 서울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그리고 한
“쌍방에 대한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한 한국 충돌을 정지하기 위하여서와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는 정전을 확립할 목적으로...”1953년 7월 27일 북한 김일성 최고사령관과 미국 마크 클라크 연합군 총사령관, 중국 펑더화이 인민지원군사령관은 위와 같은 내용으로 시작하는 ‘정전협정’
5월 10일은 ‘유권자의 날’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를 기념해 2012년 제정됐다.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원들은 ‘제헌헌법’을 제정,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1조에 따라 선거권은 기본권으로 규정됐다.하지만 돌이켜보면 5.10 총선거는 남한에서 진행됐을 뿐이다. 1945년
“학교를 사수하자! 우리의 생명, 우리의 존재는 우리 국어를 지킴으로써만 의의가 있다!”1948년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정부가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학교를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에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일제히 항의했다. 단순한 학교 지키기가 아니었다. 해방 후 조선인 말살정책에 대한 항거였다.70년 전 일본 한신지역을 중심으로 ‘4.24
“우리 조선 인민은 우리 문제를 우리 민족의 힘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장성되었다.”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이어 4월 30일까지 남측 김구, 김규식, 북측 김일성, 김두봉이 함께 모인 ‘남북요인회담’(4김회담)이 진행됐다. 그리고 ‘남북연석회의’ 공동성명이
1948년 4월 17일 평양행을 굳힌 대한독립당(한독당) 당수 김구는 일갈했다. “오직 우리 통일과 독립과 활로를 찾기 위하여 피와 피를 같이 한 동족끼리 마주 앉아 최후의 결정을 보려고 결연 가련다.”이보다 앞서 3월 김일성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남북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구체적 계획과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 모두 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된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특색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분열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북한 김일성 주석이 1993년 4월 6일 발표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이다. 북한은 1972년 ‘조국통일 3대원칙’
“우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안이 결코 대한민국을 부인하거나 말살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것을 육성하고 혁신하고 진실로 민주화하는 데 있음을 확신한다. 민주주의 승리에 의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길이다.”1956년 11월 10일 창당한 ‘진보당’이 내세운 통일정책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뒤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 ‘북진통일’의
지난 9일 고위급 남북 당국회담. 북측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민족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만들겠다며 고위급대표단과 올림픽 대표단.선수단은 물론,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을 대거 파견한다고 밝혔다.그리고 15일 판문점 북측지역 통일각에서 ‘북측 예술단 파견을 위한 실무접촉’을 열고, ‘삼지연 관현악단’ 140여 명을 판문점을 통해 육
2018년 새해가 밝았다. 북한은 2017년 12월 31일 불꽃놀이로 한해를 마감하고 1월 1일 오전 9시(서울시각 9시 30분)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관영 에 나와 ‘2018 신년사’를 발표했다.북한은 1일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실시한 지 65년을 맞는다. ‘전반적 무상치료제’는 어떤 내용일까.북한 은 ‘전반적 무상치료제’를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경. 북으로 향하는 도로 위 군사분계선(MDL)을 표시한 폭 30cm의 노란색 선이 상징으로 그려져있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인 권양숙 여사가 노란색 선을 걸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성."오늘 이 자리에 서고보니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분단 70년 세월이지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북한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북한과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기자들은 매일 수시로 우회경로를 통해 접속하는 매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는 항상 이렇게 시작한다. '북한 관영 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말했듯이, 북한의 당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력한 언론기관인
"우리가 맑스주의의 기치를 들고 인민대중을 조직동원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자면 우리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혁명조직을 먼저 내와야 합니다. 이 조직의 명칭은 그 사명에 맞게 타도제국주의동맹으로 하며 약칭은 'ㅌ.ㄷ'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1926년 10월 17일. 15살의 김일성이 만주 화전면에서 항일운동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용순, 김양건 당 대남담당 비서, 허담, 백남순 외무상, 오극렬, 최영림 중앙검찰소장, 지재룡 주중북한대사,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김일성종합대학 동문이다.이들만 두고 보더라도 현재의 북한을 만드는 데 김일성종합대학이 주요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대학을 세계 일류급
지난 8월 말부터 9월 2일까지 강타한 태풍 '라이언록'이 북한 함경북도를 휩쓸었다. 수백 명의 사망.실종자가 발생했고 6만 8천여 명의 수재민이 거리에 나앉았다. 김정은 시대 사회주의강국의 최전성기를 과시하려 진행된 '200일전투'는 함경북도 수해복구로 목표가 바뀌었다. '해방 후 대재앙'이다.세계식량기구(WFP
북한군은 지난 2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함경남도 신포항 인근 동해상에서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북극성(KN-11)’을 성공적으로 시험발사했다. 북한이 첫 SLBM 수중사출시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난해 5월만 해도 “농담”으로 치부하던 한.미 군 당국은 올해 4월 발사 이후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평가를 바꿨다. 이제는 “연내 실
1953년 휴전이후 남쪽에서 처음으로 '데프콘(DEFCON) 3'이 발동됐다. 일본 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에서 F-4 팬텀기가 한반도로 날아오고 미국 본토에 있던 F-111전폭기 5개 편대 20대가 한국에 배치됐다. 일본 해역에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대한해협을 향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인민군 전체 부대와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 등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