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선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나와 국가보안법의 첫 악연은 4월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60년 4월 19일 학생혁명이 일어났다.나는 부산대학 정치학과 3학년으로 부학생회장을 맡아 “지금 이 정권에서 이러고만 있을 것이냐, 우리가 나서야하지 않겠느냐, 다 같이 나서자!”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을 나와 서면으로 갔다.당시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
박홍섭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전 마포구청장 1960년 2월말로 기억한다.한성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동조 형이 학교로 찾아왔다. 나는 다음 달이면 고3으로 진급하는 상황이었다. 마침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어서 우리 둘은 자연스럽게 교정 뒤에 있는 노고산으로 올라갔다.당시 노고산(지금의 서강대학교 후문 방향)은 동기생끼리 싸움 아니면 담배를 피우는 곳이었다
조회환 / 사월혁명회 회원,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1960년 봄, 이승만 대통령 정권의 부정부패와 장기독재에 반대하여 일어난 4월혁명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일어난 위대한 혁명이었다. 20대의 대학생이 80대가 되었지만 그때의 거국적 함성과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잘못 꿴 민족사의 첫 단추1945년 8‧15 해방 직후 이승
김동선 / 사월혁명회 회원,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1960년 3월 15일, 그날은 제4대 정부통령 선거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 대학(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재학 중이라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투표를 위해 그 전날 인천 소래에 있는 본가에 가 있었다.투표일에 동네 반장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면서 셋이 같이 투표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하일민 / 전 사월혁명연구소 소장,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1- 4월혁명은 역사적 변혁운동이다. 물론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권력의 유지 과정에서 드러난 사회적 모순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원조경제의 감소와 산업재편성을 위한 계급·계층간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한 실업자, 빈민의 양산, 국제정세의 데탕트 흐름
김승균 / 사월혁명회 조국통일위원장, 민주평화노인회 이사장 우리나라에서 민중저항 역사는 천년을 거스른다. 고려시대의 망이‧망소이의 난, 또는 사노 만적의 난을 시초로 하여 빈발한 봉건지배층의 억압과 학정에 궐기한 민중의거를 손꼽을 수 있기 때문이다.더구나 조선왕조 봉건사회에 들어와서는 민중폭동은 더욱 확대되고 빈발하여 봉건 사회의 기반을 흔드는
이윤 / 사월혁명회 대외협력위원장 머릿글 저는 1959년 4월에 청주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고2로 진급한 1960년 4월에 4월혁명을 맞았습니다. 자유당의 횡포가 기승을 떨치던 시기에 마침 4월 18일 청주시내 전체 학생들이 일어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였습니다. 이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청주농고생들이 학교의 황소를 몰
한상권 / 덕성여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 1. 문제 제기 1960년의 4월 민중항쟁을 일상적으로는 ‘4월혁명’이라 칭하는데, 여기에는 한국역사에서 민중의 힘에 의해 정권 교체를 성취한 의의를 높게 평가하려는 뜻이 있다. 4·19직후 정부는 이를 ‘민주혁명’이라 칭하였다. 헌법재판소도 4·
최단옥 / 사월혁명회 전 공동의장(인천대학교 명예교수) 1. 前史 : 몇 년 전부터 이미...1960년의 4월혁명은 단순한 부정선거에 대한 항쟁이 아니었다. 쌓이고 쌓인 사회적 적폐에 대한 항쟁이며, 봉건적 사회구조를 마감하는 체제전환의 계기였다.1956년 봄, 충주고교 3학년 초에 관례대로 교기 기수로서 앞장 선 가운데 3학년 전원이 유력자의 강연장에 참
전덕용 /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씨알의소리 전 창간편집장, 소설가) 그동안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다.당시 20대의 시퍼런 청년이었던 4월의 주역들은 백발이 성성한 80대 노인이 되었다. 반세기를 훌쩍 지나 두세대가 이어 태어난 세월이 지난 것이다.흔히들 4월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말한다.그것은 혁명의 주체가 학생 신분이었고, 정권을 장악 묵은 사회제도를 혁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