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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활웅자료실] <인터뷰> "중국 견제가 미국정책의 핵심과제"

저자
이활웅
출처
통일뉴스
발행일
2005-04-01
<인터뷰> "중국 견제가 미국정책의 핵심과제"

올해 만 80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미국 로스엔젤스(LA)에서 만난 이활웅 선생은 손수 운전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왕성한 기고활동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미주지역 특히 LA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서부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통일문제 전문 기고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국내에 선생의 글이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통일뉴스를 통해서이다.

외교관 생활중에 민족의식에 눈뜨게 됐다는 선생의 독특한 이력과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고 남북 모두를 공정하게 껴안고 가고자 한 치열한 글쓰기가 어느덧 20년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27일과 29일 본사 상임고문이기도 한 이활웅 선생을 LA의 한인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부족한 내용은 전자우편을 통해 보완해 선생의 인생역정과 현 시국에 대한 진단을 들어보았다.

"영사관 주 임무는 북한을 이기는 일"

□ 통일뉴스 : 미국에서 공직 생활을 하신 것으로 안다. 어떻게 미국에 살게 됐는지?

■ 이활웅 : 1956년부터 71년까지 15년간 외무부에서 근무했는데 그 동안 59년부터 61년까지 뉴욕에서 근무했으며 68년부터 71년 사직할 때까지 LA에서 근무했다. 사직 후 지금까지 LA에서 살고 있다.

□ 공직에 계셨던 분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 외교관이 되기 전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후 5년 동안 나는 육군 정훈장교로 복무했다. 정훈장교의 임무는 군 장병의 반공의식과 대북 적대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공과 대북 적대는 한국외교에서도 절대적 패러다임이었다.

외무부에 들어간 얼마 후 나는 ECAFE (유엔 아시아 극동 경제위원회)사무를 맡게 되어 유엔의 여러 자료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정부의 반공, 반북 일변도의 대외정책이 반드시 국제사회의 일반적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또 60년부터 한일회담 사무를 보면서 남북정부의 정통성문제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남한의 주장에 하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963년 나는 정부의 대 중립국외교 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의 총영사관에 부임했다. 주 임무는 역시 프놈펜에 나와 있는 북한 외교관들과의 남북정부의 정통성문제 시비에 있어서 북한을 이기는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 곳 유력지인 La Depeche du Cambodge의 주필을 찾아가 전날 그 신문에 게재된 북한 측 주장을 반박하는 우리 측 성명을 실어줄 것을 요구했다. 주필은 우리의 성명을 실어주겠다면서 "그러나 나는 당신들이 당신들의 문제를 왜 중립국인 우리나라에 와서 서로 논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열심히 '북괴'의 불법성과 잔학성을 설명했더니 그는 "그러나 내 눈에는 당신들은 다 똑같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한마디는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남북은 결국 한 민족인데 둘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남들 보기에 얼마나 어리석고 흉한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때부터 나는 남북 간의 문제를 분단지향적이 아니라 통일지향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 공직 사퇴의 계기는?

■ 65년 말 캄보디아에서 서울에 돌아와 보니 외무부가 장관을 둘러싼 모 대학 출신파와 차관을 따르는 다른 모 대학파로 갈라져 파벌인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상공부장관이 "경제외교 강화를 위한 외무부와 경제부처간 인사이동계획"을 만들어 박정희의 재가를 얻었으며 이에 따라 외무부에서 상공부와 교환하는 직원을 인선하게 됐는데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는 내가 억울하게 거기에 걸려들어 상공부에 가게 됐다.

1년여의 상공부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를 외무부는 경제외교와 아무 상관없는 여권과장으로 보직했다. 그리고 6개월 후인 68년 말 나는 LA 총영사관으로 부임해 왔다. 그런데 69년 초 간첩 이수근이 위조여권으로 홍콩으로 탈출한 사건이 발생해 외무부와 중앙정보부가 서로 책임을 전가하다가 결국 외무부의 현직 및 전직 여권과장을 문책하고 시말서를 받기로 결말을 지었다.

이에 따라 시말서를 낸 나는 그로 인한 인사상 불이익으로 후배가 계속 앞질러가는 괴로움을 겪으면서 공무원생활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 또한 아이들은 나이가 차 가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내 능력으로 아이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여러 날 협의 끝에 아이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기로 하고 71년 말 사표를 냈다.

'너무나 부러운 중국선수들의 박수'

□ 공직사퇴 후의 생활은?

■ 나의 공직사퇴 결정이 알려지자 이곳 교포 실업가들 중 동정하여 같이 일하자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사석에서 중앙정보부장을 비난한 일이 서울에 알려져, 사업차 서울에 간 기회에 당국에 체포돼 반공법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2년을 복역하게 되어, 나는 부득이 자력으로 생활을 개척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선 미국인이 운영하는 공장에 들어가 파이버글라스로 배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나중에 조그만 파이버글라스 공장을 차렸는데, 한 2년은 반찬값도 나오지 않아 아내가 따로 가발 가게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 후 내 사업이 점차 일어나서 아이들 다 대학도 마치고 또 조그만 집도 장만했다. 92년에 사업을 정리하고 지금은 조용히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 미주지역에서 활발한 기고활동을 해오신 것으로 안다.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이런 활동을 하게 됐는지?

■ 84년 LA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북한도 참가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82년경부터 재미동포 사이에는 북한선수들이 오면 응원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이론이 분분하였다. 예컨대 남북이 맞붙는 경우, 북일이 대전하는 경우, 혹은 북미가 경합하는 경우 북한을 응원해야한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그 때만 해도 인본과 대전하더라도 북한을 응원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더 컸다.

나는 미국이나 일본과 싸울 때도 북한을 응원해야 하며 남북이 붙을 때는 양쪽을 똑같이 응원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공산권의 보이콧에 따라 LA올림픽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시 중공이라 부르던 중국은 공산권의 보이콧에 동참하지 않고 LA올림픽에 참석했고, 중국 선수들은 수십만 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개막식에 입장하여 정해진 자리에 서서 계속해서 입장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대만 선수들이 입장하게 되자 중국 선수들 중에서 한 두 사람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모두가 대만 선수들을 위해 열렬히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직접 내 눈으로 보며 너무나 부러웠다. 중국 사람들은 역시 우리보다 잘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경우 북한 선수들의 입장을 남한 선수들이 박수로 환영해 줄 수 있을까? 그랬다가는 아마 남산에 불려가 경을 치거나 감독의 목이 잘리겠지? 왜 우리는 중국 사람들처럼 대범하지 못할까? 88년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돼 있는데 그때까지 남북이 가까워져서 북한 선수들이 서울에 와서 남한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입장식에 들어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밤 나는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내 생각을 서투른 글로 적어 이곳 교포주간지 '코리언 스트릿 저널'의 독자란에 투고했더니 며칠후 지면에 게재되었다.

용기를 얻어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서 몇 번 더 보냈더니 편집자로부터 통일문제 위주로 월 1회 정도 칼럼을 쓸 수 있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밑져봐야 본전이란 뱃심으로 승낙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친북이론의 대부'에서 통일뉴스 상임고문까지

□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할텐데.

■ 과거 외교문제에 관한 자료를 수집, 분석, 보관하던 경험을 살려서, 남북문제에 관한 서적, 신문, 간행물 등 자료를 모아 주요 항목별로 정리해 두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집에서 혼자 하는 일이라 불충분하기 짝이 없으며 또 최근에는 시력과 기억력의 감퇴로 점점 더 제약을 받고 있다.

□ 통일운동 단체에 직접 참여하신 경험은?

■ 나는 무슨 운동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자신을 철저한 통일지향인(統一指向人)으로 닦아간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그리고 통일운동권의 행사에는 가급적 참가하고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통일운동 단체에서 권유를 받아도 가입은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94년 초 북미간 핵협상이 정체상태에 빠져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때, LA의 몇몇 통일운동권 인사들이 사태를 그냥 좌시할 수 없어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에 대한 무력사용 반대를 미국언론에 호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도 이에 적극 참여했다.

이 일이 계기가 돼 '통일마당'이란 단체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추대됨으로써 나의 '운동불참'의 원칙은 깨지고 말았다. '통일마당'은 매월 세미나를 개최하여 전문가의 발표를 듣고 토론한 결과를 회지로 발행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지만, 회장인 내가 자금조달 능력이 없어서 약 1년을 버틴 후 해산되고 말았다. 지금도 부끄러운 경험이었다.

□ 글을 쓰거나 활동을 하시면서 주변에서 혹시 친북인사나 좌경세력 등으로 매도당한 적은 없는지?

■ 처음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친북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글을 쓴다고 우려도 하고 충고도 해 주었다. 그러나 남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직 공정한 입장에서 통일만을 위해서 두려움 없이 글을 쓰려고 하는 내 입장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점차로 늘어갔다.

물론 군사독재를 옹호하며 무조건 반북을 신봉하는 인사들은 나를 '친북이론의 대부'로 부른다는 기사가 이곳 교포 언론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남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인해 결국 남북 양쪽 당국으로부터 모두 경원시 당하는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도 씁쓸하지만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 통일뉴스 상임고문을 맡게 되신 계기는?

■ 나는 서투른 나의 글을 실어주는 통일뉴스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데 통일뉴스에서는 늘 글을 보내줘서 고맙다며 나를 상임고문으로 모시겠다고 하기에, 나에게 그런 자격은 없지만 모처럼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그 제의를 수락했다.

통일뉴스에서 자료실을 만든다고 그동안 쓴 글들을 보내달라고 해서 모두 보냈는데 내 이름을 단 자료실에 올려놓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해줬다.

"한미동맹의 족쇄, 민족장래 위해 벗어 던져야"

□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와 2기 행정부에서의 변화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전망하는지?

■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때 북한과 맺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새로운 북핵의혹을 제기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는 2000년 6월의 남북공동선언으로 무르익어가는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운에 찬물을 끼얹고 남한의 대미종속을 영속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부시 2기 행정부의 한반도정책도 근본적으로 같은 궤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후반에 있어서 미국의 문제는 팽창하는 소련세력을 저지하고 붕괴시키는 것이었는데 미국은 그 문제 해결에 성공했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은 유일 초강국으로 세계제국의 꿈을 실현 할 참인데, 인구 13억의 중국의 약진이 미국의 앞날에 암운을 예시하고 있다.

그대로 두면 언젠가는 미국보다 더 부강해질 것이 분명한 중국을 그렇게 되기 전에 언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지금 미국의 외교, 안보, 국방정책의 핵심에 놓여 있는 과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에 접경하고 있는 한반도가 미국의 안보에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결국 이 큰 그림 속의 한 부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볼 때, 그 동안 미국의 충실한 추종자였던 남한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점차 중국에게도 추파를 던지는 나라로 변해가고 있다. 또 남북관계도 심상치 않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장차 남북이 통일된다면 통일한국은 분명히 미국에 등 돌리고 중국에 붙을 가능성이 높다고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우려하고 있다. 그것은 대 중국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남북 간의 화해와 통일을 저지해야 하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켜 친미적인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북핵문제도 그래서 불거진 것이며 한미일 공조체제도 그런 큰 그림의 일환으로 미국이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은 무조건 좋은 나라요 고마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미국은 결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꼭 나쁜 나라가 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여러 나라가 각축하는 국제관계에서 특히 강대국들은 다 자기 나라의 국가이익에 따라서 거짓말도 하고 음모도 꾸미고 억지도 부리는 것이다. 냉엄한 국제사회의 윤리로는 그런 강대국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는 약소국들이 어리석은 것이다.

이런 판국에 우리 민족은 미국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중국에 붙을 것이냐를 두고 서로 갈라져 싸울 것이 아니라 속히 통일을 이루고 한 덩어리가 되어 민족의 살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 최근 몇 년간 한미동맹이 요동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 한미동맹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우리 민족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남한은 한미동맹 덕으로 경제적으로는 큰 혜택을 입었다. 1인당 국민소득도 머지않아 2만 불이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 동포들의 희생을 담보로 얻은 혜택이었다. 북한 동포들은 미국의 압력 속에 굶주리고 시달리고 있는데 남한만 미국의 비호 속에 국민소득이 2만 불이 아니라 3만 불이 된들 그게 무슨 장한 일이겠는가?

한미동맹의 족쇄는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속히 벗어 던져야 한다.

"미주지역 통일운동, 미국정부에 영향 미쳐야"

□ 최근 일본의 군국주의화 경향과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거의 동시에 집권하여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보수 우경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최근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군국주의화도 미국과의 조율하에 추진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아시아에 죄를 지고도 속죄하지 않은 과거 때문에 중국의 강대국화를 미국 못지않게 겁내는 나라이다. 일본이 북한을 미워하고 압박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일본은 또한 친일파의 정치적 유산을 승계한 남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독도도 일본 땅이라고 우기며 식민지 지배도 한국의 근대화를 도운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남북이 갈라져 싸우며 남한이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는 한 일본은 한국을 계속 우습게 여길 것이다.

□ 미주지역에도 많은 통일단체와 통일인사들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 과거 군사독재의 암울했던 시절, 한국 내에서는 통일을 논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 적이 있었다. 그 때 미주지역의 통일지향적인 인사들의 활동이 남한의 통일운동의 부활에 일조를 하고 또 남북 간의 가교 역할도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통일은 무엇보다도 미국에 의하여 방해되고 있으니 이제 미주지역의 통일운동은 한국 내 보다도 미국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중점을 옮겨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장애가 없는 젊은 세대의 호응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며 또 교회활동 등에 집중되고 있는 교포의 자금원을 통일운동 쪽으로도 돌리는 방안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 가족상황과 최근의 근황을 들려달라.

■ 최근까지는 50년 넘게 해로한 내자와 합께 두 늙은이가 조용히 살고 있었는데 작년 10월 시카고에 살던 아들네 식구 넷이 직장 이동에 따라 LA로 이사와 같이 살게 되어 요즘은 복잡하지만 사람 사는 것 같이 살고 있다. 그 외에 세 딸이 상항, 뉴욕, 스파튼버그에 살고 있어 1 년에 한두 번 정도 찾아온다.

아직 건강은 좋은 편이지만 언제든지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며 조심조심 살아가고 있다.

(2005년 4월 1일자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작성일:2020-10-13 10:09:32 112.160.110.45